나의 첫 번째 어린이가 예상치 못하게국제학교에 합격하게 되어 요즘은 부랴부랴 제주 입도를 준비하고 있다. 그녀는 한순간에 나를 한 달 뒤 예정된 백수로 만들었다.
갑작스럽게.
최근 한창 바쁜 시즌이긴 하지만 매일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이건 좀 너무했다 싶은 로딩에 노동법을 운운하며 얼굴이 썩어가는 찰나이긴했지만 그렇다고 갑작스러운 백수를 계획하지는 않았다.
노인이되어서인지 이러한 급작스러운변화가 썩 달갑지만은 않다. 그래서 바쁜 시간을 쪼개어 틈틈이 마인드 컨트롤을 해가며 또다시 나란 인간에 대해 되짚어 보고 있다.
젊고 어렸을 때라고 해서내 성격상 감히 당시의 나 자신을패기 넘치던 시절이라 칭하기엔 상당히 과하지만적어도 예전의 나는 도전을 두려워하지않았고 변화와 새로운 환경을 설레어하는 편이었다 정도로는 말할 수 있겠다. 오히려 한 가지만 성실히 파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편이었어서 지금껏 내 인생 역시 이토록 돌고 돌아왔다.
인생 살며 새로운 환경에 얼마나 거부감이 없었냐 하면,
초등학교를 3군데나 다녔던 다초등경험자로서 그땐 이사가 마냥 좋았다. 잦은 전학은 어린이에게 스트레스일법하지만 나는 새로운 교실의 교탁 옆에, 처음 보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서서 선생님이 나를 그들에게 소개해 주시는 그것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중학교땐 엄마가 당시 공부 잘하는고3 언니의 원활한 대입준비를 위한 맹모역할 수행을 하시느라 또다시 이사를 감행했는데 덕분에 당시 동네학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매일 지하철을 갈아타며 씩씩하게 등교하는 여중생이 되기도 했다.물론 무거운 가방과 함께하는 머나먼 등굣길이 불만이긴 했지만 한편으로 새로운 동네와 앞으로의 등교수단이 신선했고 당시 지하철역 공익근무요원들과 농담 따먹기 해가며 나름의 즐거운 등하굣길을 보냈던 기억이다.
고등학교땐 이과에서 뒤늦게 예체능을 선택하여 남들다 하는 야자를 홀로 째고 미술학원으로 향했다.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이질적인 존재였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대학교땐 홀로 유럽여행을 40여 일간 떠났었는데 무슨 치기였는지 일부러 휴대폰도 두고 첫 번째 도시에서의 숙소만 예약하고 떠났다. 홀로 넓은 세상에서 생각 좀 하고 올 테니 나를 찾지 말라며(?) 오직 이메일로만가끔씩 부모님께 나의 생사를 전달했다. 결국 40일동안 3번정도 연락했던 것 같다.
내일의 숙소는 오늘 정했고 여행지에서 만난 일정이 맞는 이들과 동행했다.
그렇게 닥친 생경한 환경은 나를 두근거리게 했다. 꼼꼼하지 못한 성격 탓에 여러 가지 사건사고들도 있었지만 생사를 오가는 중한 일들이 아니었고 어디든 다 사람 사는 곳인지라 친절하게 다들 잘 도와주었다.
다만 지금 엄마 된 입장이 되고 보니 그렇게 헛소리하며 여행가겠다는 딸을 순순히 보내주신 부모님도 참대단하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쨌든 지금의 나는조금 달라진 것같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내 몸 하나만 건사해서 될 일이 아닌 두 어린이들의 보호자가 되어서 인 걸까. 이제는 설렘보단 걱정이 앞서고 새로운 준비에 분주한 지금이 조금은 버겁다.
비록 얇지만 내 마음속 귀찮음이란 것이 일단 가장아래층에 존재감 있게 깔려있고, 노인으로서 이제는 안정적이고 싶은 마음이 그 위에 조금, 물속의 오리발은 그만 젓고 수면 위에 둥둥 부유하고만 있다가 훨훨 날아가고 싶은 마음도 조금...
하지만 그렇다고 이 현실을 거부하거나 도망칠 수도 없고 또 그러고 싶지는 않아서 약간은 떠밀리듯이 이동과 변화를 위해 작성된체크리스트를 하나씩 클리어하고 있는 중이다.
이번이 내 인생 마지막 변화는 아닐 것임에 왠지 모르게 확신이 든다. 또다시 귀찮고 두려운 도전이 반복될 것 같지만 이번이 뭔가 앞으로 남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에너지를 쏟아야 할 시기인듯한 직감이다.
내일 전학 갈 학교에서 만날 새로운 친구들과 교실을 상상하며 설레었던10살의 나,
지하철노선표를 다시금 숙지하며 내일의 등굣길을 시뮬레이션하던 14살의 나,
로마 떼르미니역에 홀로 내려 두근거리며 숙소를 찾던 23살의 나를 떠올려본다.
40살의 나는 더욱 견고해졌고 보다 많은 경험을 했는데 무엇을 두려워하고 걱정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