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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괴물 Jun 16. 2017

아내가 여행을 갔다

#남편을 혼자 두지 마세요



아내가 여행을 갔다.


마케팅 관련 인사이트를 얻는다는 명분으로 도쿄에 갔는데, 스케줄 짜는 걸로 봤을 땐 그냥 놀러 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나저나 사랑하는 아내와 며칠을 떨어져 있어야 한다니. 결혼 후 늘 함께 했던 아내가 없는 적적함을 며칠 견뎌야 하겠지만 아내의 커리어와 즐거움을 위해서 양보하기로 했다.


아내 없이 처음 맞는 그 감정은 뭐랄까..



#힐링 #자유 #야호




나에게는 그렇게 결혼 후 처음 맞는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하지만,

생각보다 시간은 너무 허무하게 지나갔다.

3일째가 되던 날, 자유를 즐길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땐 이미 늦어버렸다. 처음 주어진 자유에 너무 방심했던 것 같다. 다음부턴 더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는 교훈만 남긴 채.

생각보다 이유는 간단했다. 불러내야 할 친구들이 죄다 유부남이었다. 결국 나에게 자유시간이 있어도 유부남 친구들에게 시간이 없으면 야호가 아니라는 것을 이번 기회에 알게 되었다.

결국 아내라는 가장 친한 짝꿍 없이 4일을 보내게 되었고, 적적한 마음에 혼자 하는 식사는 몹시 단조로워졌으며 심심해서 이렇게 일기를 쓸 지경까지 이르렀다.

혼자 궁상맞게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고 있는데 광보형에게 메시지가 왔다.

"이래서 남자들은 와이프 없으면 유기견 된다니깐 ㅋㅋ"

그래도 광보형이 잠깐 나를 만나러 와줬다. 그리곤 빨리 가버렸다. 형수님과 아들의 호출을 받고선 주인을 찾아 떠난 유기견처럼 유유히 떠나버렸다.



물론

그 와중에 얻은 것이 있다면 바로 나이키 에어맥스! 적적한 마음에 홀로 쇼핑을 갔다가 잠깐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어느새 쇼핑백에 나이키 신발이 들어있는 게 아닌가. 이 모든 사태는 정신을 잃었을 때 옆에서 말려주는 아내가 없어서 일어난 일이다.


그러니깐,

#남편을혼자두지마세요 
#허전한마음에나도모르게그만
.
.
#하지만가끔은괜찮아
#사고싶은게참많구나


리미티드 에디션은 참 묘하다, 안 살 수가 없게 만드는 심리. 샀다가 맘에 안 들면 환불하면 된다는 광보형의 집요한 꼬드김에 넘어간 게 잘못이었다. 옛말에 친구를 잘 사귀라 했는데. 이런 무계획적인 소비를 조장하는 광보형!! 정말 고마워.


또 다른 성과가 있었다면 그간 미뤄 왔던 책들을 마무리했던 것. 적적하고 외로운 심리상태가 최적의 독서환경을 만들어 줬다. 출퇴근 지하철에서만 틈틈이 읽다가 작정하고 서재에서 책을 읽으니 더 깊게 책에 빠져버렸다.




다시 열정적인 조르바 님을 만났고, 김훈 님의 장편소설도 마무리했다. 약간은 무거운 주제의 소설이라 한 번에 읽기 싫었던 책이었는데 드디어 끝이 났다. 그리고 얼마 전 구매한 임경선 님과 이유미 님의 에세이집을 읽었고 마지막으로 지금은 잊어버린 시를 찾아 여행을 하는 중이다.




아내와 나는 참 쿵짝이 잘 맞는다. 사실 난 그리 재밌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들 앞에 서는 걸 그리 좋아하지도 않고 주로 많이 듣고 웃어주는 타입이다. 근데 아내는 나의 보잘것없는 개그에도 늘 진심을 다해 웃어준다. 마치 아내를 즐겁게 해주는 일이 나의 가장 큰 재능 이기라도 한 듯말이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남들이 볼 땐 그저 조용하고 차분한 여자지만, 난 아내와 함께 하는 매 순간이 너무 유쾌하고 즐겁다. ‘유머 코드’는 사소한 부분일지 몰라도 우리를 단짝으로 만들어 준 가장 소중한 도구 중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결혼한 지 그리 오래 지나진 않았지만 우린 자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어떤 사물 앞에서, 어떤 사건 앞에서 비슷한 것을 느끼고 비슷한 생각을 한다. 함께 살아감에 있어서 그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상대에게 설득하지 않아도 되고, 상대가 좋아하는 걸 강요받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편안함을 넘어선 평화로움.


같은 방향을 본다는 것. 같은 시선으로 살고 있다는 건 참 감사한 일이다.


부부가 되어 평생을 함께 살아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나도 한 해 한 해 지날수록 조금씩 더 알아가고 있지만 아마 그건 평생을 학습해야 알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나는 지극히 혼자여도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하지만 둘이었을 때 그보다 더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요즘 아내는 고민이 많다. 모든 30대 여성들이 그렇듯 아내도 쉽지 않은 환경 속에서 미래를 고민하고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달리기만 했던 20대와 다르게 결혼 후 직장생활은 이런저런 제약이 있기 마련이다.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과정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함께 공감해가며 대화하고 있지만 아내의 고민들을 온전히 다 이해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내가 이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다.


어떤 결정을 해도 당신을 전적으로 응원할 거라고. 우린 그냥 지금처럼 행복하게 살자고. 남들보다 좀 뒤쳐저도 되고 느리게 가도 되니 지금처럼 사소한 일상이 주는 행복을 놓치지 말자고. 만족하며 사는 삶, 감사하며 사는 삶이 주는 축복을 만끽하자고.


일보다 중요한 건 가족과 건강임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에겐 늘 빛나는 미래만 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존경하는 당신은 그 존재만으로도 내게 너무 큰 의미가 되고 힘이 되어 준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드디어 내일 아내가 온다. 아직도 하루가 남았고, 지극히 조촐한 식사를 마친 나에게 메신저로 사진만 달랑 보내왔다.


....


갑자기 몹시 배가 고파진다.

어디 갔더라 배달의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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