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과 H선생님은 류시화의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를 꼭 읽어보라고 추천해 주신 후 재외 한국학교 생활을 마무리 하고 올해 귀국하셨다. 학교 도서관에도 신청해 놓았으니 쉽게 빌려볼 수 있을 거라 했다. H선생님과는 일 년간 같은 교무실에서 지냈지만, 마르틴 부버 식 ‘나-그것’의 관계에 불과했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인사 하고 교무실에서는 업무에서 필요한 대화를 나누는 관계. 1년이 끝나가는 학기 말 회식 자리, 마지막으로 대화할 수 있는 기회라 싶어 선생님을 붙잡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선생님은 전국체전에서 X위를 하기도 했고, 무려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전력도 있는 국내 최고의 육상 선수였다고 들었습니다. 체육계에서 탑이었던 당신이 학교라는 보통의 평범한 집단에 속해 있다는 게 성에 차지 않은 경험이 있습니까?”
사실 이 질문은 나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나는 결코 최고의 위치에 오른 적도 없으면서 어릴 적부터 우월의식이 잠재되어 있었다. 어른이 되어 학교 교사가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영민하지 않은 학생들을 재촉하며 깨우고 공부하게 만드는 게 웬 시간 낭비 에너지 낭비인가 싶었고, 업무에 있어 오류투성이인 동료교사 그리고 어린 교사에게 자기 일을 밥 먹듯이 미루는 선배교사가 나와 같은 위치의 교사라는 게 때로 자존심 상하기도 했으며, 결석신고서를 가져 오지 않은 학생들을 졸졸 따라다니고 무의미해 보이는 클릭질이 난무한 학교 업무를 하며 나라는 존재가 꺾이고 추락하는 듯 했다. 나는 덧붙였다. “학교보다 더 큰 물에서, 예를 들면 국가대표 코치나 감독 역을 맡으며 명망 높은 지도자의 길로 갈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선생님은 학교에 남아 계시는 것을 택하셨나요?”
선생님은 우연한 기회에 체육 교사가 된 이야기, 교사를 하면서 국가대표 선수 생활을 병행하였던 이야기 등을 해주시며, 체육고등학교에서 재능 있는 학생을 가르치며 기쁨을 느꼈던 경험을 풀어놓아 주셨다. 굳이 지도자가 되지 않더라도 학교 교사로서 자신이 가진 능력을 학생에게 베풀고, 뛰어난 아이들로부터 또 다시 영감과 자극을 받는 생활은 꽤 보람찼다고. 한국 어느 비평준화 지역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모아 놓은 학교서 가르치고 있는 내 친구의 말이 동시에 떠올랐다. 학교를 그만두더라도, 학생을 가르치는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곳에서 한 번 쯤 경험을 해 보고 난 후에 결정하라는 말.
나는 다행히도 올해 이 기쁨이 무엇인지 조금은 느끼며 학교 생활을 하는 중이다. 물론 순수하고 좋은 학생들을 만난 행운도 매우 크지만, 엉겨 있던 내 마음의 문제가 풀려 가고 있으며 여유를 되찾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2년만 더 공부해서 박사학위를 따면 대학교수 임용이 가능한 곳에서부터, 교육청과 평가원 문항 출제 위원으로 유능하게 살 수 있는 삶에서부터 재외 한국학교 도전이라는 번듯한 명목으로 ‘도피’했고 ‘도망’쳤다. 그 우월한 곳에서 억지로 지탱하며 올라가려는 나는 암울했고 숨막혔다. 그동안 나에겐 ‘퀘렌시아(투우장에서 투우 경기를 하는 소가 숨을 고르며 여유를 찾는 공간이라는 스페인 어로, 피난처 또는 안식처라는 뜻)’가 전혀 없었다. 류시화는 책의 첫 장에서 자신의 퀘렌시아를 공유하며 독자에게 본인의 ‘퀘렌시아’는 어디이며 또 무엇인지 묻는다.
“히말라야 트레킹, 고산 부족과의 생활, 나를 가족처럼 보살펴 준 오지 마을 사람들, 갠지스 강의 작은 배 위에 누워 무념무상하게 바라보던 파란 파늘, 앞니 네 개 부러진 탁발승과 사과를 깨물어 먹을 수 있는가 시험하며 천진난만하게 웃던 일들 …… 이런 ‘쉼’의 순간이 없었다면 나 역시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누군가 말했듯이, 인생은 쉼표 없는 악보와 같기 때문에 연주자가 필요할 때마다 스스로 쉼표를 매겨 가며 연주해야만 한다. 가장 진실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퀘렌시아이다.” (본문 15쪽)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아찔했고 도대체 뭘 해야 할지 막막했지만, 여전히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도 아니지만, 자기 치유의 시간을 가지며 적어도 (도전)해보고 싶은 것들이 생겼다. 내 삶에 활기를 불어 넣는 것들로 채워진 충만한 삶을 생각하면, 10년 간 느끼지 못했던 ‘설렘’이라는 감정이 차오르는 것만 같다. 나는 알지만 그는 나를 모르는 저자 류시화는 오직 나를 위해 이 퀘렌시아 글을 쓴 것만 같다는 착각이 든다. “삶에서 소중한 것들을 잃었을 때, 매일매일이 단조로워 주위 세계가 무채색으로 보일 때,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상처 받아 심장이 무너질 때, 혹은 정신이 고갈되어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렸을 때, 그대가 바로 자신의 퀘렌시아를 찾아야 할 때이다. 그곳에서 누구로부터, 어떤 계산으로부터도 방해받지 않는 혼자만의 시간, 자유 영혼의 순간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건강한 자아를 회복하는 길이다.(본문 17쪽)”
H선생님은 떠나기 전, 사용을 다 못한 드럼 교습권(한화 60만원 상당)을 통 크게 선물하고 가셨다. 우연히 나의 퀘렌시아 한 곳이 추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