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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인 한유화 Oct 11. 2023

무용담을 헐값에 사고, 잃을 것 없이 춤을 춘다.

브라질 강도들과의 몸싸움 in Rio

자켓을 훌렁 벗고 허리에 묶어두었던 셔츠도 풀어놓고. 공항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는 사람처럼 주머니 안에 있는 것까지 한 움큼 쥐어서 탈탈 꺼내놓고 빈 몸이 된다. 호기롭게 문을 확 열고 나서려다가 순간 멈칫하고 돌아서서 맥주 한잔 마실 지폐 한 장만 얼른 집어서 다시 쑤셔 넣는다.


"밤엔 혼자 다니지 말란 얘기 못 들었어?"

깜빡했지. 아니, 방심했지.

한번 강도를 당하고 나니 잃을 게 없다. 잃을 게 많아야 겁도 많아지는 법이라, 나는 더욱 겁 없는 모드가 되었다. 목적지도 없는 주제에 성큼성큼 호쾌하게도 걷는다. 이미 깜깜해진 사거리의 빨간 불을 건너는 발걸음과 시선에 망설임이 없다. 매일 같은 강의실로 서둘러 가는 학생처럼 확실한 걸음으로 휘적휘적.




"돈으로 줄게, 돈으로!"

두 녀석을 이길 생각을 한 내가 바보지. 웬만한 현금보다는 내 휴대전화가 제일 이득인 걸 아네? 그라운드 압박으로 최대한 버티다가, '아, 두 명한테 맞으면 힘들겠지' 하고 생각하며 척추를 일으켜 세우자마자 카프킥으로 '아사바리' 당하고 끝 -


뒤엉켜 몸싸움하는 나를 발견한 한 사내가 뒤늦게 달려온다. 강도짓을 한 청소년들보다 훨씬 건장한 청년이었지만, 신기하게도 이 사람은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눈빛, 차림새, 정돈된 행동 등으로. (물론 상당히 매력적인 미남이었다.)


내가 다친 곳은 없는지 체크하는 그 앞에서 나는 서러움과 안도감에 '어흑흨' 하고 눈물이 터질 줄 알았는데, 우습게도 나는 분노에 사로잡혀 냉혈한의 눈빛이 되어있다. 이제야 드디어 안전한 동행의 품이 생겼는데도 눈으로는 강도들을 계속 좇고 있는 나 스스로도 어이가 없다.


다정한 미남이 피가 흐르는 내 팔을 붙잡고 닦을 것을 찾는 사이에도 나는 그에게 답을 하는 둥 마는 둥 온 정신이 강도를 찾는 데에 가 있다. 기어이 놈들의 실루엣을 찾아내고는 냅다 그쪽으로 따라 뛰어가는 나 자신! (당시에 다시 그들을 쫓아 뛰어간 이 선택이, 지금까지도 내가 나 자신의 리스크 관리 능력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납득 안 가는' 행동이다.)





이렇게 눈을 오래 뜨고 있었던 적이 있나.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시퍼렇게 서늘한 표정을 지으며 쫓아가다가 순간, 그들 조직이 떼거지로 나와서 나를 집단 공격할 수도 있겠군? ('다구리'라는 어감을 이길 어휘가 없네.) 그러면 그나마 어렵게 지켜낸 카메라, 여권도 털릴까 봐 거기서 stop.


생각해 보면, 룰을 어긴 건 나다.

지하철역에서 나온 후에 구글 맵이 잘 안 잡혔는데, 그때 바로 택시를 잡아타거나 역으로 되돌아가서 살폈어야 했다. 집까지 걸어가 보겠다고 어두운 광장을 지나다가 돌아섰는데, 내게 접근하다가 내 눈에 딱 걸린 청년.


순간 반대 방향으로 몸을 확 돌렸더니 뒤쪽에는 또 다른 청년이 함께 압박. 왼쪽은 분수대가 있는 막다른 공간이었기에 오른쪽  side step으로 훅 빠졌지만 이미 둘과의 거리는 너무 가까웠고, 두 명이 내 팔을 잡아 뜯기 시작한다. 이런 일이 생기면 가진 걸 다 내어주기로 마음먹었었는데, 막상 닥치고 나니 억울하기도 하고 아깝기도 해서 그렇게 할 수가 없네. 사진, 영상 자료들이 너무 아까운 마음이 들어서 본능적으로 반항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나마 폰이라도 갖고 뜨려고 한 그들도 처절했다.) 만약 내가 그 자리에서 순순히 폰을 내어주었다면 오히려 나았을까? 그랬다면 오히려 여지없이 피식자가 되어 가방도 자켓도 다 벗어줘야 했을까?


팔꿈치에 여전히 피를 흘리면서 들어온 나를 돌봐주던 호스텔 스태프. 내가 또 밖에 나가려고 하자, 그렇게 당해놓고 바로 어딜 나가냐며 hostel party를 즐기라고 권한다. 조금 놀다가 음악에 질린 나는 결국, 문을 박차고 나가서 지도도 없이 집 밖을 헤맨다. 확실히 조금 긴장이 되긴 하지만, 이렇게 마음이 쫄릴 땐 특 정 숫 자 외 치 기!!


난 잃을 게 없어! 나를 때리든 범하든 뭐, 해 봐라. 이번에는 더 지킬 것도 없으니, 누구라도 뭔가를 노리다 걸리면 무조건 한 대는 팬다.




결국 그렇게 뛰쳐나가서 거리의 연주를 즐긴다. 아, 인생 최고의 순간. 나의 흥에 탄복한(?) 한 연주자가 자기 드럼 스틱을 내어준다. 소싯적 노래방 탬버린을 가지고도 비트를 자유롭게 쪼개던 실력으로 신나게 치다가, 허리를 꺾어 돌리며 치는 '오고무' 스킬도 선보여 군중의 호감을 산다.


나는 폰이 없어진 후에야 정말 탐험가가 되었다.

줄이 끊어진 후에야 구름 위로 실컷 올라가는 헬륨 풍선이 된 기분이었다.


이건 부정(denial)의 단계나, 합리화가 아니다. 잃을 것을 가진 이상 자유로울 수 없는 게 인생이다. 그동안 항상 내 주머니의 안위를 살폈다. 그러나 잃을 게 없어진 지금, 나는 이 거친 도시인 리우*에서 유일하게 새벽 2시에 맘 편히 춤추고 돌아다니는 겁 없는 년이 될 수 있다.


거리를 틈 없이 메운 군중의 떼창도 무시하고 방금 내게 귓속말한 그의 눈빛도 흘려보낸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박자를 맞대는 춤이 아니다.

머리 위로 팔을 뻗어 동시에 흔드는 춤이 아니다.

시야에 다른 아무것도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무자비하게 젖혀 들고 하늘을 보고 추는 춤.


내 눈동자만큼이나 작은, 그 하늘 한 조각으로 리우를 기억할 것 같다.



*리우: 리우 데 자네이루(Rio De Janei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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