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상히 공부하고 실컷 계획한 다음, 그 계획을 깨는 것
여행지에서 누군가 당신에게 길을 물은 적이 있는가? 휴대전화 지도 app에서 눈을 뗀 채, 느긋하게 시선을 두고 걷는 여행자에게서는 현지인의 포스가 나오게 마련이다. 찾아간 맛집에 줄이 너무 길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플랜 B를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의 여행은 조금 다르다.
"소상히 공부하고 실컷 계획한 다음, 그 계획을 깨는 것"
이러한 여행 취향 덕에 나는 대체로 예습 복습이 착실한 여행을 하는 편이다. 너무 착실하게 예습하면 본 수업이 지루해지지 않겠느냐고? 걱정할 것 없다. 여행은 항상 예상치 못한 문제가 나와서 당황하게 되는 시험 같은 것. 지루한 만점자가 되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을 터이니.
여행지에 착륙한 후의 루틴 같은 게 있다. 어딘가로 바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부여잡고 출국장이 아닌 다른 층을 둘러보며 공항 부대시설을 미리 살피는 것!
: 이것은 마치 VIP 의전과 같은 것이다. 촉박하게 공항에 돌아올지도 모르는 미래의 나를 위한 사전기획이다.
: 간혹 입국과 출국 건물이 다른 경우가 있으니 체크한다.
: 내가 탑승할 항공사 카운터의 위치, 들러야 할 장소(화장실, Tax Free 신고구역 등)를 눈에 익혀둔다.
: 출국 시, 체크인이나 보안 검색이 예상보다 복잡해서 시간 잡아먹을 수 있으니 지연 요소가 있는지 살펴본다. (ex. 중국 공항은 건물에 들어갈 때도 보안 검색을 하고, 대체로 매우우우 줄이 길다.)
내가 여행지의 숙소를 예약할 때 의외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요소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관광지와의 접근성'이다. 맛집이나 주요 명소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보다는 교통수단과의 접근성이 오히려 효율 측면에서 영향력이 있다. 근처에 지하철역, 버스정류장 등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충족된다면 그다음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표는 '하루 일정의 마지막 코스와 얼마나 가까운지'이다. 대중교통 막차시간이 끊길까 걱정할 필요 없고, 밤늦게 택시가 잡히지 않아도 걱정 없는 그런 여행을 하고자 한다면 이게 참 중요하다. 술 한 잔 하다가 대화가 맞는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 귀가에 대한 고민과 부담 없이 자리를 옮길 수도 있는 것이다.
관광지와의 접근성을 내려놓고 저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하면 비싼 숙소만 즐비한 지역을 벗어나서 현지인 주거지역을 고려할 수 있게 된다. 놀이터에서 애들이 어떤 식으로 노는지, 공원에서 어르신들이 어떻게 쉬는지, 일반적인 현지인들이 언제쯤 출근해서 언제쯤 귀가하는 일상을 사는지 바라보는 여행을 할 수 있게 된다.
J형의 여행계획표는 예산 기획의 기능을 포함하곤 한다. ①여행 기간, ②해당 여행지의 물가를 반영한 식사 한 끼, 지하철 1회, 하루 숙박 등의 평균값, ③오차 범위 등의 값을 계수화해서 수식으로 입력해둔다.
여행이 시작된 시점부터는 지출 관리를 위한 가계부의 역할까지 포괄한다. 아마도 '교통비', '숙박비'등의 분류는 기본으로 되어있을 것이고 '필터'도 설정되어 있어서 원하는 조건에 맞게 쉽게 자료를 가공할 수 있게 해 두었을 것이다. 실제로 환전한 시점의 환율 및 수수료를 입력하면 이후에 기록한 지출 금액은 자동으로 원화 환산되도록 수식도 걸어 놓는다. 반드시 기획한 예산 내에서 여행해야 하는 경우에는 남은 기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식비, 숙박비 등의 최대 금액도 뜨게 해 둔다. (나는 강박이 최대치일 때 신호등 효과까지 넣어둔다. 지출의 추세와 예산 흐름에 따라 각 셀에 빨간불, 초록불이 들어오게 하는. 공감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반갑겠군.)
여행이 끝나면 chart를 통해 해당 여행의 특이점을 분석하고 감상(?)한다. 이렇게 기록한 내용은 웬만한 여행기 보다 더 자세한 자료가 되어준다. 다음 여행을 기획할 때는 이 판을 기반으로 해서 핵심 계수만 변경해주면 예산 기획도 뚝딱이다.
이 모든 활동의 계기는 내 성향과 취향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은 "소상히 공부하고 실컷 계획한 다음, 그 계획을 깨는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