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몸만 독립한 1인 가구?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집안(가정)이 평안해야 바깥 일도 잘된다’는 뜻으로 흔히 생각하게 되는 이 문장의 핵심은 사실, 모든 사회적 변화의 출발점이 ‘개인의 수양’이라는 점이다.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 가정을 바르게 하는 일이고, 가정이 바로서야 나라가 다스려지며, 나라가 다스려져야 세상이 평화롭다는 것이다.
이 문장은 간혹, ‘가족의 평안이 전제되어야 비로소 나 자신의 행복과 성공을 도모할 수 있다’는 식으로 다르게 해석되기도 한다. 가족 중 누군가 아프면 나머지도 함께 아파야 ‘정상’으로 여기는 사회. 가족이 흔들리는 순간에 “나만 괜찮다”는 말은 종종 이기적으로 들리기까지 한다. ‘가정이 바로서야 개인이 행복하다’는 말의 깊은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개인의 행복과 가족의 상태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되는 것 아닐까.
진정한 행복은 집단의 평안을 전제로 할 때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서은국의 책 《행복의 기원》에서는 ‘불행의 감소와 행복의 증가는 서로 다른 별개의 현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불행을 줄이는 일과 행복을 늘리는 일은 전혀 다른 트랙이라는 것. 불행한 사건을 겪을 때조차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희망처럼 들리기도 한다.
혼삶, 행복의 조건을 다시 묻다
많은 사람은 불행이 사라지면 행복이 저절로 늘어난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혼자 사는 일상을 반복하며 마주하는 ‘불만스러운 평안’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아무 일 없는 하루가 반드시 ‘좋은 하루’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고요한 집에서 별일 없이 보내는 ‘평안’한 시간이 반드시 ‘평온’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평안이 외부의 조건이라면, 평온은 내면의 상태다. 우리가 말하는 평온의 상당수는,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는 상황 조건보다는 ‘만족감’에서 온다.
1인 가구의 일상은 대체로 다인 가구에 비해 변수를 통제하기 용이하다. 예기치 못한 불행이 찾아오지 못하도록 제어하는 것은 비교적 쉽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삶이 단조로워지고, 감정의 탄력성을 잃는다. 그렇기에 혼삶의 행복을 좌우하는 것은 ‘불행에 대한 리스크 관리’보다는 ‘지속적으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일상을 설계하는 것’이 아닐까.
가끔 우리는 ‘문제가 없는 상태’를 행복으로 착각하며 살기도 하지만, 불행의 제거에만 집중한 삶은 결국 공백의 시간을 남긴다. 그 공백 속에서는 오히려 일상의 작은 결핍도 크게 증폭되어 울려온다.
평온은 결핍의 부재가 아니라, 결핍을 견디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타인과의 감정 분리에서 시작되는 진짜 독립
감정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혼삶의 일상에서 타인과의 상호작용이 줄어드는 상황과 그로 인한 정서적 결핍을 견디지 못하며, 맹목적으로 관계를 강하게 갈망하기도 한다. 누군가와 감정을 섞고 싶은 마음, 어딘가에 얽혀있고 싶은 이런 열망을 기반으로 상호작용하는 경우, 얼핏 보면 ‘인간관계에 적극적인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오롯이 혼자 서지 못한 상태에서 맹목적으로 인간관계를 좇는 것은 그 자체로 불균형이며, 의존적인 관계로 흘러가기 쉽다. ‘누군가와 함께 있어야만 안심되는 마음’은 결국 나를 소모시킨다.
진정한 독립은 물리적으로 거주지를 분리하는 것만이 아니라, 감정의 경계선을 스스로 세울 수 있을 때 완성된다. 홀로 있는 시간을 꾸준히 확보하며 내적 루틴을 만들고, 혼자 산책하기, 일기 쓰기와 같은 자기만의 리듬을 갖는 것이 정서적인 근력을 키우는데 도움이 된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신에게 솔직할 기회가 많아지고, 사람이 그리운 게 아니라 안정감이 그리웠던 것임을 깨닫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 관계의 갈망과 독립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힘, 그것이 바로 혼삶의 성숙함이며, 타인의 삶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진짜 힘이다.
누군가의 기분이나 행동을 내 감정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내가 조정할 수 없는 영역임을 인정하는 것은 연습이 필요하다. 이런 감정적 독립은 냉정함이 아니라, 관계의 건강한 온도 조절 장치가 되어준다. 사랑하지만 휘둘리지 않고, 함께하지만 잠식되지 않는 거리감을 찾아내고 지키는 것. 그것이 현대의 ‘수신(修身)’이자, 혼자 사는 시대의 새로운 ‘제가(齊家)’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