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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인 한유화 Mar 24. 2022

혼자라고 생각하는 건 나 혼자뿐

- 해파리 테러에서 나를 구한 인류의 사랑(?)

'독사에게 물리면 이렇게 되려나?'

'사약을 마신다면 지금 이런 고통이 식도 전체에서 느껴지는 거겠지?!'

해파리 테러로 혈관이 불탄다. 화상을 입은 듯한 데인 느낌이 피부가 아닌 몸 안에서 느껴지니 손을 댈 수도 없고 그저 온전히 고통스러워할 수밖에.  




 쿠바 '앙꼰 비치/Ancon Beach'는 사람이 없어 한적하고 여유로웠다. 해변 전체를 나 혼자 전세 낸 듯 실컷 누릴 수 있다는 생각에 괜히 더 기분이 산뜻해졌다. 제주도 용암수 아이스크림 색(a.k.a. 소다색)에 가까운 바다 빛이 참 예뻤고 파도 없이 잔잔해서 더 맑았다. 파울로 코엘료의 <히피/Hippie>라는 책을 멀쩡한 한글 번역본 놔두고 굳이 원서로 챙겨 오는 바람에 몇 장 읽다 말고 단어 찾느라 고생이다. 하지만 왠지 모를 지적 허영심이 슬그머니 밀려오는 게 여간 기분 좋은 게 아니네! 기분 낼 정도로만 짧게 책을 읽다가 책갈피도 끼우지 않고 대충 접어 넣고는 아직 반 정도 남아있던 크리스탈 캔맥주(Cerveza CRISTAL)를 다급하게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바다로 뛰어들어가서 발 밑을 보니 '내가 수돗물을 대야에 받아놓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발톱이 생생하다. 소지품을 아무 데나 툭 던져두고 놀아도 훔쳐 갈 사람이 없어 보이는 한적한 해변이라 나는 더 마음을 놓고 정수리 끝까지 바닷속으로 푹 담갔다.


 얼마 놀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살짝 모기가 문 것처럼 뭔가 허리춤이 따끔하더니, 앞쪽 배 전체가 전기 충격기를 갖다 댄 것처럼 찌리리리릿??!!!! 정신없이 파지지직!!!

"아, 너, 설마 그거냐?!"

지독한 어류 공포증(Ichthyophobia) 때문에 수산시장은 일행 없이 절대 가지 않고, 횟집에 가도 눈 위에 깻잎을 던져 덮어주는 나이기에 고통보다도 두려움이 커서 패닉 상태가 되었다. (영화 '불한당'에서도 나 같은 사람이 나오길래 너무 반가웠지!) 파리가 귀에서 윙윙댈 때처럼 소름 끼치는 기분을 떨쳐내려 손을 초고속으로 움직여서 배 위를 파다닥 훑는다. 동시에 괴상한 신음소리를 내며 물 밖으로 뛰쳐나와서 보니, 맞네 해파리.


 근데 이게 생각보다 꽤 아프다? 공포증과 뜨거운 쿠바 태양 때문에 더 그랬는지는 몰라도 정신을 붙잡기가 어렵고 눈도 이상하게 뜨고 있는 기분이었다. 뭔가 해야 한다. 비틀비틀 걸어서 저 멀리 선베드를 빌려줬던 관리인에게 쏘인 부위를 보여줬다. 그가 의연하게 나를 안심시키며 이것저것 설명해 주는 사이에 주변에서 쉬고 있던 휴양객이 어디선가 식초를 희석한 물을 가져다줬다. 흉측한 혈관의 모습이 나아지지 않자, 어디선가 하나둘씩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각자의 고견을 더하기 시작했다. 각자 마시고 있던 시원한 음료를 배에 부어주기도 하고, 낯선 약품 이름(살라? 비나그린?)을 적어주기도 했다.

'이 해변에 나 말고도 사람이 있었던가?'  

내가 혼자라고 생각하는 건 나 혼자뿐이었나,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나를 보고 있었다. 징징댈 사람이 있다면 진짜 혼자인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초물을 배에 문질문질 하니 냄새가 꽤나 고약하다. 사실 효과가 있는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혈관 안쪽이 불타는 듯한 고통 탓에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으니 어쩔 수가 없다. 독이 퍼지면서 혈관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다. 나뭇가지처럼 퍼지는 그 모양이 은근히 예쁘게 보여서 더 승질이 났다. 어린 시절 '물감 불기'를 아는가? 물감 한 방울 툭 떨어뜨린 후 후후 불어서 가지처럼 뻗어나가게 모양을 내는 그런 그림.  


고통을 잊어보려 갖은 애를 쓰다가 순간.......!  '아, 그럴게 아니지? 생생하게 기억해야지!' 싶어서 갑자기 변태적으로 감각에 집중했다. 캡사이신을 들이부은 것처럼 피부 전체가 쓰라리고 따가운 거 같기도 하고, 혈관 깊숙한 안쪽 벽이 엄청나게 맵고 뜨겁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혈관이 더 넓게 부어올랐다. 독한 럼주를 목구멍에 부어가며 고통을 잊곤 하던 캐리비안의 '잭 스패로우'를 떠올리며 시원한 칵테일인 다이퀴리/Daiquiri를 한 잔 사 와서 상처 위에 얹어 열감을 달래 본다.




앙꼰 비치에 노을이 왔건만, 왜 내 통증은 나아지질 않는 것인가



 혼자 하는 여행에서는 아주 사소한 에피소드라도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받아들이게 된다. 나는 혼자 놀고 있었지만, 정말 혼자는 아니었다. 오늘의 내게는 정다운 해변의 조력자들이 있었지만, 만약 이럴 때 정말로 아예 혼자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된다. 혼자 살면서도 정말 혼자이지는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한다. 결혼하지 않고 혼삶을 계속한다면 나는 언젠가 정말 혼자가 될 것만 같은 생각을 하곤 했지만, 한 개인은 언제나 주변 사람과, 환경이나 사회, 문화와 연대하고 있는 존재라는 기분이 드는 건 꽤나 따뜻했다.


엄살떠는 걸 질색했던 나는,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기로 마음먹은 이후부터 오히려 쉽게 징징대고 호들갑을 떤다.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고 엄살 부리는 꼬락서리(?)를 참 싫어했던 나지만, 정말 오랫동안 혼자 살게 될 나에게는 그 정도 어리광은 허용하고 싶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 관대할 수 있으니 얼마든지 스스로에게 의존하라고. 센 척 괜찮은 척은 스스로에게 할 짓은 아니므로 "혼삶"에서는 얼마든지 징징대도 된다고.




쓰린 배를 부여잡고 마을로 돌아와 저녁식사할 곳을 둘러본다. 갑자기 해파리냉채를 좋아하시는 우리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한테 이르고 싶다. 엄마가 너를 씹어먹어 버릴(?) 것이다!) 해파리에게 테러당한 날이니, 동족인(?) 수중생물에게 복수하고픈 마음이 생겨서 랍스터를 먹었다. 해파리에게 뺨 맞고 랍스터에게 화풀이하는 건 생각보다 속이 시원한 선택이었다. 맛있기도 어마어마하게 맛있었고.


해파리 흉터는 여행 세 달이 지난 후에야 조금씩 사라졌다.

나는 여전히 혼자 여행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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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트리니다드(Trinidad) 근교의 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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