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혼하지 않는 혼삶, 동네 친구의 니즈
다 죽어 없어질 것이다. 2주 후에 내가 직접 시신을 수습해야 할 것이다. 그리 길지 않은 여행을 떠날 예정이지만, 혼자 사는 1인 가정에서는 가장인 내가 집을 비우면 나의 semi-가족이었던 식물과의 반려(伴侶)는 거기서 끝이 난다. 내가 강아지나 고양이와 함께 살겠다는 것도 아니고 배우자나 자식을 바라는 것도 아닌데, 하다 못해 식물과도 반려하기 어려운 게 현재의 내 삶이라니! 갑자기 발길질을 해대고 싶어 진다.
봄이 되어 로즈메리 화분을 데려왔다. 스테이크를 구울 때 가차 없이 사지를 부러뜨려(?) 넣을 생각이다. 케일은 씨앗으로 사 와서 대충 뿌려뒀는데도 반가운 잎사귀가 나왔다. 새싹 어린 티만 벗으면 바로 샐러드를 만들어줄 생각이다. 이런 잔혹한 미래를 꿈꾸며 화분에 물을 주는 일은 생각보다 룰루랄라 즐겁다. 흙바닥이 꿀꺽꿀꺽 물을 빨아들이는 모양새를 보고 있노라면 퇴근 후 냉장고 앞에서 선 채로 캔맥주를 들이켜는 그 기분이 상상돼서 저절로 속이 시원해진다.
내가 돌아오면 다시는 이들의 싱그러운 모습은 없을 것이다. 두 손 놓고 이들을 죽게 놔둘 수는 없다. 가정용 자동급수 시스템을 찾아내거나 당근마켓에서 화분 물 주기 계모임이라도 만들어야겠다. 육아를 하는 것도 아니고 반려식물을 키우겠다는 이유만으로 친정 엄마 곁으로 이사를 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화분이 목마른 건 그나마 낫다. 사람인 내가 목마를 때가 고역이다. 찐득한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동네 친구와 맥주 한잔 하고 싶어질 때, 그 목마름이 진짜 문제다. 접근성을 기반으로 한 '동네 친구'의 핵심은 ①죄책감 없이 ②아무 때나 불러내는 즉흥성을 발휘할 수 있고, 수시로 ③숏 콘텐츠를 기획하기가 용이하다는 점 아닐까.
자의식이 강하고 도움을 청하는 능력도 훈련도 부족한 나는, 정서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도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에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라고 하나' 싶은 생각은 물론이고 괜히 부정적인 기운만 전파하는 건 싫다고 여겨서 아예 누군가를 찾지도 않을 때가 많다(① 죄책감). 하지만 동네 친구가 있을 때는 다르다. 거창한 계기 없이 담백하게 만남을 청할 수 있고, 정서적으로 매우 지쳐있는 어느 날에도 내가 슝-하고 행차할 수 있다(②즉흥성). 막상 만나서 몇 마디 나누다 보니 집에 가서 얼른 씻고 쉬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그 또한 아주 적은 죄책감만으로 결단할 수 있다. 배달음식을 넉넉하게 시킨 어느 날에 갑작스럽게 만나서 밥만 먹고 헤어질 수도 있고, 심지어는 반찬통에 음식만 받아 들고 집에 갈 수도 있다(③숏 콘텐츠)
동네 친구를 사귀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이 세 가지의 핵심을 충족하는 대체자원이나 방법을 찾는 것도 좋다. 접근성을 개선하려는 노력으로 운전을 배우고 차를 사는 사람들(급 맥주는 어렵겠군), 가상공간에서의 교류를 강화한다거나. 거리가 좀 멀더라도 죄책감을 덜고 편하게 부를 수 있는 맹약으로 맺어진 네트워크를 만들거나.
지금의 내 일상은 비교적 평안하기에 고작(?) 화분을 먹이는 일 정도만이 나를 곤란하게 만든다. 하지만 머지않아 'urgent' 단계의 긴급하고 위중한 일들로 누군가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순간들이 늘어날 거라고 생각한다. 나라는 한 사람의 일상을 지탱하기 위한 방법을 준비하고 해결책을 찾는 과정은, 결혼하지 않는 '혼삶'뿐만이 아닌 모든 삶이 성숙해 가는 시기에 필요한 과정이 아닐까.
가족과 함께 산다고 해도 유사한 고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나 대신 화분에 물을 주거나 택배를 받아주는 등의 품앗이를 위한 존재가 아니기에. 가족을 노동력으로 환산해서 나의 필요를 손쉽게 해결할 수도 있겠으나(물론 가족끼리 돕고 사는 것 자체는 참 따뜻한 일이므로),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혼자가 될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은가. 혼자일 때 잘 지낼 수 있는 준비를 하지 않은 채 노년을 맞이한다면, 그때는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 자체에 아쉬워하기보다 내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에 대한 대책이 없어서 안절부절못하게 될까 봐 두렵다.
초창기 우리는 ‘같은 집에 살자’보다는 ‘함께 사는 삶’을 꿈꿨다.
그 시절 나는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역세권’보다
서로를 위로해줄 ‘사람권’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 <셋이서 집 짓고 삽니다만> (우엉, 부추, 돌김 지음) 중에서
요즘 내가 산책하는 밤길에 벚꽃이 어마어마하다. '벚꽃권'에 살고 있어서 참 감사하지만, 조금만 더 욕심을 부려보자면 꽃 보러 같이 밤 산책 갈 수 있는 친구가 있는 '사람권'이기도 하면 참 좋을 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