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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인 한유화 Apr 30. 2022

거절을 못하는 나, 유혹에 약하기 때문이다.

- 모든 제안은 유혹적이다.

 혼자 여행하다 보면 갑자기 은둔하고 싶어지는 순간들이 있다. 씹고 있던 음식을 얼른 삼키고 이 낯선 음식점에서 나가서 숙소에 돌아가 콕 박혀있고 싶은 그런 기분. 낯선 곳을 두리번 것도, 낯선 사람의 관심을 견디는 것도 그만하고 싶어지는 순간들.


일부러 혼자 생각할 시간을 갖기 위해 떠나온 경우가 아닌 이상, 현지 사람들 교류와 접촉을 최소화하고 은둔하는 여행이 달리 좋을 이유가 있겠는가. 이럴 때 버릇처럼 은둔하고 싶어지는 마음의 삐딱함을 혼쭐 내는 건, 고맙게도 '거절 못하는 내 성격'이다.


식사를 서둘러 끝마치고 집에 가고 싶었던 나의 마음은, '디저트도 하시겠어요?'라는 제안을 거절하지 못해 잊혀진다. 집으로 가는 길에 아늑해 보이는 근처 루프탑의 아늑하고 반짝이는 조명의 유혹을 거절하지 못한다. 맥주 한잔을 거절하지 못하고, "Shall we dance?"에 No 해 본 적도 없다. 노을 지는 하늘을 거절하지 못해서 언덕 위에서 시간을 보내고, 우버(Uber) 기사의 농담을 거절하지 못하고 친해져 버린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거절하지 못해서 계속된 하루를 후회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내가 처음에 원했던 은둔자의 니즈가 아주 손쉽게 잊힌다는 것이 가끔 마음에 걸린다. 어딘가에 얌전히 쌓여가고 있을 나의 또 다른 니즈(needs). 내가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들을 거절하지 못하는 대신, 내부에서 생겨난 작은 니즈간단히도 무시하고 있음에 찔리는 것이다.




"시원시원한 성격인 줄 알았는데 거절을 못한다고?"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하면 흔히 상대의 기분을 지나치게 배려해서든, 상대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든  직설적인 말을 못 하는 경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 나는 요구나 명령 같은 건 너무도 잘하는 편이고 거절만 유독 잘 못 한다. 


거절을 못하는 마음의 저변에는 일정량의 교만함도 깔려있다. 1) 누군가 나한테 악의를 품고 제안할 리가 없다는 느슨한 , 2) 거절하지 못해서 생긴 이후 상황에 대해서 뭐든 대처할 수 있을 거라는 느긋한 교만, 3) 누군가 "부탁"을 할 때조차 그것을 일종의 제안으로 여기는 습관. 거절 못하는 병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거절을 하는 일보다 내가 더 못하는 일이 있다. 그건 "거절당하는 일". 책임지기도 신경 쓰기도 싫어하는 나는, 누구에게는 권유, 추천, 제안, 그 어떤 것도 거의 하지 않는다(나아지고 있다!). 그렇기에 어쩌다 한번 내가 무언가를 부탁하거나 먼저 제안한다는 것은 의외로 큰 에너지를 소모한다. 이렇다 보니 내게 누군가 제안할 때도 거절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아마도 나는 거절 안에 포함된 그 상황을 또 하나의 유혹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심지어 대놓고 하는 유혹도 매우 기특하게 여기는 편이다. 이렇다 보니 사실은 어떤 제안이 진심으로 거절할 만큼 싫었던 적 자체가 매우 적다.


 계속 지금처럼 거절 안 하면 되지 않겠냐고? 절하지 못하는 사이에 내 의사결정의 주도권은 서서히 외부로 넘어간다. 거절하지 않는 걸 보면 외부로부터의 제안이 싫지는 않은 게 맞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나의 내부로부터의 제안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유혹을 마냥 반기는 동안, 내 안에 이미 내재되어 있던 1차적인 니즈는 다음 순서가 되어버리지 않을까.


나는 결혼을 거절한 것이 아니라, 비혼을 거절하지 못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혼자 하는 여행, 혼자 꾸미는 집, 혼자 내 멋대로 꾸리는 일상이 너무도 매혹적인 탓에 끌려가듯 삶의 방향을 계획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결혼이 나를 끊임없이 유혹하면 넘어갈 수도 있겠는데?' 싶어서 기분이 이상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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