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교라는 이름으로,
임신을 한 이후로, 임신 중에 그리고 출산 후에 하고 싶은 버킷리스트를 몇 가지 세웠었다.
먼저 임신 중에 할 버킷리스트들은 이런 것들.
하나는 수중 만삭.
웨딩사진으로 남편과 찍는 게 인생 버킷이었지만
물 공포증 있는 그를 물속에 강제로 집어넣을 수는
없었기에 '그럼 먼훗날 임신하게 되면 만삭 사진으로 꼭 찍어야지.' 마음 먹었었다.
다음으로 태교 diy 종합세트 하는 것.
흑백모빌
초점책
애착인형
우드 치발기
명화 그리기
정도로 생각했다.
워낙 어릴 때나 지금이나 손으로 만드는 걸 좋아하고, 왕년에 인형과 쿠션을 꽤 만들었던 터라 바느질 정도는 거뜬하다 생각했다. 그러던 중에 행복가족학교 '우리 아이 행복 프로젝트'라는 임신출산 부모교육 이벤트로 명화 kit를 받게 되었고, 명화 그리기에 가장 먼저 도전하게 되었다.
한 달에 두세 번은 함께 오르던 등산을 임신한 걸 알게 된 5월 이후로는 당분간 함께 오를 수 없게 되었다. 입덧이 한창 심했던 지난여름의 주말, 우린 따로 또 같이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남편은 등산을, 나는 카페에서 유화 그리기를 하면서. 같이 차를 타고 인월로 가서 산행 들머리에 남편을 내려주고, 그가 등산을 하는 동안 나는 근처 카페로 들어섰다.
시골 카페라 그런지 마을 어르신들이 많이 계셨다. 젊은 아가씨가 여기서 뭐하냐, 결혼했다고 하니 그럼 남편은 어디가고 혼자 있냐, 등산 하는 중이고 저는 임신해서 같이 못 갔다 하니 아이고 이뻐라는 등의 호기심 어린 관심을 잔뜩 받으며 그림 그리기를 이어갔다.
손끝에 쥔 붓에 온전히 집중하다 보니 툭하면 토하던 입덧도 잊을 수 있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렸다. 그러다 "나 이제 하산"이라는 남편의 연락을 받고
미완성의 그림을 정리하고서 오전에 갔던 오봉산 입구로 그를 데리러 다시 갔다.
조금만 더 하면 끝낼 수 있었는데 완성 못하고 나온 게 내심 아쉬워서 다시 만난 남편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빨리 내려왔어?"
"너 기다릴까 봐 가고 싶던 코스 더 안 타고 서둘러 왔지 (잘했지 칭찬해줘^^)" 해맑게 답하는 남편.
"그래 고오마워^^"
남은 그림은 집에 가서 마저 그리면 되지 뭐.
너 소질 있는데?
남편이 잘 그렸다고 칭찬 뿜뿜했다. 중학교 미술 선생님으로부터 예고 진학 제의받고, 미대 가고싶어했던 나야 나 :] 어쨌든, 생각보다 쉽고 빨리 끝난 유화에 감질맛이 났다. 다른 그림을 더 그려 보고 싶어 검색했더니 화가들의 명화 도안이 많았다. 그리고 이를 '피포 페인팅'이라고 하는 걸 알게 되었다.
*피포페인팅 (Pipo Painting)
; 유명한 명화나 캐릭터 도안 등을
채색하여 작품을 만들 수 있는 미술 DIY.
빈센트 반 고흐 작품 가운데 가장 애정하는 '아몬드나무'와 구스타브 클림트의 '엄마와 아기' 중에서 고민하다가, 아몬드나무는 원작 그대로의 색감이 구현되기 어려울 것 같아 엄마와 아기로 최종 픽! 주문하고 곧 배송받았다. 한참 집 한켠에 세워뒀다가 계절이 바뀌고 가을이 돼서야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 그리기가 손가락, 손끝 등 소근육을 사용함으로써 태아의 두뇌발달에 도움을 준다는 기사를 보았다. 또 이러한 활동을 하면서 느끼는 편안함이나 기쁨이 차밍이에게도 분명 전달될 거라 믿었다. 박스 속엔 약 30여 종의 유화 물감이 들어있었고 물감 넘버가 적힌 도안은 정말 빼곡하고 복잡 다난했다. 시작하자마자, 아 이놈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겠구나 싶던. 사람들의 후기를 찾아보니 짧게는 2주에서 길게는 몇 달도 걸렸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넘버를 칠하는 데만도 30분에서 한 시간은 족히 걸렸다. 워낙 작게 적힌 숫자에 눈도 빠질 것 같았고, 가장 가는 붓보다도 작은 칸에 칠을 하려니 자꾸만 테두리를 넘어간다. 나름 완벽주의인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는구나. 왜 하필 색채의 화가인 클림트 작품을 선택했을까^^ 이러다 출산할 때까지 못 끝내는 거 아닌가 싶은 불안감도 엄습했다.
그래도 하면 할수록 유화의 몇가지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우선 테두리를 엄격하게 지킬 필요 없다는 것. 좀 튀어나가도, 선을 넘어가도 멀리서 보면 그다지 표가 안 난다. 또 틀려도 된다는 것. 다시 칠하거나 다른 색을 덮어도 티가 안 나기 때문에 몇 번이고 마음껏 수정이 가능하다. 그리고 붓 자국 걱정이 없다는 것. 아니 오히려 붓 자국이 두텁게 나는 게 더 입체감이 도드라져 매력 있다. 처음엔 수채화 그리듯 얇게 명확하게 칠하다가, 색감이 안 살고 생각보다 입체감이 없어서 당황했다. 나중에 요령을 알곤 덕지덕지 처발처발(?) 발라댔다. 그랬더니 그림이 훨씬 생기 있어지는 게 아닌가.
짧게는 하루 두 시간, 길게는 네다섯 시간을 빠져서 그리다 보니 점점 끝이 보였고. 처음의 목표였던 출산 전 3개월 내 완성에서 2주 안에 그리기로 바뀌었고, 그러다 '이번 주 안에 끝내자!'로 최종 변경 땅땅.
6일 차 되던 날, 마지막 색상과 코팅제 바르기만 남아 하루면 끝나는데 그날은 한달만의 산부인과 정기검진과 더불어 남편과 여러 볼일이 있던 날이었다. 그래서 잠시 접어두고 토요일을 보냈다. 그리고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었고, 마침내 시작한지 열흘이 채 안돼서 완성했다. 포기 안 하고 끝까지 그려낸 나 자신 칭찬해.
지난 주말, 미완성된 그림을 함양으로 가져가기엔 짐스러워서 대구에 두었다. 대신 새로운 diy를 시작해보고자 함양에 가기 전 남편과 재료상에 들러 펠트와 낚싯줄을 샀다. 바로 흑백모빌을 만들려는 것.
신생아를 위한 육아용품 중이 빠지지 않는 것이 흑백 모빌이다. 신생아들은 태어나 약 2-3개월 간은 색을 인지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생후 100일 이전에는 흑백 모빌, 100일 이후에는 컬러 모빌을 보여줌으로써 신생아 시각은 물론 두뇌 발달에도 도움이 된다고.
모빌을 찾아보다 보니 어? 무척 단순한데? 게다가 펠트네? 이미 펠트로 티코스터도, 인형도 만들어본 적이 있는터라 굳이 몇만 원을 들여 사기보다 내가 직접 만들어 차밍이를 위한 선물을 하기로 결심했다. 구상을 하고 도안을 그려놓고서 또 한참 방치해두었는데, 막 유화 그리기를 통해 손이 근질근질해진 터라 미루던 재료를 사서 주말 맞아 함양으로 갔다.
그날은 또 남편과 따로 또 같이의 주말. 절친한 친구가 부산에서 와서 두 사람은 황매산 산행을 가고 그 사이 나는 모빌 만들기를 시작했다. 흰색, 회색, 검은색 세 가지 색의 펠트를 이용해 만들 모빌. 우선 노트에 미리 그려둔 도안을 따라 옮겨 펠트를 오렸다. 해, 달, 꽃, 산, 구름, 벌 총 여섯 가지.
그리고 바느질을 시작하려는데... 앗!?? 솜이 없다. 모빌 인형들 안에 들어갈 구름솜을 안사다니ㅜㅜ 이대로 중단인가. 아니 그럴 순 없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 되지 않는가. 그래서 일단은 솜 넣을 구멍만 남기고서 버튼홀스티치 방식으로 해나갔다. 간단한 꽃부터 시작해서 구름, 산, 달... 표정과 포인트를 넣으려니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거의 대여섯 시간을 집중해서 바느질해나가다 보니 어느덧 남편이 돌아온단다. 혼자 있을 내가 걱정돼서 빨리 왔다고. 좀 더 있다 와도 됐는데...?
아직 방울솜을 넣어야하고, 모빌거치대와 인형들을 낚싯줄에 연결시키는 작업이 남았다. 미루다 보면 또 한없이 미룰 것 같아서 이건 이번 주 평일까지 끝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분명 태교를 위한 diy인데 하다 보면 스트레스 받을 때도 있다. 예컨대 유화 그리기 할 때는 눈이 아프고 목이 결린다. 모빌 만들 때는 가끔가다 실이 엉키고 꼬일 때, 인형에 표정 새기는데 썩소 표정이라도 되면(...) 내 안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그냥 때려치우고 싶기도 한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손으로 하는 일'에 몰두하는 순간들, 하나하나 완성해나가는 성취감이 있기에 뜻깊다. 후기입덧이 다시 시작된 요즘이라 쉽진 않지만 남은 임신 과정 지치지 말고 계속해나가야지. 다음은 차밍이 애착 인형 만들기 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