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산부가 가을을 나는 법.
Always look on the bright side of life
'언제나 삶의 밝은 면을 보세요'
-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ost
배불뚝이 임산부의 일탈 시즌
임신하고 가장 많이 듣는 말,
"지금이 제일 좋을 때니 무조건 즐겨요"
"많이 놀러 다녀요 최대한 많이."
임신출산을 겪어본 엄마들이 하는, 경험자들의
조언이다.
임신 초기부터 컨디션의 노예가 되어
입덧으로, 빈혈로, 두통으로, 쓰러짐으로, 소화불량으로, 불면증으로, 게다가 이제는 점점 무거워지는 몸까지 보태져 힘든 상황인데 왜들 좋을 때라고 하는지. 처음엔 도무지 이해가 안가고 쉽게 하는 그말이 야속하게도 느껴졌다.
근데 생각해보면 지금은 아무리 힘들어도 아기가 통제 가능한 몸 안에 있는 상태 아닌가.
아기가 태어나고 나면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고,
기어 다니거나 걸어 다니기 시작하면 그때부턴
쉼 없이 쫓아다녀야 한다. 잠도 임산부 때는 많이 깨봐야 새벽에 서너 번이라면 신생아 시절엔 모유 주느라, 또 아기가 울거나 보채기라도 하면 꼬박 밤을 지새우는 일도 허다하다고. 지금은 여행을 가더라도 짐 없이 갈 수 있지만 아기가 있으면 기저귀부터 젖병, 물티슈, 장난감... 등 게다가 이유식을 먹기 시작하면 더더욱 한 짐 가득 일거다. 그러니 그런 말들을 할 수밖에 없는.
최근에 정기검진 받으러 가서 담당 원장님께
"저 꼭 자연분만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해요?"
하니 "걸으세요, 많이." 하셨다. 분명 그러셨다. 물론 예전처럼 하혈할 정도로 무리하면 안 되겠지만^^ 지난 일요일엔 함양으로 이사 온 남편과 대구에서 버스 타고 간 내가 터미널에서 접선 해 근교 드라이브를 했다.
"하늘에 닿는 길 데려가 줄게."
하길래 무슨 말인가 했더니 정말 그런 길이 있었다.
함양에서 가까운 남원에, 그것도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으로.
가을이 한창이긴 한창인가 보다. 그리고 유명한 길인가 보다. 차들이 많았다. 그러다 많이 주정차해있는 곳이 있길래 우리도 슬쩍 합류해봤다. 고기댐이라는 특이한 이름의 저수지. 별 기대를 안 하고 다가갔는데 온통 가을빛이 내려 앉은, 물에 반영된 산과 하늘이 무척 아름다웠다.
다음 우리가 향한 곳은 백두대간 정령치.
해발 1,172m에 위치한 그곳에 가는 길이 바로
'하늘에 닿는 길'이었다. 한참 차들에 밀려 엉금엉금 기어 도착했다. 주차할 자리도 없겠다 생각했는데 때마침 발견한 반가운 핑크색 존, '임산부 자리'를 발견해 수월하게 주차한 뒤 정령치 비석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신혼여행에서 고성의 백두대간 진부령에 간 적이 있는데, 뒤늦게 블랙야크 인증지라는 것을 알고 아쉬웠던 터라 이번 정령치는 꼭 인증해야지 싶었다. 근데 인증지가 아니란 거 알고 괜히 섭섭(...)
정령치는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과 산내면 경계에 위치한 해발 1,172m 고개로서 북으로 덕유산, 남으로 지리산을 연결하는 백두대간 마루금 생태축이나 1988년 도로 개설로 단절되었다. 최근 끊어진 정령치 고개를 옛모습에 가깝게 복원하여 백두대간이 갖는 상징성과 역사적 의미를 회복하고 생태계 건강성을 증진한다.
등산하는 대리만족을 느끼며 정령치에서 시간을 보내고서 남원에서 함양으로 돌아가는 길, 지리산 뱀사골을 지나는데 확실히 지대가 높아서 그런지 산에 단풍도 짙게 들고, 가로수가 온통 빨강 노랑 주황 천지였다.
가을길을 지나가며 요즘 많이 이슈가 되고 있는 '설거지론', '퐁퐁남' 이야기가 나왔다. 기사로 얼핏 접해서 정확한 뜻은 몰랐는데 남편이 설명해줬다.
* '설거지론' 이란? 연애경험이 없거나 적은 사람이 아무것도 모른 채, 젊은 시절 성적으로 문란하게 놀았던 상대방과 결혼해서 같이 사는 것을 마치 음식은 남이 먹고 자신은 그저 다 먹고 더러워진 그릇을 설거지만 한다는 것에 비유하며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설거지당한 결혼을 한 남자를 비하하는 단어가 바로 '퐁퐁남'이다. 퐁퐁을 묻혀 설거지하는 걸 비유한다고.
그러면서 페미니즘 이야기로 이어졌다. 우리나라의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변질되고 왜곡된 성향이 있는 것 같다고, 남자와 여자의 동일한 권리를 주장하려면 해야 할 의무나 역할도 비슷하게 나뉘어야 되는 게 아니냐는 내 의견을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일전에 여자가 많은 회사를 다닐 당시에 조금이라도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나 약간의 무거운 물건을 다루는 일을 하게 될 때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나에게 여직원들은 고개를 저으며, "이런 건 남자 직원들 하면 돼요. 우린 가만히 있어." 번번이 나를 붙잡았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말 신체적인 조건이 되지 않아 못하는 일도 아니고, 충분히 들 수 있는 무게인데 대체 왜? 집에서도 아빠가 있고 오빠도 있어서 정말 필요로 할땐 도움을 요청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한다. 적어도 "여자라서 못해." 라는 말은 살면서 해본 적 없는 것 같다.
지역적인 영향도 무시할 순 없는 것 같다. 서울에서도 여초회사를 다닌 적이 있었다. 그때 사무실에 20리터 생수통을 갈아 끼운다거나, 아트상품이나 홍보물이 담긴 상자를 나를 때 단 한 번도 '여자니까' 안 한다거나 열외 되는 일은 없었다. 그게 당연하다 생각했다. 한 기사에서 지역에 따른 기혼 여성들의 일하는 변화 추이를 본 적이 있는데, 결혼 후 일을 그만두고 전업을 하는 여성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전국에서 대구가 1위였다. 또 워킹맘들이 가사일을 전담하는 비율을 봤을 때도 다른 지역보다 대구가 월등히 높았다. 보수적인 경상도와 대구에서는 여자는 가정을 돌보고 육아를 하는 사람, 반대로 남자는 돈을 벌어오고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짙은 거구나 생각했다.
남편은 한때 페미니스트인 여자친구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여자들이 항상 약자이고 희생한다며 억울해하면서도 더치페이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주의였다고 한다. 심지어 그 당시 그녀가 직장인, 남편은 취준생이었음에도 남자니까, 오빠니까 돈을 더 많이 쓰는 걸 당연시했다고. 같은 여자지만 그 얘기를 들으며 얼마나 분노했는지. 남편은 나라는 사람을 만나 결혼해서 참 다행이라며 맞잡은 손을 더 꽉 쥐었다. "그치? 결혼 참 잘했지?"라고 웃었다.
한창 이야기를 하며 함양으로 돌아간 우리, 집으로 향하다가 "금대암 가볼까?"라는 그의 제안의 나름 우리의 아지트로 올랐다. 금대암은 금대산(851.5m) 봉우리 옆 해발 847m에 자리 잡고 있는 산사인데, 아스팔트 도로를 벗어나 좁다랗고 고불고불한 산길을 2.5km 가량 올라가야 만날 수 있다. 불과 한 달만에 또 가는 건데 별거 있겠나 싶었지만 막상 올라가 보니 어느새 금대암도 가을 옷으로 갈아입었다. '천왕봉 제일 전망대'라고 불리는 만큼 지리산 능선이 한눈에 바라보이고, 또 40미터가 넘는 600년 전나무가 자리하고 있어 남편도 나도 참 좋아하는 스팟이다.
한 달 사이 우리 우주만큼이나 훌쩍 자란
흰둥이와 누렁이 두 강아지도 만나고,
법복을 입고 바위 위 명상을 하고 계신 분들을 보고,
우리도 자리 잡고 앉아 금빛 지리산을 한참 바라보다 내려왔다.
한달 전에 왔을 땐
"내년 1월에 꼭 함양으로 발령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이루어졌다. 이번엔
"차밍이 건강하게 태어나게 해주세요."라고 빌었다.
계획엔 없었지만 그와 함께 한 가을날의 드라이브는 눈이 부시게 행복했다.
요가 첫 입문기
이제 차밍이가 태어날 날이 60여 일 남았다.
출산에 대한 걱정과 기대가 동시에 뒤엉킨 와중에
엄마의 권유로 임산부 요가를 하기로 했다.
원래는 전문 요가원에 등록하려 했는데,
마침 내가 다니고 있는 병원에서 맘스쿨이라는 이름으로 한 달 요가 과정을 모집한다고 문자가 왔다.
비록 주 1회지만 임산부요가도 하고
모유 수유 교육, 아기 목욕 교육, 그리고 부부 마사지 수업까지 커리큘럼이 다양하게 짜여 있어 꽤 알차 보였다. 바로 신청을 했고 일주일쯤 지나서 당첨되었다는 문자를 받았다.
그리고 고대하던 첫 개강날, 오랜만에 운동용 레깅스에 엉덩이까지 덮는 티를 입고 롱 패딩점퍼를 걸치고서 병원으로 향했다.
2층 세미나실에 들어서자 익숙한 간호부장님이 맞이해주셨고, 임산부들은 생각보다 적은 인원이 모였다. 6명이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는데, 20주를 갓 넘긴 산모부터 다음 달 출산 예정인 만삭의 산모까지 다양했다. 그중 30주인 나는 딱 중간. 각자 아기 태명도 이야기했다. 한방에 생겼다고 한방이, 제주여행에서 임신했다고 감귤이, 찰떡같이 내년 호랑이해까지 붙어있으라고 호떡이 등 귀여운 의미의 태명들이 많았다. 우리 차밍이는 신혼집 이름에서 따왔다고, 또 매력적인(charming) 사람으로 크라는 뜻이라고 하니 신기해했다. 그렇게 OT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요가수업이 시작되었다.
아무래도 임산부를 위한 수업이다 보니 힘 들어가는 자세나 근력을 많이 필요로 하는 동작 보단 주로 호흡하는 방법, 몸의 이완과 자궁 열림을 위한 운동법 위주였다. 발레나 클라이밍처럼 근력을 쓰는 운동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조금 심심한 느낌도 들었지만 아기랑 교감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눈을 감고 내 안에 집중하다 보니 한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다. 특히 수업 끝자락 몸의 여러 기관에 감사하며 명상하는 시간이 기억에 남는다. '자궁아 고마워. 열 달 동안 내 아기를 품어줘서.' 라는 인사를 건네는 일이 살면서 또 언제 있겠나.
그렇게 첫날 요가 수업이 끝나고, 다음주를 기약하며 돌아왔다. 배운 복식호흡과 이완하는 스트레칭들 틈틈이 하며 다가오는 1월 꼭 자연분만해야지.
이너-피스(Inner pe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