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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원 Dec 15. 2021

일을 쉬려고 하니 일이 재밌어지기 시작한다.

애증의 작업실이 나갔다.




"나는 언젠가 앞산에서 살 거야."


앞산은 대구에 있는 산이자 동네명.


이십 대 초반 친구들과 자주 앞산이라는 동네에서 놀고, 혼자서도 카페 투어 하러 와서 자주 되뇌던 말이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공간에 대한 꿈이 있었다. 오죽했으면 내가 처음 작업실을 오픈한다고 했을 때 20년 지기 친구들 왈,

"너는 어떤 형태로든 작업실을 열 줄 알았다. 그게 미술 관련되거나 소품샵일 줄 알았지 음식을 만드는 곳일 줄은 몰랐지만."



자전거나 수레를 이용한 보부상을 꿈꾸기도 했다.


그 두 가지 꿈은 5년 전 본가 그러니까 친정집이 앞산으로 이사 오면서 하나를 이루었고, 그로부터 일 년 후 이 동네에 작업실을 오픈하면서 둘 다 이루었다.

앞사너(앞산에 사는 사람)가 되면서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작업실을 차렸고, 영화제도 열어봤고, 계절마다 바르고 건강한 먹거리 장터를 기획해 10회 안되게 주최했으니. 또 기업인상도 수상하고, 신문기사에 몇 번 실리고 TV 방송 출연도 4번 했다. 내 손으로 반 셀프 인테리어를 하면서 일군 25평의 작업실에서 일어난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쉐프님과 콜라보했던 빵x잼 조우
한 여름 밤의 영화제
Bon appetit!
중소벤처기업인상 받았던 날.



환경을 생각하는 . 사람들을 모으는 .

좋아서 시키지 않아도 해왔다. 그러다 주변의 관심과 기대를 받으며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커져갔고.

제로웨이스트 샵이라는 무게감, 상인들을 이끈다는 앞장다르크로서의 책임감 등으로 번아웃이 찾아왔다. '서두르지 말되 멈추지 말자.'라는 좌우명처럼 멈추지는 않았다. 그러나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뱃속에 생명이 찾아왔고, 입덧과 쓰러짐 하혈 등의 이벤트로 잠시 멈춰야 할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제로웨이스트샵이라는 이름으로, 지구에 덜 해롭게 해온 일.


마지막 주문을 받았다. 당분간은 출산휴가에 들어간다는 공지를 하고서. 그리고는 곧 작업실을 내놓았다. 남은 한 달간 새로운 세입자를 쉽게 못 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서 안되면 부동산업체를 통해서 구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웬걸, 공고를 올리고 채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희망하는 분이 나타났다. 새벽의 간절한 연락, 그리고 아침이 오자말자 작업실 앞에 나타난. 마주한 순간 직감했다. 이 분에게 바톤터치를 해야겠구나.


am 3:56의 문자.


원래 30년 간 식당으로 운영되었던 이곳. 쥐똥으로 가득 차 있던 천장을 뚫고, 신발을 벗고 올라가야 하는 옛날식 높은 마룻바닥을 부수니 층층이 타일이 나와 또 부수고, 수도 공사도 전기 공사도 새로. 생각보다 규모가 크고 돈이 많이 드는 과정에 마음고생이 심했다. 워낙 기초 공사하는데 자금이 많이 들어 내가 원하던 꿈 꾸던 인테리어를 완벽히 하지 못했다. 오픈식이라고 해놓고 잠수 타고 도망가고 싶단 생각도 얼마나 많이 했던지. 그럼에도 직접 내 손으로 한 곳곳의 취향과 흔적들에 더 정감을 느끼고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았다. 수업도 진행했었고 촬영 등의 대관 문의도 있었다. 이곳에서 처음 7팀과 함께 먹거리 장터 1회도 주최했었다.


늘 참가상인들의 명찰을 만들었었다.


그랬던 정들고 추억 많은 이 작업실과 함께 할 날이 시한부이다.

2주간 마지막 주문서를 받고,

한 주 동안 마지막 방문 고객들을 맞이하고,

오늘 드디어 마지막 택배 배송을 마쳤다.

손님들 얼굴을 마주하는데 괜히 아쉽고

포장을 마치는데 손이 드렁드렁한다.

더 친절하게 맞이할 수 있는데,

더 예쁘게 포장할 수 있는데,

더 맛있고 정성스럽게 잼 만들 수 있는데...

미련이 사람을 청승맞게 만든다고 괜히 모든 게 다 아쉽고 눈에 밟힌다.


괜히 공간도 눈에 밟히고


'떠날 때를 아는 자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명심하자. 나는 출산이 코앞인 만삭의 임산부가 아닌가:')  출산 직전까지 열심히 일했던 동종업하는 친한 동생을 보고 나도 저렇게 할걸 그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극심했던 입덧 시기 3개월은 몸이 안 따라줬지만, 그 후 무리해서라도 일을 더 열심히 할 걸 그랬다 싶었는데 그 친구가 그랬다. "언니 저 그렇게 일하다가 조산기로 한 달 병원에 입원했었잖아요. 그리고 생각했어요. 조금 일 놓을 걸, 뱃속에 생명 생각해서 좋아하는 것들 맘껏 하고 편하게 쉴걸."


하긴 맞다. 그동안 일을 할 수 있는 에너지가 100이라면 120~150을 해오던 나였다. 그러다 번아웃이 왔지 않은가. 아마 임산부가 겪을 수 있는 증상 웬만큼 모두 겪은 나(입덧 4종 , 소양증, 세 번의 쓰러짐, 하혈, 기형아 검사 문제 등)였기에 만약 일까지 무리해서 했다면 정말 큰일 났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일을 쉬엄쉬엄 했기에 어쩌면 출산 후 100일 이내라는 빠른 복귀를 계획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다음 주면 출산예정일 3주 전,

2022년 1월생을 만들어주기 위해 12월-1월 예정 산모들이 한다는 눕눕...까진 내 성격상 근질거려 못하겠지만 더 이상 장거리 자제하고 일도 벌이지 말아야지. 잘 갈무리하고 대구-함양으로의 작업실 이사도 해내야지.



앞산, 안녕!



당신, 참 애썼다.
사느라, 살아내느라, 여기까지 오느라.
부디 당신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 아직 오지 않았기를 두손 모아 빈다.

<어쩌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 정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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