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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원 Jan 04. 2020

하나의 버킷리스트를 이뤘다.

눈 소복히 쌓인 나리분지에서, 울릉도 여행기 4/3탄



2019.12.30.-2020.1.2.
울릉도 구상여행이라 쓰고
셀프 웨딩촬영이라 읽는 여행







그래, 나리분지로 가자


일정대로라면 원래 어제 본토로 돌아갔어야 하지만,

배가 결항되면서 어쩌다 덤으로 하루를 더 얻게 되었다.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우리네 삶의 매력 아니던가. 오늘 늦잠을 잘 수 도 있었지만 여행을 오면 1. 늦잠 못 자는 병  2. 몸을 안 움직이면 큰일 나는 병 이 있는 우리기에, 또다시 계획을 짰다. 바로 '나리분지행'. 풍광이 어마어마하다는 깃대봉을 오르고 싶었지만 오후 3시 배를 타기에 촉박할 수도 있기에 나리분지로 가기로 한 결정은 결과적으로 백번 천 번 만 번 잘한 일!


6시. 이틀 연속 새벽 기상에 몸이 힘들었다. 그렇지만 나리분지를 생각하며 두 번째 알람만에 벌떡 일어난 우리. 따뜻하게 옷을 껴입어 채비를 하고 어제저녁 남긴 김밥 두 줄과 우유, 귤 몇 개를 챙겨 길을 나섰다. 7시. 아직은 동이 터오르기 전, 천부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사람 없는 버스 안에서 김밥과 우유를 야무지게 먹고 한 시간 여를 달려 8시, 천부에 도착.


사모님이 싸주신 김밥. 저녁으로도 아침으로도 아주 맛있게.


우리가 사랑한 추산. 송곳바위.


간판이 너무나 귀염뽀짝해서.



그런데 이상하다. 8시에 와야 할 나리분지로 가는 버스가 오지 않았다. 우리가 탔던 버스기사님이 아직 정차 중이시라 여쭈어보니 아마도 아침엔 길이 얼어 위험해서 나리분지엔 못 갈 거라고. 이런ㅠㅠ 돌아가야 하나 어쩌나 고민하는데

"우리 그냥 걸어갈래?"
"그래 그러자!"

콩맨이 툭 던진 말에 나는 덥석 물어버렸다.

험난한 여정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눈이 쌓였고, 오르막 산길에, 멧돼지와 꿩 발자국이 선명한 길을 따라 한 시간 조금 넘게 갔다. 몇 번은 미끄러지기도 했고. 도중에 만난 버스가 빙판에 미끄러져 오도 가도 못하는 모습도 보였다. 막바지에 이르러선 콩맨이 물었다.

"포기하고 내려갈래?"
"무슨 소리! 끝까지 간다."


약 3킬로 정도의 산길을 따라 쉼 없이 걷다 보니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나리분지. 아, 벅차오르던 순간. 한국지리 교과서에서나 보던, 바로 그 눈이 소복이 쌓인 나리분지의 모습이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버킷리스트를 이루다


그곳에서 우리는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을 정신없이 뛰어다녔고, 꼭 해보고 싶었던 영화 러브스토리의 한 장면처럼 눈 위에 누워 두팔 벌리기도 했고, 마치 다른 세상 속에 우리 둘 뿐인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이 1도 없잖아. 가끔 지나가는 거라곤 군인차, kt 차뿐.. 유일하게 만난 한 사람은 휴가 나가는 나리분지 안의 부대 군인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이 군인을 나중에 포항 가는 배 안에서도 또 만났다. 이러다 대구까지 같이 가는 거 아니냐며 웃었다.


어쨌든, 나리분지에서 오래도록 머물고 싶었다. 여기 왔으니 산채비빔밥도 먹고 싶었다. 그러나 돌아가야 할 길은 멀고, 우리는 오늘 육지로 나가야 한다.

그래서 내려가기로. 여전히 오지 않는 버스에 우린 또다시 3킬로가 넘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런 길을 오르내린 우리. 정말 대단해.


올라갈 땐 까먹고, 내려갈 때의 기록.


정말 2만보가 넘었다.



10시 50분. 다 내려와서 천부에 도착한 우리. 버스 시간 타이밍도 잘 맞아서 곧바로 사동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사동에 도착해 곧 점심 드시러 나갈 소장님과 직원분들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들렀다. 그런데 같이 가자하신다? 오늘 오전 배로 먼저 나가신 줄 알았던 사모님이 안 가셨고, 우리랑 같은 배로 가실 거라고. 그래서 덕분에 택시를 부르지 않고 편하게 도동항으로 소장님 차를 타고 가게 되었다. (비록 짐을 10분 컷으로 후다다닥 싸야 했지만. 나 왈, "군대 5분대기조가 이런 거 아냐?"ㅋㅋㅋㅋㅋㅋ) 자연스레 점심도 함께. 우리가 점심으로 먹어야지 생각했던 따개비칼국수와 따개비죽을 사주셨다. 정말 맛있어서 후루룩 :-)




3박4일동안 정 들었던 남부지방산림청 울릉국유림사업소.


태양식당의 따개비죽과 따개비칼국수.






울릉도 여행의 묘미는 뭐니뭐니해도 해안산책로


점심을 먹고 나와 약국에서 멀미약을 사고 마침 문이 열린, 해안산책로를 거닐었다. 7년 전 울릉도에서 했던 것 중 좋았던 걸 순서에 상관없이 꼽자면 1.독도 접안은 못했어도 360도 한 바퀴 본 것 2. 저동항에서 오징어잡이 배들 불빛을 보면서 밤마다 산책한 것 3. 저동-도동 해안산책로를 왕복했던 것 인데 이번에 눈으로 해안산책로가 통제되어 못해보나 싶었다. 그런데 마지막 날 일부 구간이지만 열려있었던 것. 그래서 우리는 울릉도 여행의 묘미 해안산책로 산책으로 이번 여행을 마무리했다.




해안산책로로 나가는 문







돌아가자, 본토로!


가족들 주고, 부산 이모네와 서울 외삼촌네 보낼 명이나물을 한 통씩 샀다. 그리고 사모님과 할머니 드릴 커피 하나씩도 사서 여객선터미널로 왔다. 티켓을 사고 발권 수속을 거친 후 썬플라워호에 탑승. 아주 강력한 멀미약을 먹었음이 무색하게 돌아가는 길은 잔잔한 풍랑 덕에 멀미는 전혀 하지 않았다.



집으로 가는 길.
동남쪽 뱃길 따라 200리, 울릉도로부터




그리고 마침내 본토(포항)에 도착. 돌아오자마자 우릴 맞는 건 울릉도와는 비교도 안 되는 강추위와 매우 심한 미세먼지. 우리의 울릉도는 포근했고 미세먼지 하나 없는 청명한 공기 었다. 벌써부터 그리워지는 울릉도야 안녕, 이제 또 한 5~10년 후에 만나겠지. 그때는 자식 데리고 올지도 몰라 (웃음)


여행의 표면적인 목적이던 셀프 웨딩촬영은 성공적이었고, 2019년의 마지막 날에 영화처럼 첫눈을 맞이했고, 영화 속에나 있는 줄 알았던 로맨틱한 프러포즈를 받았고, 1월 1일 새해에 많은 사람으로부터 결혼 축하를 받았고,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눈 내린 나리분지' 속에 들어갔었다. 이번 구상여행은 더할 나위가 없었다. 무엇보다 감사한 건 울릉도에서의 인연. 나도 저렇게 나이 들어야지 싶은 사람들을 만났다. 앞으로도 종종 인생 같은 여행, 그리고 여행 같은 인생을 잘 헤쳐나가야지. 그와 함께.






우리 인생 화이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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