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소복히 쌓인 나리분지에서, 울릉도 여행기 4/3탄
2019.12.30.-2020.1.2.
울릉도 구상여행이라 쓰고
셀프 웨딩촬영이라 읽는 여행
그래, 나리분지로 가자
일정대로라면 원래 어제 본토로 돌아갔어야 하지만,
배가 결항되면서 어쩌다 덤으로 하루를 더 얻게 되었다.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우리네 삶의 매력 아니던가. 오늘 늦잠을 잘 수 도 있었지만 여행을 오면 1. 늦잠 못 자는 병 2. 몸을 안 움직이면 큰일 나는 병 이 있는 우리기에, 또다시 계획을 짰다. 바로 '나리분지행'. 풍광이 어마어마하다는 깃대봉을 오르고 싶었지만 오후 3시 배를 타기에 촉박할 수도 있기에 나리분지로 가기로 한 결정은 결과적으로 백번 천 번 만 번 잘한 일!
6시. 이틀 연속 새벽 기상에 몸이 힘들었다. 그렇지만 나리분지를 생각하며 두 번째 알람만에 벌떡 일어난 우리. 따뜻하게 옷을 껴입어 채비를 하고 어제저녁 남긴 김밥 두 줄과 우유, 귤 몇 개를 챙겨 길을 나섰다. 7시. 아직은 동이 터오르기 전, 천부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사람 없는 버스 안에서 김밥과 우유를 야무지게 먹고 한 시간 여를 달려 8시, 천부에 도착.
그런데 이상하다. 8시에 와야 할 나리분지로 가는 버스가 오지 않았다. 우리가 탔던 버스기사님이 아직 정차 중이시라 여쭈어보니 아마도 아침엔 길이 얼어 위험해서 나리분지엔 못 갈 거라고. 이런ㅠㅠ 돌아가야 하나 어쩌나 고민하는데
"우리 그냥 걸어갈래?"
"그래 그러자!"
콩맨이 툭 던진 말에 나는 덥석 물어버렸다.
험난한 여정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눈이 쌓였고, 오르막 산길에, 멧돼지와 꿩 발자국이 선명한 길을 따라 한 시간 조금 넘게 갔다. 몇 번은 미끄러지기도 했고. 도중에 만난 버스가 빙판에 미끄러져 오도 가도 못하는 모습도 보였다. 막바지에 이르러선 콩맨이 물었다.
"포기하고 내려갈래?"
"무슨 소리! 끝까지 간다."
약 3킬로 정도의 산길을 따라 쉼 없이 걷다 보니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나리분지. 아, 벅차오르던 순간. 한국지리 교과서에서나 보던, 바로 그 눈이 소복이 쌓인 나리분지의 모습이었다.
버킷리스트를 이루다
그곳에서 우리는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을 정신없이 뛰어다녔고, 꼭 해보고 싶었던 영화 러브스토리의 한 장면처럼 눈 위에 누워 두팔 벌리기도 했고, 마치 다른 세상 속에 우리 둘 뿐인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이 1도 없잖아. 가끔 지나가는 거라곤 군인차, kt 차뿐.. 유일하게 만난 한 사람은 휴가 나가는 나리분지 안의 부대 군인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이 군인을 나중에 포항 가는 배 안에서도 또 만났다. 이러다 대구까지 같이 가는 거 아니냐며 웃었다.
어쨌든, 나리분지에서 오래도록 머물고 싶었다. 여기 왔으니 산채비빔밥도 먹고 싶었다. 그러나 돌아가야 할 길은 멀고, 우리는 오늘 육지로 나가야 한다.
그래서 내려가기로. 여전히 오지 않는 버스에 우린 또다시 3킬로가 넘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10시 50분. 다 내려와서 천부에 도착한 우리. 버스 시간 타이밍도 잘 맞아서 곧바로 사동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사동에 도착해 곧 점심 드시러 나갈 소장님과 직원분들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들렀다. 그런데 같이 가자하신다? 오늘 오전 배로 먼저 나가신 줄 알았던 사모님이 안 가셨고, 우리랑 같은 배로 가실 거라고. 그래서 덕분에 택시를 부르지 않고 편하게 도동항으로 소장님 차를 타고 가게 되었다. (비록 짐을 10분 컷으로 후다다닥 싸야 했지만. 나 왈, "군대 5분대기조가 이런 거 아냐?"ㅋㅋㅋㅋㅋㅋ) 자연스레 점심도 함께. 우리가 점심으로 먹어야지 생각했던 따개비칼국수와 따개비죽을 사주셨다. 정말 맛있어서 후루룩 :-)
울릉도 여행의 묘미는 뭐니뭐니해도 해안산책로
점심을 먹고 나와 약국에서 멀미약을 사고 마침 문이 열린, 해안산책로를 거닐었다. 7년 전 울릉도에서 했던 것 중 좋았던 걸 순서에 상관없이 꼽자면 1.독도 접안은 못했어도 360도 한 바퀴 본 것 2. 저동항에서 오징어잡이 배들 불빛을 보면서 밤마다 산책한 것 3. 저동-도동 해안산책로를 왕복했던 것 인데 이번에 눈으로 해안산책로가 통제되어 못해보나 싶었다. 그런데 마지막 날 일부 구간이지만 열려있었던 것. 그래서 우리는 울릉도 여행의 묘미 해안산책로 산책으로 이번 여행을 마무리했다.
돌아가자, 본토로!
가족들 주고, 부산 이모네와 서울 외삼촌네 보낼 명이나물을 한 통씩 샀다. 그리고 사모님과 할머니 드릴 커피 하나씩도 사서 여객선터미널로 왔다. 티켓을 사고 발권 수속을 거친 후 썬플라워호에 탑승. 아주 강력한 멀미약을 먹었음이 무색하게 돌아가는 길은 잔잔한 풍랑 덕에 멀미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본토(포항)에 도착. 돌아오자마자 우릴 맞는 건 울릉도와는 비교도 안 되는 강추위와 매우 심한 미세먼지. 우리의 울릉도는 포근했고 미세먼지 하나 없는 청명한 공기 었다. 벌써부터 그리워지는 울릉도야 안녕, 이제 또 한 5~10년 후에 만나겠지. 그때는 자식 데리고 올지도 몰라 (웃음)
여행의 표면적인 목적이던 셀프 웨딩촬영은 성공적이었고, 2019년의 마지막 날에 영화처럼 첫눈을 맞이했고, 영화 속에나 있는 줄 알았던 로맨틱한 프러포즈를 받았고, 1월 1일 새해에 많은 사람으로부터 결혼 축하를 받았고,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눈 내린 나리분지' 속에 들어갔었다. 이번 구상여행은 더할 나위가 없었다. 무엇보다 감사한 건 울릉도에서의 인연. 나도 저렇게 나이 들어야지 싶은 사람들을 만났다. 앞으로도 종종 인생 같은 여행, 그리고 여행 같은 인생을 잘 헤쳐나가야지. 그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