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 my proposal day!
결혼에 생각이 없던 나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결혼을 한다면
이렇게 해야지 정해둔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스몰웨딩, 가족친구들과 파티처럼.
우리 두 사람의 힘으로 할 것.
스튜디오 사진 대신 프리다이빙 수중사진을.
신혼여행은 사막이나 빙하투어를.
그리고 상대에게 받고 싶은 프러포즈는
스카이다이빙하면서 사랑하다 외쳐주기를.
이 중에 몇 가지는 전혀 실현 불가능하게 되었다.
먼저 그는 물 공포증이 있어 수중 촬영을 절대 할 수가 없고. 우리나라는 스카이다이빙하기가 적합지 않아 결혼식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하늘에서 프러포즈받기는 글렀다!
나의 한 까다로움을 잘 아는 콩맨이
프러포즈를 고민하는 게 보여서 말했다.
"흔한 프러포즈라면 할 거라면 안 하는 게 나아"
그 후 문득, 디데이 어플을 열었는데
어, 우리의 기념일이 얼마 남지 않았네?
그는 알리가 없으니. 그래, 이날이다!
까짓거 내가 한 번 프러포즈 해보지 뭐.
그래서 시작한, 프러포즈는 내가 프로젝트.
수중 프러포즈를 하고 싶어 찾아보았지만 그가 있는 영덕엔 수심 깊은 프리다이빙장이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영화관을 대관해볼까, 하지만 역시나 영덕엔 영화관조차 없다. 고민하다가 생각난 '라디오 사연'. 라디오 사연을 녹음해서 들려주는 걸 하기로.
프러포즈데이는 2019년 12월 3일
우리의 2,000일 되는 날에.
우선 콩맨의 가장 절친한 친구에게 sos 청했다.
야근 잦은 그가 그날만큼은 반차라도 내게끔 해 달라는 것. 부산에 사는 친구가 영덕까지 간다고 (거짓말이지만) 하니 문제없이 반차를 냈고. 그때부터 3주간의 프러포즈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1,000자 남짓 우리 연애 스토리를 담아 라디오 사연으로 만들었다. 한 달은 더 있어야 나오는 웨딩밴드 대신 왕다이아몬드 팔찌를 직구했다. 프러포즈계의 스테디셀러 '나랑 결혼해줄래?' 머그잔도 제작했다. 그리고 남편으로 임명한다는 임명장도. 마지막으로 콩맨의 위시리스트 덴마크 브랜드 음향기기까지. 하나씩 준비를 마쳤다.
대망의 디데이
my proposal day!
am 9:20
아침 일찍 영덕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고
워낙 철두철미한 그인지라 혹시라도 눈치채는 일이 없게 친구가 부산에서 탈 버스 도착시간까지(1시 10분) 정하며 입을 맞춰 두었다.
pm 12:00
한시간 일찍 도착한 영덕. 미리 전화로 섭외해 둔 영해(영덕군 영해면)의 유일무이한 레스토랑, 슈가랜핑크로 가서 녹음한 라디오 사연과 머그잔을 부탁드렸다. "저희가 후식을 시키면 이 라디오 사연을 틀어주시고, 남자친구가 고른 음료를 꼭 이 잔에다 꼭 담아주세요."
신기하게도 사장님은 30년간 대구, 그것도 내가 사는 대명동에서 살다가 영덕으로 가신 분이었고. 또 주방장님은 우리가 결혼할 호텔의 전직 수석 조리사셨다. 신기한 인연 :*) 이제 모든 준비를 마치고 그를 만나러 터미널로 갔다.
pm 1:00
나 "뭐해?"
그 "규암이 올 시간 다돼서 터미널로 데리러 가.
너는? 점심은 먹었어?"
나 "아니 안 먹었어 배고파ㅠㅠ 같이 먹으면 안 돼?"
그 "너도 같이 먹자 (장난)"
나 "그래? 같이 먹을래 (진심)"
pm 1:10
두근두근- 멀리 숨어서 지켜봤다.
콩맨이 오는 게 보였고, 조금씩 다가가
"서프라이즈~!"
워낙 침착하고 포커페이스를 잘하는 그인데,
당황하고 놀라서 어쩔 줄 몰라하는 얼굴이다.
사귀면서 처음 보는 모습이니 일단 1차 성공.
그리고 자연스럽게(?) 파스타가 먹고 싶다며
찾아낸 곳이 있다고 레스토랑으로 데려갔다.
사장님과 직원분들은 작전대로 우릴 모르는 척,
카메라가 숨겨진 자리로 안내했다.
밥이 어디로 넘어가는지도 모르겠던 시간.
다 먹은 우리는 후식을 시켰고, 콩맨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나는 오렌지주스를 골랐다. 사장님은 긴장하셨는지 "이쪽이(남자친구) 아이스 아메리카노 맞아요?" 재차 확인하셨다. 드디어 주문한 음료가 나왔고, 라디오는 광고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두가지 문제가 있었다. 볼륨이 생각보다 작아 이대로라면 콩맨이 사연을 인지 못할거라는 것. 그리고 커피를 예상보다 너무나 빠르게 마시고 있는 것. 먹지 못하게 장난처럼 뺏어도 보았지만 아니나 다를까 라디오 본 사연이 흘러나오기도 전에 그는 '나랑 결혼해줄래?'를 먼저 보고 말았다. (망했다)
"뭔데? 이거 뭔데?"
아까의 터미널에서처럼 또 당황해하는 그. 망쳐버렸다 생각한 나는 고개 숙이고 발 동동 구르며 에라 모르겠다 하고 "라디오 나온다 들어봐봐" 해버렸다.
그렇게 사연은 끝이 났고, 일찌감치 머그잔도 들통나버렸고. 이제 남은 건 선물 증정 시간. 숨겨둔 쇼핑백 안에서 주섬주섬 꺼내 왕다이아몬드팔찌를 끼우고, 임명장을 읽어 주고, 꾹꾹 눌러쓴 편지를 전하고, 대망의 뱅앤올룹슨 선물까지 증정했다. 그런데 마냥 좋아할 줄 알았던 그의 표정이 뭔가 이상하다? 내가 막 이걸 준비했을 과정과 고생했을 시간이 안봐도 그려져서 울컥해서 눈물을 억지로 삼켰다고. 그렇다고 결코 우는 법은 없는 이 남자.
"왜 안 울어?"
"나 그런 쉬운 (눈물 많은) 남자 아니야."
"이미 내 앞에서 운 적 있잖아 뭐"
(5년 전 핀란드에서 헤어질 때 수화기 너머로 우는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게 유일하다.)
어쨌든, 마지막엔 사장님과 직원 두 분 주방장님의 박수와 축하를 받으며 "잘 살겠습니다". 를 끝으로
우여곡절의 프러포즈가 마무리되었다. 세상에 이런 여자 어딨느냐고 장난처럼 생색도 내보았는데, 그가 하는 말에 감동을 받았다.
"평생 오늘처럼
기억 남을 순간은 없었고
앞으로도 또 없을 거 같아.
진심으로 고마워"
이렇게 3주간의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아마도?) 끝났다. 그리고 이걸 준비하며 새삼 깨달았다. 나는 역시 무언갈 기획할 때 가슴이 뛰는 사람이구나. 그리고 받는 즐거움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주는 행복감이 더 크다는 것도. 그를 행복하게 해주려다 오히려 나 자신을 더 알게된 프러포즈. 그럼 이제는 결혼 준비에 박차를 가해 보자 D-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