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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원 Jan 25. 2020

친정에서 보내는 마지막 명절

(ft. 첫 조카 만남과 동시에 헤어짐이라니)



친정에서의 마지막 명절


남쉴나일(남들 쉴 때 나는 일하는) 사람인지라

연휴 시작이던 어제까지 일하다가,

드디어 쉬는 첫날. 구정이 밝았다.


명절 전날이면 항상 큰집에 가서 큰엄마들과 차례상 음식을 준비하고 기름 냄새 가득해서 돌아오던 엄마였는데, 몇 해 전 가장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부터는 각자 집에서 만들어와 당일에 큰집에 모인다


막내며느리인 엄만 늘 전과 수육 담당.

이번에도 그래서 전날 점심때 장을 봐와서

엄마는 오후에 차례상 음식 준비를 시작하셨다.

원래라면 나도 양팔 걷어붙이고 옆에서 전 굽는 거

같이 하곤 했는데 잼머일 시작하고부터는

"안 그래도 평소에 손에 물 묻히고, 칼질하고,

불 앞에 있는 애가. 하지 마~!" 라며

절대 하지 못하게 하는 엄마.

그 덕분에 딸은 오롯이 일에 집중하고,

일을 마친 후에는 온전한 쉼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25일 설날 당일이 밝았다.

엄마는 만들어둔 전과 수육을 차곡차곡 담고

네 식구가 같이 나갈 채비를 해서

경산 큰집으로 출발. 두 달 전에 태어난 사촌오빠의 아기를 처음 만나는 날이라 두근거렸다.

"아라 오늘 부산 가야 하니까 늦게까지 있으면 안 돼요. 술 많이 마시지 말고."라고 아빠에게 신신당부하는 엄마 말. 맞다 오늘은 친가 큰집으로 가기도 하지만 오후에는 남자 친구의 부산 본가에도 간다. 결혼 전 정식으로 인사드리러 가는 날. 몇 주전 콩맨은 이미 설 인사 겸 불가침 구역이던 우리집 현관문턱을 넘었고. 나는 명절대란 잼머일을 하다 이제야 가게 된 것.


도착한 큰집에는 배가 홀쭉해진 지원언니와, 언니만큼 큰 눈을 가진 70여 일 된 조카 규리가 우리를 맞이했다. 이 귀여운 생명체는 무엇이냐며ㅠㅠ 들어가자마자 손 씻고 안았다...(작고 소중해) 이야기의 화두는 언니의 출산, 규리의 탄생과 이어서 나의 결혼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큰아버지는 결혼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 워낙 사업을 오래, 많이 하셨던 분이라 잼머 일 시작하고서부턴 나를 특히 더 예뻐라 하신다. 그래서 남자친구가 나의 다른 친지들은 몰라도 큰아버지는 봬야 해서(엄마 피셜) 내일모레 콩맨이 대구 와서 큰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하기로 했다.


"아라씨는 이번 명절 지나면 앞으로 이 집에서는 못 보겠네요."라는 지원언니의 말에 괜히 익숙한 눈 앞의 모습들이 아쉬워지려고 한다. 아빠가 지방을 쓰시고, 우리가 음식과 제기를 나르고, 홍동백서
어동육서 조율이시에 맞게 배치를 하고, 돌아가면서 차례로 헌작을 한 후, 계반삽시...(다른건 용어를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철상을 하고서 이제야 둘러앉아 함께 음복을 하고 떡국을 나누어 먹었다. 아기가 있으니 분위기가 정말 다르긴 하구나. 다들 웃음이 더 많아지셨다. 오전 열한 시 반. 부산 가는 기차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았지만 명절마다의 2차 코스인 이모할머니 댁에도 들러야 돼서 서둘러 일어섰다. 다들 안녕히계세요ㅠㅠㅠㅠㅠㅠ소녀는 이만 가옵니다.




큰아버지와 손주. 규리가 입고 있는 건 고모가 맞춰주신 설빔.


큰집에서 먹는 마지막 떡국 (괜히 아쉬워)


귀염뽀짝한 생명ㅜㅜㅜㅜㅜㅠㅜ




이모할머니댁에 가니 엄마의 사촌인 철이아저씨네도 와 있었다. 늘 명절에 철이, 찬이 두 형제가 왔다가 간 흔적만 느꼈었는데 오늘은 일찍 온 보람이 있다. 좋아하는 철이아저씨의 와이프, 언니도 만나고

 :•) 최근에 아들 현수랑 보홀 가서 프리다이빙하고 왔다는 사진을 보여주고, 나는 울릉도로 셀프 웨딩촬영을 하고 온 사진을 보여드리고, 신혼여행은 어디 가냐는 물음에 "아이슬란드 가요." 했더니 아저씨랑 언니랑 동시에 눈이 휘둥그레- 하며 오로라 보는 거야? 좋겠다 하신다. "아라씨 데려가는 남자는 복 받았어." "둘이 정말 재밌게 살겠네." 이런 말씀들을 해주시다가 어느새 일어날 시간!


명절의 3차 코스는 늘 스타벅스 드라이브쓰루인데, 기차 타기까지 아직 2시간이나 남아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엄마가 사용하시던 파이크플레이스 텀블러 뚜껑을 잃어버리셔서(다시 찾긴 했지만) 텀블러 하나를 사드려야지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볼 때마다 내 스타일과 엄마가 좋아하실 스타일 중에 고민스러웠기에 마침 보고 직접 고르시라 했다. 혹시나 역시나 좀 더 밝고 귀여운 스타일의 것을. 커피와 차를 시키고 앉아 각개전투를(아빠는 책을 읽고 오빠야 돌아다니고 엄마와 나는 수다도 떨다가 셀카도 찍고) 벌였다.


예쁘게 잘 쓰세요 from.딸


드디어 기차 시간이 다되었고, 나는 이제 부산(이라 쓰고 예비 시댁이라 읽는 그곳)으로-! 동대구역에서 뉴스 기사를 보다가 우한 폐렴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영상_길거리에 사람들이 툭툭 쓰러지는 현지 영상, 우한의 간호사가 실제로 확진자가 9만 명이라고 실토하는 영상 등_보게 되었는데 너무 무서워서 괜히 주변에 중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만 보이면 긴장.. 춘절 맞아서 중국인들이 한국에 대거 들어왔고 들어올 거라 하니... 빌게이츠가 미래에 인류 멸망의 원인은 '전염병'일거라 예언했던 게 기억난다 무서워ㅠㅠ





예비시댁으로 인사



ktx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 구포역에서 마중 나온 콩맨을 만나 그의 본가로. 현관을 들어서자 호기심덩어리 보리가 가장 먼저 마중을 나왔고(그의 본가엔 고양이 네 마리가 산다.) 어머니께서 "아라 왔니" 하고 환대해주셨다. 이어서 잘생긴 귀리, 나르시시즘에 빠진 토리, 다음으로 하루 18시간은 자는 체리가 의자에서 자다 일어나 맞이했다.


앉아서 이런저런 근황 이야기, 우리의 신혼집 구한 이야기, 요즘 드럼을 배우시는 어머니의 열정, 결혼식 때 3중창 축가로 한다는 이야기, 결혼하면 명절은 당일에만 잠깐 왔다가란 말씀 등등 이어나가다가 오신 아버지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코다리조림을 먹으러 김해까지 갔다. 가는 차 안에서 어머니와 나는 돌아가며 하품을 했고, 아버지는 과묵하셨다. 아버지는 상견례 이후 두 번째 뵙는 건데, 워낙에 말이 많은 아빠를 가진 딸로서 과묵한 아버지를 만나니 멋있다는 생각뿐... 가만 보면 콩맨은 과묵한 아버지와 말씀 잘하시는 어머니를 반반 닮았는 것 같다. 과묵하지만은 않은 츤데레 내 남자친구^^


시래기 코다리조림에 사리로 고구마순을 추가해서 부산 술 C1과 함께 먹었다. 돌고래가 그려진 대선 소주잔은 탐이 났고(my favorite animal = 돌고래) 몇 년 만에 마시는 건지 모르는 시원소주는 기억과 달리 엄청 쓰고 독했다. 그리고 딸이 있었으면 했다는 아버지께선 딸 대신 곧 집안에 들어올 며느리에게 소주를 몇 잔 따라주셨다. 또 그걸 잘도 받아마시는 나. 술 좋아하는 아빠 피 물려받은 건 어쩔 수 없다^^


다들 맛있게 먹었고, 보이차와 숭늉으로 후식까지 마신 후 일어나 구포역으로 향했다. "조심히 가고 또 보자" "네 두 분 제주도 잘 다녀오세요~" 인사드리고 콩맨과 같이 내린 역 앞. 이대로 배 부른걸 가만히 둘 수 없는 우리는 산책을 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배는 부를지언정 식후땡(아이스크림)은 먹어줘야 하니 하나로 같이 나누어먹었다. 오래전 구포역 플랫폼 앞에서 늘 나누던 애틋한 인사를 하려다가, "우리 내일만 지나면 또 보는데?" 말에 쏙 들어갔다. 그렇게 기차는 도착했고, 우린 쿨하게 하이파이브 손깍지 잡기를 마지막 인사로 헤어졌다.


이번 설날은 아주 특별하고 조금 이상했다.

친정에서 보내는 마지막 명절이자, 시댁에서 보내게 될 첫 번째 명절 그 사이를 자연스럽게 바톤터치하는 그런 느낌이 들었던. 또 새로운 가족이 생긴다는 사실에 어쩐지 모르게 뭉클하기도 했다. 앞으로 친정에서의 내 빈자리는 종조카 규리가 채워주겠지.





부산에 가져간 홍삼과 한과 보따리


퀸즈베리맛 홍차와 과일, 그리고 토리가 함께 한 티타임


아버지어머니와 (상견례 이후) 첫 식사


치명적인 체리. 이유는
사람마냥 코까지 골면서 자서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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