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일하고 그렇게 힐링했습니다.
일 년 중 그의 힘든 시기가 생각보다 빨리 다가왔다.
바로 '산불 방지 기동 단속' 기간.
산불이 빈번한 봄과 가을 두 번 있는데 4월로 예상하던 이번 기간이 올해는 생각보다 건조한 날씨 탓에 빨리 시작되었다. 봄철은 건조한 날씨와 강풍으로 연중 산불발생 위험이 가장 높은 시기로 연간 산불 발생 건수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산림청의 전국 산불발생 통계에 따르면 109건의 산불이 발생하여 29.5ha의 산림피해가 발생하였으며, 이 중 43%(47건)가 논‧밭두렁 및 쓰레기 등 소각으로 인해 발생한 산불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 주부터 주말마다 담당 구역에 가서 기동단속을 하게 되는데, 이번 그의 출동지는 영양이었다. 그래서 응원 차 동행하러 영덕으로 갔다.
이 시국에 대중교통을 타고 타지로 간다 하니, 영덕은 아직 확진자 한 명 없는 청정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엄마 아빠가 걱정 또 걱정하셨다. 안심시킬 겸 나는 모자, 마스크, 장갑 3종으로 완전히 무장한 채 토요일 아침 동대구터미널로 향했다.
이렇게 사람 없는 조용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주말 아닌가. 45인승 버스엔 나와 남자 한 명이 앞구역과 뒷구역을 각각 자리했다. 비닐장갑을 낀 채로 버스기사님께 티켓을 제시하니 조금은 민망했다. 버스 안에서 지난 브런치 글의 주제였던 나에 대한 고찰을 하다 보니 두 시간이 금세 지났다. 영덕터미널에서 십여분 더 달려 마침내 영해터미널에 도착. 나만 버스에서 내렸고(아마 남자분은 울진까지 가나보다.)
내리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
아가씨 대구에서 왔지요?
여기 좀 와보세요
고개를 돌려보니 방호복 입은 분이 손짓한다. 이대로 격리되는 건가...? 두려움에 긴장하며 갔더니 체온계를 내민다. 다행히 36.1도 정상체온으로 합격. 그러나 끝난 게 아니다. 인적사항도 남겨야 한단다. 이름과 생일 연락처를 남기고서야 승하차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 코로나 확진자도 없고 미세먼지도 없는 청정지역 영덕답게(영덕군 슬로건도 '맑은공기특별시') 3개월 만에 맞는 공기는 여전히 쾌청했다.
영양가는 길이기도 하고 당연히 내가 대구에서 좀 더 가까운 영덕터미널에 내릴 줄 알았던 그는 영덕터미널로 향하는 중이었고, 내 연락을 받고 다시 차를 돌려 데리러 왔다. 안녕! 영덕군민씨 : )
영해에서 영덕으로,
영덕에서 안동 임동을 지나
청송 진보를 갔다.
기동 단속만 하면 지역을 넘나들기 십상이다.
금강산도 식후경. 밥부터 먹고 일하자 해서
88식당이라는 곳에 들어섰다.
닭백숙 하나 닭불고기 하나 시킬까 하는 내게
그가 아니라고, 닭불백숙 시키면 세트처럼
백숙+불고기 둘 다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아하?
곧 닭가슴살을 숯불에 잘 구워 마치 떡갈비같은
비주얼의 닭불고기 한 접시가 먼저 나왔고
상추+백김치+닭불고기 한점+고추장아찌+다시마
이렇게 한쌈 가득 입에 넣으니 행복했다.
잘게 채 썰린 산삼(?)이 토핑으로, 큼지막한 닭다리 하나씩 들어간 닭백숙도 나왔다. 녹두가 잔뜩 들어간 꼬소한 닭죽에 몸보신 제대로 한 점심을 마쳤다.
진보를 거쳐 마지막 종착지 영양에 도착했다.
그가 예전에 사진으로 보내준 적 있는 국보
산해리 오층모전석탑을 한 바퀴 돌았다.
남이포 강변을 사이로 바위 두 개가 우뚝 솟아 있는 선바위와 신선바위도 다시 만났다.
그곳에서 콩맨은 내일 함께 단속 파트너였던
팀장님과 통화를 했는데 여자친구가 왔다 하니
배려해주신 건지 자신은 가족들과 단속 돌면 된다며
덕분에 내일 자유를 얻었다. 옹예
그즈음 나는 택배로 잼을 받은 고객분의 연락을 받았다. 처음 주문을 하신 거였는데, 주소지가 인천이었다. 사실 코로나가 발생하고 나서 대구 지역에 매장이 있다는 점이 마이너스로 작용할 때가 많기에 보내는 주소를 기입하며 긴장을 했다. 이분은 과연 대구라는 걸 알고 주문하신 걸까? 모르고 하신 거라면 받고 나서 찝찝해하거나 후회하시진 않을까? 여러 생각에 뒤엉켜 보내드렸는데..
"대구 상황이 어려울 텐데 힘내세요!"
라고 메시지를 보내오셨다.
대구시 수돗물 브랜드 공모전 아이디어를 주고받으며 오늘의 하이라이트 마지막 코스,
영양 죽파리 자작나무 숲에 다다랐다.
겨울 내내 자작나무 숲 자작나무 숲 노래를 불렀는데 봄이 되니 그가 이렇게 데리고 와주네. 히히
강원도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숲만 알고 가봤지
영양에 이렇게 전국 최대 규모가 있는 줄은 몰랐다.
무려 9만 평 대지. 아직은 관광지로 조성 중이었고
지금은 입산 통제 기간(2월~5월)이라
사람이 출입이 안될 때라 들어간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감시하는 것도 그 아니 우리 할 일이었다. 길에 들어가는 차 한 대 없었고, 입구 앞에 세워진 차 역시 없었고, 숲 안에도 (물론 9만 평이나 되긴 하지만) 사람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백호 같기도 하고, 순록을 떠올리게도 하는 자작나무들. 지금도 이 정도인데 눈이 소복이 쌓이면 얼마나 더 멋질까 상상하며, 그때 다시 오지 약속했다. 그러다 매끈한 자작나무 가지를 하나 발견. 지난번 소나무 가랜드에 이어서 이건 가랜드 만들기 딱 좋을 아이다 싶어 주워 들었다. 내가 알아서 대구 잘 가져가겠다 했지만 결국 그의 몫이 되었지 흐흐 고마워요 내사랑 슈퍼맨.
자작나무 숲에서,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뒤로하고 이제 복귀하러 다시 영해로. 저녁을 먹고 읍내 밤 산책을 하고 나서, 꼭 배워보고 싶었던 커플요가를 유튜브를 보며 따라 하는 것으로 첫날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둘째 날이 밝았다.
일찍 일어나 상대산을 오르려고 했던 건
포기하고서 아침 8시까지 푹 잤다.
핫도그를 하나씩 먹고
그는 해야 할 일이 있다며 출근을 했다.
물과 커피, 엄마표 약밥과 한라봉 두 개를 챙겨
나도 곧 나섰고. 오늘도 영양으로 출동하는 날.
그전에 영덕에서 농특산물 소비 촉진을 위해
조성했다는 드라이브쓰루(Drive-thru) 행사장으로 가보기로 했다. 강구항을 지나 도착한 삼사해상공원 엔 이미 차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긴긴 줄 뒤를 따라 사고 싶었던 멍게 양념무침은 벌써 소진되었다 해서 사과, 시금치, 방울토마토로 꾸려진 농산물 꾸러미(10,000원)만 하나 샀다. 농업인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기분 좋은 소비를 했다.
점심을 먹으러 간 동해안횟집에서는 코로나가 맞나 싶을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어 어리둥절. 찐 맛집인가보다 하며 대기표에 이름과 연락처를 적은 뒤 그 사이 동해바다도 구경했다. 이삼십분을 기다려 들어섰고, 식당 안에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다시 한번 어리둥절. 오징어물회와 스페셜물회를 주문했고, 곧 나온 찬과 매운탕들로 상이 꽉 찼다. 물회를 한 숟갈 떠먹는 순간 찐맛집 맞음을 확인. 서로 부모님 맛 보여드리고 싶단 말을 반복했다. 한 그릇 뚝딱 비우고 마련된 아메리카노와 라떼로 후식까지 야무지게 먹고 기분 좋은 포만감을 느끼며 나왔다.
그가 보여주겠다는 영양 풍력발전단지 두곳으로 가는 길엔 아직 피지 않은 복숭아나무가 지천이었다. 작년에 그랬듯 복사꽃 필 무렵 다시 와야지. 여름에 결혼식을 하면 나는 단발머리에 무릎까지 오는 웨딩드레스가 입고 싶다, 축가는 정했던 노래보다 좀 더 상큼발랄한 걸 하면 어떨까, 몇가지 곡들을 틀고 따라 부르다 보니 도착한 국내 최대 규모의 맹동산 풍력발전단지. 악씨오나(acciona)라는 스페인 회사에서 조성한 풍력발전기 40여 개가 늘어서 있었다. 다음으로 간 GS풍력발전단지. 그곳에는 대기업 GS에서 조성한 발전기 18기들이 가동 중이었다. 고개를 넘을 때마다 "맑은공기특별시, 영덕입니다." "붉은 고추의 고장, 영양입니다."를 수시로 바꿔가며 내비가 외쳐댔다. 하얗고 큰 모습이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과 대조를 이루며 멋졌는데 다음에는 별이 쏟아지는 밤에 한번 드라이브하러 오고 싶어 졌다.
이곳에서 일몰까지 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이제는 내가 대구로 돌아가야 할 시간, 올 때는 버스를 탔지만 갈 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포항에서 ktx를 타고 오라는 엄마의 신신당부를 잊지 않고 영덕에서 포항, 포항에서 대구로 가는 기차 여정을 택했다.
해가 넘어가기 직전 영덕역에 도착했고, 포항으로 가는 기차에 올라탔다. 창문 너머로 그를 향해 손 흔들며 작별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는데, 기차가 출발하기 직전 다시 따라 올라타 뒤에서 한 번 더 놀래킨다. 대구 같이 가자구요ㅠ_ㅠ...
이틀 간의 산불 기동 단속에 함께 하면서 느낀 것은 그와 사귀는 일 년 반 여동안 본 산이 아마 여태껏 살면서 본 산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 차로 지나거나, 직접 오르거나. 근데 봐도 봐도 안 질리는 것이 신기한 우리나라의 매력산들. 그가 기차역으로 데려다주는 길 일몰을 보며 감상에 젖어 그에게 말했다.
"너랑 있으면 그림 같은 풍경만 보게 돼.
고마워"
그러자 그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다소 뻔뻔했다.
"응 그럴 수밖에. 내가 그렇게 만들거든."
그런 곳만 찾아 데려가 준다는 말이지.
인정. 사실이다.
당분간 대구에서 바빠질 나의 주말들이 앞으로 놓여있기 때문에 (벚꽃시즌 잼 만들고, 파인애플식초 추출하고, 4월의 마켓 준비하고, 결혼식 대신 우리만의 작은 약혼식도 어쩌면...?) 언제 또 다시 영덕에 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그날을 꿈꾸며 일상으로 복귀- 내일부터 다시 잼머로서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가야지.
bgm. 도망가자 - 선우정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