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자 <모순>, 칼릴 지브란 <예언자>,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독신으로 살겠다는 마음으로 가득했던 어린 날,
우연히 <모순>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쉽고 간결한 문장으로 쓰여져 술술 읽혔으나 결혼을 고민하는 여주인공의 입장을 이해하기엔 너무 어렸던 것 같다.
그렇게 잊혀졌던 이 책이 다시 머릿속에 떠오르게 된 건 서른 즈음. 나이가 들고 생각이 바뀌어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고 싶어져서였던 것 같다.
(아래 내용에는 책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자신과 잘 맞고 재밌지만 사진 작가로 불안정해보이는 남자와 새로 소개 받은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무난한 남자. 둘 사이에서 결혼을 고민하는 여주인공 '진진'에게 쌍둥이인 엄마와 이모의 삶은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평생 가난 속에서 억척스럽게 살아온 엄마와 그림같은 남편, 아이들과 함께 여유로운 삶을 사는 이모. 똑같은 얼굴로 너무도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그녀들을 보면서 '진진'은 자신이 살아온 삶과 미래에 대해 생각이 많아진다.
자기도 모르게 마음은 사진 작가에게 끌리지만 불안정한 그와의 결혼으로 엄마와 같은 삶을 살게될까봐 두려운 그녀. 그녀는 자신의 엄마보다도 우아하고 교양있는 이모를 보는 게 더 좋았다. 매일 바람잘 날 없는 집구석을 보다가 이모와 이모의 집, 친절한 이모부, 남부럽지 않게 큰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보다 더 완벽할 순 없어 보였다.
그런데 가끔 진진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했었던 이모는 어느 날 갑자기, 정말 황망하게 스스로 세상을 뜨고 만다.. 어딘가 모르게 주변과 유리되어 있던 이모, 허해 보였던 표정. 진진은 이해할 수 없었다.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졌던 엄마는 오늘도 장사에 도움이 되겠다며 일본어를 악착같이 외웠다.
삶이 힘들어질수록 엄마는 더욱 살아가야만 하는 의미를 찾은 게 아닐까.
반면 이모는 더 이상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 자기가 없더라도 그림 같은 남편과 유학 간 아이들은 잘 지내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모의 죽음으로 진진은 고민이 많아졌다. 결국 누구를 택했을까? 그녀는 결론을 내린다. 지금까지 자기의 삶은 엄마처럼 고난의 연속이었고 앞으로는 그렇게 살기 싫다고...
결혼으로 고민이 많았던 지난 날, 양귀자의 <모순>을 떠올리면서 든 생각은 다음과 같다.
모든 게 좋을 순 없다.
산 좋고 물 좋고 정자 좋은 데 없다고, 살아가면서 모든 게 좋을 순 없다. 배우자 역시 마찬가지. 완벽한 배우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늦은 나이에 결혼하게 된 언니가 예전에는 열 가지를 다 봤는데 딱 한 가지만 보니 결혼하게 됐다고 했다. 내 자신도 부족함 점이 많은데 상대는 완벽하길 바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지금의 선택이 중요하다.
결혼을 앞두고 <모순>의 여주인공 진진처럼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이들이 많다. 인륜지대사 중 하나로 순간의 선택이 인생을 좌우할 수 있으니 결혼은 신중해야 한다. 혹여나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으므로... 그러나 할 수 있는 한 모든 걸 고려한 것이라면 '지금' 내린 선택은 최선이라고 볼 수 있다. 지난 날들을 떠올려 봤을 때 누구나 후회되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 시절의 나는 지금과 다르기 때문에 역시나 같은 선택을 하게 되지 않을까.
양보와 자립이 필요하다.
예전에 직장 동료들과 함께 결혼식 축가를 위해 한 노래를 반복해서 연습한 적이 있다.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이렇게 시작하는 아마 성경 구절을 가사로 한 곡일 것이다. 흔한 노래라 가사를 유심히 살펴본 적이 없었는데, 반복해서 부르다 보니 좀 이상하다. 참고 또 참고 성내지도 말고 시기, 교만도 안되고... 그동안 '사랑'하면 온화하고 달콤한 느낌이 먼저 떠올랐는데, 무조건 참으라니...
아마 기혼자들은 대부분 이것이 진정한 사랑 노래라며 공감할 것 같다. 연애의 달콤함도 잠시 결혼은 그야말로 끊임 없는 인내의 연속, 현실인 것이다.
아래 그림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을 보더라도 결혼 생활이 고난의 연속임을 알 수 있다. 상징들로 가득한 이 그림은 곳곳에 결혼을 의미하는 이미지들이 그려져 있는데, 부부가 되는 두 사람의 뒷 배경 중 볼록 거울을 보자.
거울을 둘러싼 원들 안에 깨알같이 '예수의 수난 장면'이 그려져 있다. 결혼은 신성한 것이므로 이를 강조하기 위해 성경의 내용을 넣었다고 보기도 하던데 화가가 그걸 의도했다면 갖가지 고난 장면을 그리진 않았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결혼 생활을 '십자가의 길'에 비유한 게 아닌가 싶다. '결혼이라는 게 장난 아니게(?) 힘든데 참고 견디면 예수가 부활했듯 부부생활이란 길의 끝에도 깨달음이 있을 것이다. ' 라고 전하려던 게 아닐까. 여하튼 모난 돌들이 만나 함께 둥글어지기 위해선 어느 한 명의 일방적인 희생이 아닌 서로의 양보가 필요하다.
또 완전한 자립이 가능할 때 더 원만한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혼자 살 자신이 없어서 혹은 부모나 불안정한 삶 등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어서 결혼을 하려 한다면 다시 생각해보는 게 좋다. 혼자서도 충분히 잘 살고 있으면서 상대방을 책임질 수 있을 때가 적기다. 또 결혼 이후에도 각자 자신만의 영역은 침범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중 '결혼에 대하여' 는 결혼 생활에 대해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낭만적으로 묘사한 글이다.
함께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 너희 영혼과 영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 주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 말라.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을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 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
오직 큰 생명의 손길만이 너희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결혼은 신중해야 한다. 나이가 찼다고 떠밀려서 하기엔 그 책임이 너무도 크다. 배우자를 포함하여 적어도 한 사람 이상의 인생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므로... 그래도 배우자와 함께 인생의 희노애락을 겪고 나면 '사랑'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