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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은 Oct 22. 2020

"마침내 이 곳에 유토피아가 도래했다"

아서C. 클라크 <유년기의 끝>



인간이 가진 편협한 에고이즘을 나는 때때로 사랑스럽다고 생각해왔다.


인간 특유의 불완전한 자기애와 아집 같은 것들이 알려지지 않은 무한한 진리의 세계에서 아주 작은 집을 짓고 살아가는 소동물처럼 느껴질 때, 혐오나 무기력함보다는 사랑스러움이 밀려왔다. 어차피 인류 따위가 발버둥 쳐 봤자 예정된 결말에는 소용없을 지도 모르는데. 광활한 우주의 시공간에서 고작 지구를 잠시 점령했던 인류 역사의 비루함은 언급할 가치조차 없을지도 모르는데.


인간은 그래도 여전히 열심히 궁금해 하고, 갈등하고, 욕망하며 발버둥 친다. 그리고 지구를 이미 장악했다 성급히 믿은 인류는 슬슬 지구 안의 사유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이 이상의 인류 진화의 미래는 지구너머 우주에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면서. 스푸트니크호가 지구를 떠난 후부터 지금까지도 그것은 SF의 큰 원동력이었다.


외계인이 선물한 ‘닥치고 유토피아’


인간이 고도로 진화한 원동력 중 하나가 호기심이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와 <호모데우스>를 통해 인류가 진화해온 방향이 반드시 현명하고 합리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과학기술의 발전이 미래 인류에 새로운 위협이 될 수 있음을 지적했다.


하지만 욕구를 현실화하는 과학기술의 유용성을 달콤하게 맛본 인류가 이 흐름을 중단시킬 가능성은 없어 보이고, 미래는 편리하지만 더욱 예측불가능하고 통제불가능한 사회가 될 우려가 크다. 누구나 꿈꾸지만 어디에도 없다는 ‘완벽한 유토피아’는 인류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미래일까.


아서C. 클라크는 이에 대해 스스로 진화하는 데 한계를 맞은 인류가 범접불가능한 권능을 가진 외계인(오버로드)의 도움을 받아 완벽한 유토피아를 경험하게 된다는 파격적인 설정으로 답을 했다. 완벽한 선지자에 의해 완벽하게 통제된 새로운 지구는 인류 최대의 적이었던 전쟁과 권태를 없앤 새로운 차원의 문명세계로 도약한다. 어디에도 없는 곳인 줄 알았던 그 유토피아가 너무도 간단하게, 도래했다.


순식간에 지난 5천 년 동안의 인간의 역사 대부분에 접근할 수 있었다. (...) 며칠 안에, 대부분의 메시아들은 그 신성을 잃어버렸다. (...) 인류는 새로 발견한 자유를 맛보는 데 열중하여 현재의 쾌락을 넘어서서 생각하지 못했다. 마침내 이 곳에 유토피아가 도래한 것이다. - 아서C. 클라크 <유년기의 끝> 중에서 -아서

C. 클라크 <유년기의 끝>

유토피아의 모습은 자못 흥미롭다. 우주비행을 포함한 과학적 연구는 중단되었고(필요가 없어졌으니까), 주당 근로시간은 20시간으로 줄었으며, 늘어난 여가 시간 속에서 교육과 스포츠, 연예산업이 권태를 없애주었다. 종교의 메시아들마저 오버로드가 보여준 통찰로 인해 신성을 잃자, 오버로드만이 절대 질서가 되고 반항조차 무의미한 ‘닥치고 유토피아’가 찾아왔다.


외계지성체의 힘을 빌어 ‘조성된 행복’이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행복이 될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 운명은 우리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거나, “인류가 주체성을 잃고 오버로드의 노예 종족이 될 것”이라는 소수의 문제제기는 오버로드가 가져온 ‘전 지구적 안정, 평화, 번영’ 앞에서 철없는 앙탈로 들릴 뿐이다. 정말로 인류 문명을 압도적으로 초월하는, 그래서 인류가 해결하지 못했던 모든 문제의 답을 제시할 수 있는 고도문명의 존재가 나타난다면, 인류가 그들에게 기꺼이 권좌를 내어주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하지만 소설은 비극으로 빠르게 흘러간다. 모든 것에는 공짜가 없듯이 오버로드에게 통제권을 내어준 결과 인류는 발전의 속도를 앞당긴 만큼 종말조차 앞당기는 결과를 얻는다. 이렇게 되면 되물을 수밖에 없다. 무엇이 정답이었을까. 인류 스스로는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 유토피아의 대가가 겨우 이것이라면, 이것을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을까.


외계인 눈에 인간의 본질은 수수께끼일 뿐이고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은 외계인의 시선에서 바라본 인간 종에 대한 평가와 해석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인간은 단지 오버로드보다 미개한 존재일 뿐인가. 진화의 관점에서 볼 때, 상대적으로 미개한 인류가 더 문명화된 오버로드에게 지구 통제권을 이양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타당한가. 인간은 그러면 오버로드를 목적으로 진화해나가야 할 운명인가.


책 속에서는 진화를 초월해 논해보아야 할 인간의 본질이 엿보인다. 인간은 무엇을 원하고 어디에서 충족감을 느끼는 존재인가를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다.


정말 이상한 일이라고 캐렐런은 생각했다. 아직도 많은 인간들이 기회만 생기면 원시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인간들은 이제 원한다면 순식간에 계곡 밑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었다. 그것도 훨씬 편하게. 그렇지만 인간들은, 아마 눈에 보이는 것만큼 위험하고 안전하지도 않을 좁은 길을 따라 덜컹거리며 내려가는 것을 더 좋아했다.  - 아서C. 클라크 <유년기의 끝> 중에서 -


인간은 오버로드가 이끌어준 유토피아에서 스스로 벗어나려는 시도를 보이기도 한다. ‘뉴 아테네’라는 새로운 공동체를 창설한 사람들은 오버로드가 인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버로드가 오기 전의 세상에서 인류가 스스로는 어떤 미래를 맞이했을 지를 실험하고 싶어 했다. 이러한 모습들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가진 탐구심과 호기심, 그리고 스스로 부딪쳐 답을 얻으려는 주체성 넘치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또, 이 책을 읽으면서 드는 의문은 “진화의 종착역이 있는가”하는 것이었다.


애초에 생물체의 진화를 논할 때 우월하고 열등한 진화의 정도를 일직선상에서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진화의 방향과 정도에 대한 최적의 선택은 개체마다 다르기 때문에 한 종을 기준으로 다른 종의 진화의 우열을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해저 탐사를 하는 잠수함의 조종사가 잰에게 지나가듯 던진 다음과 같은 말이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아귀로군요. 저건 다른 물고기들을 유혹하는 미끼입니다. 환상적이지 않습니까? 이해하기 어려운 건 왜 저 미끼가 저놈을 잡아먹을 만큼 큰 물고기는 끌어들이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인간은 허겁지겁 ‘고속진화’와 ‘유토피아’의 미끼를 물어서 더 큰 물고기의 입 속에 스스로 들어간 것이 아닌가.


바퀴벌레는 3억 년의 세월에도 모습을 크게 바꾸지 않았으나 생존에 성공했다.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불릴 정도로 진화를 포기한 채 생존해온 생물들을 두고 단지 어리석다거나 미개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오버로드가 지구에 와도 ‘뉴 아테네’로 향하는 소수에 가담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생존의 면에서 본다면 때로는 느린 진화가 현명하니까.


빠른 것은 짜릿하지만 그만큼 위험하고, 느린 것은 오히려 안심이 된다. 인생에서 안심이 되는 것은 대체로 느리니까. 그리고 무지와 오해로 인한 인간적 고뇌와 갈등이야말로 인생의 참맛인지도 모르니까.


충격적인 신인류, 예상치 못한 결말의 허무함


SF가 주는 쾌감은 역시 예상치 못한 서사의 반전과 전혀 새로운 시공간을 거침없이 묘사해내는 창조력이다. 이 작품 역시 장편의 긴 호흡에도 ‘오버로드’를 둘러싼 반전 덕분에 중반까지 긴장감을 잃지 않으며, 우주 밖 ‘오버로드의 세계’와 지구의 최후를 묘사하는 후반에 이르면 충격적인 묘사로 모든 상상력을 동원하며 읽는 쾌감을 안겨준다. 이 과정은 몹시도 짜릿한 동시에 허무했다. 묘한 카타르시스. 마치 귓가에 한스 짐머의 압도적으로 비극적인 음악이 광광 들려오는 듯한.


"거대한 오로라의 폭풍. 풍경 전체가 밝아졌습니다. 대낮보다 더 밝군요. 빨간색과 황금색과 녹색이 하늘을 가로질러 서로 쫓아다니고 있습니다. 아, 이건 말로 표현할 수 없군요." - 아서C. 클라크 <유년기의 끝> 중에서 -


오버로드의 우주선을 통해 오버로드의 세계로 밀항을 시도하는 잰의 모험은 전지전능한 존재의 허를 찔러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경험을 한다는 점에서 짜릿함을 안겨준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가서 목격한 세계의 불가해한 질서와 지구로 귀환한 그가 목격한 신인류의 진화한 모습은 기괴하고 씁쓸하다. 잰과 함께 독자도 고작 이 꼴을 보겠다고 그 온갖 짓을 다했었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지 않을까. 하지만 최후의 인류와 지구의 모습을 물리적인 변화로 세세하게 기술하는 부분은 아서C. 클라크의 창조적 힘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오버로드조차 닿을 수 없었던 오버마인드의 존재는 끝까지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오버마인드의 의도조차 파악하기 힘들다. 독자의 상상에 맡기려는 저자의 선물일까, 우주는 영원한 숙제일 뿐이라는 가르침인 걸까.


하지만 신인류의 모습을 통해 인간을 포함한 이 우주상의 모든 종이 새삼 낯설어진 점은 교훈이 됐다. 그간 등돌려왔던 신비주의나 보이지 않는 정신적 세계에 대해서도 과학과의 접점을 상상하게 했다. 지금의 과학이 답할 수 없는 영역을 답해주는 새로운 질서가 발견될지도 몰라. 신비주의가 여전히 우리 곁을 떠도는 데는 분명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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