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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은 Oct 24. 2020

"거기 도리가 있었다. 거기 지나가 있었다."

최진영, <해가 지는 곳으로>

이 글은 서평이라기보다는, 불행을 정확히 서술할 수 있는 서술자는 결국 1인칭일 수밖에 없다는, 어느 날의 깨달음을 녹여낸 일기에 가깝습니다. 



오늘 아침부터 왼쪽 눈꺼풀을 들어올리기 힘들더니, 불을 켜기가 무섭게 통증이 밀려와서 눈물을 주륵주륵 흘렸습니다. 


불규칙한 수면 때문일까 싶어 좀 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소용이 없었고, 이미 잡혀 있는 공연 프레스 관람이 있어서 디큐브센터로 향했습니다.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고, 무대조명 때문에 무대를 잠시 쳐다보는 것도 고통스러웠습니다. 결국 귀를 최대한 열고 대사와 노래에 집중하면서 뮤지컬을 관람했습니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우산을 받치고 서둘러 근처 안과에 갔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불빛을 눈동자에 비추었습니다. 그러시더니 어떻게 하루 동안 견뎠냐며 각막에 생긴 궤양을 사진 찍어 보여주시더군요. 

"궤양이요?"

"아물더라도 흔적은 남겠어요. 자요, 눈을 끄게 떠요."

약을 여러 번 넣고는 거즈로 눈을 가리자, 저는 난생 처음으로 애꾸눈이 되었습니다. 비는 오고, 애꾸눈으로 퇴근길 지하철을 헤맬 자신이 없었지만 택시는 좀처럼 잡히지 않았습니다. 


눈 하나를 가렸을 뿐인데 불편함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재앙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최진영 작가의 <해가 지는 곳으로>를 떠올렸던 겁니다.


제가 오늘의 재앙을 굳이 길게 늘어놓은 것은, 모니터를 보기 힘든 상태여서 여유롭게 글을 쓸 수 없다는 변명에 더해 결국 모든 재앙은 개인의 서사로 기술되어야 옳다는 생각을 문득 했기 때문입니다. 


재개발에 밀려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야했던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속 인물들이 그랬듯, 최진영의 <해가 지는 곳으로>로 역시 각자의 이야기를 다중 1인칭 시점으로 풀어냅니다. 저 역시 애꾸눈을 하고서 그 아무도 감히 3인칭의 시점으로는 그들의 불행을 논할 수 없지 하는 생각을 결연히 했습니다. 


오늘의 제 불행도 - 이 표현하기 힘든 각막의 지극히 민감한 통증을 포함해서- 지나가는 사람이 봤다면 애꾸눈으로 지하철을 탄 여자를 봤다는 우스갯소리가 돼 버릴테니 말입니다.


<해가 지는 곳으로>의 등장인물들은 성이 없는 채 두 글자 이름으로 불립니다. 어디서 영 못 들어볼만한 이름도 아닌데 두 글자 이름이 주는 낯선 공명에 왠지 모를 서늘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그들의 불행은 특별히 재앙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특별한 재앙이 있기 전에도 그들은 이미 삶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고 적당히 불행했습니다. 오히려 그 적당한 불행, 루틴한 일상과 사회적 관계, 미래를 위한 막연한 헌신 등이 사라지자 자신의 진짜 불행이 더 또렷이 보였습니다. 


아마도 종말에 버금할 재앙이 닥치면 인간은 누구나 뼈저리도록 진정 자신이 가진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놓치고 잃어버린 것들과 아직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것들까지도 분명히 보일 겁니다. 그것이 진정한 불행의 시작이겠지요.


목적을 상실한 생은 생 그 자체를 연장하기 위한 발버둥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발버둥 속에서 그들은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간단히 잃어버리고 타인을 착취하거나 겁탈하는 것을 서슴지 않게 됩니다. 그 안에서 가장 약한 어린아이와 여성은 가장 먼저 그 희생양이 됩니다. 


이 작품에서 어린 소녀들과 소년의 무조건적 연대는 거의 유일할 정도로 가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세상이 지옥이어도 그것 또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 의미는 결국 연대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렇기에 소녀들의 서로에 대한 이끌림과 배려, 사랑의 감정 또한 단순한 욕망이라기보다는 약한 자들끼리 생의 의미를 복원하려는 고귀한 연대로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소녀들은 가장 극심한 지옥에서 조우합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극도의 슬픔과, 기쁨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끼는 기이한 체험을 했습니다. 



“거기 도리가 있었다. 거기 지나가 있었다.”   - 최진영, <해가 지는 곳으로> 中에서 -


아. 눈가가 뜨거워졌습니다. 제각기 다른 곳에서 기술되던 1인칭 시점의 극적 조우. 서로를 그리워하던 소녀들의 만남이었습니다. 저는 오직 그 장면, 단 두 문장만으로도 이 작품은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옥에서의 연대라니. 그리고 가장 약하고 가진 것 없는 소녀들이라니요. 저는 이 동화적일만큼 순진한 설정에 그러나 감히 비판할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기적은 가장 낮은 곳에서, 그리고 가장 순진한 아이들에게서 일어난다는 것을 종종 목격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애꾸눈을 한 채 몸을 실었던 지하철에서 누군가 손을 끌어 자리를 비워줬거나 계단에서 더듬거리는 제 발 뒤에서 혀를 차는 대신 괜찮으냐는 말을 누군가 했다면 저는 울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퇴근길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제게 갑작스레 일어난 이 작은 불행은 제가 아니라면 기술할 수 없는 재앙입니다. 종말에 버금가는 재앙이 올지라도 개인들이 각각 저마다 겪을 고통 역시 1인칭의 서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여전히 재앙의 본질이고, 인간의 슬픔입니다. 


저의 오늘에는 연대가 없었지만 이 책의 소녀들은 영원히 서로의 붙잡은 손을 놓지 않기를, 그리고 그 안에서 새 삶을 구원받았던 소년 역시 씩씩하게 지옥에서 살아남기를 빌었습니다. 


단지 서로가 거기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구원받는 느낌을, 저도 언젠가 느껴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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