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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은 Oct 21. 2020

"시계들은 '1:17'에서 멈추었다"

코맥 매카시 <더 로드>



조금의 희망도 없는 황량한 세계를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으로 묘사한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코맥 매카시는 마치 그 절망적 세계에 한 번 다녀온 사람처럼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더디고 꿋꿋한 그 걸음의 속도에 맞춰 묵묵히 서사를 이어간다. 이름이 없는 3인칭의 ‘남자’와 ‘소년’은 누구도 될 수 있는 동시에, 아직 겪어본 적 없는 아주 먼 존재들이기도 하다. 경험해본 적 없으나 이입할 수밖에 없게 그려낸 음울한 잿빛의 세계. 그 황량한 벌판에서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과 아들의 맹목적인 인류애는 서로 충돌과 화해를 반복한다.


생존하지 않는 이상 그 다음의 삶은 꿈꿀 수 없으나, 생존만을 위해 살아가는 삶 역시 무의미할 뿐이라는 것. 생존조차 힘든 세계에서 그 이상을 꿈꾼다는 것은 헛된 이상이겠지만, 이상을 잃어버리고 나면 힘겨운 생존을 해야 할 이유를 잃게 된다는 것. 저자는 그것을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과 화해를 통해 느끼게 한다. 인간은 결국 아무것도 안 남은 길 위에서조차도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극한의 절망적 세계, "시계들은 ‘1:17’에서 멈추었다"


이 책은 세계가 어떻게 온통 잿빛의 폐허로 변하게 되었는지 그 원인과 과정에 대해서는 거의 기술하지 않는다. 다만 추론할 수 있는 것은 핵폭발과 같은 거대한 폭발의 가능성인데 그것을 의심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묘사 때문이다. 작은 폭발이 상징하는 거대한 폭발. 시계가 멈춘 것이다.


시계들은 ‘1:17’에서 멈추었다. 크고 긴 가위 같은 빛에 이어 일련의 낮은 진동. 남자는 일어서서 창문으로 갔다. 뭐야? 여자가 물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욕실로 들어가 전등을 켰지만 전기는 이미 나갔다. 창유리에 칙칙한 장밋빛이 번졌다. 남자는 한쪽 무릎을 꿇고 레버를 위로 올려 욕조의 배수구를 막고 양쪽 수도꼭지를 끝까지 돌렸다. - 코맥 매카시, <더 로드> 중에서 -


어떤 거대한 폭발이 있었고, 그 후 폐허가 된 세계에서 인간들은 예전의 삶을 이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살아남은 인간들은 앞으로의 삶에 대해 서로 다른 선택지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 책은 그 몇 개의 선택지를 아주 차갑고 잔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 중 가장 잔혹한 것은 생존을 위해 인간성을 버린 식인의 부류이고, 그 다음으로 잔혹한 것은 그들로부터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히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부류이다. 그리고 남자의 아내이자 소년의 엄마는 그렇게 후자의 방식으로 목숨을 끊었다. 그 과정은 차가운 파도처럼 순차적으로 밀려온다.


당신은 우리를 보호할 수 없어. 당신은 우리를 위해 죽겠다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 (중략) 조만간 우리는 잡힐 거고, 죽을 거야. 나를 강간할 거야. 쟤도 강간할 거야. 우리를 강간하고 우리를 죽이고 우리를 잡아먹을 거야. 당신은 그걸 감당 못해. - 코맥 매카시, <더 로드> 중에서 -


처음 그녀의 입을 통해 들은 식인의 현실은 이후 부자(父子)의 여정에서 구체적으로 목격된다. 노예이자 비상식량처럼 인간을 사슬을 줄줄이 엮어 끌고 다니거나, 마치 가축을 키우듯 인간을 집의 지하 창고에 벌거벗긴 채 가둬두고 필요할 때 잡아먹는 부류의 족속들.


그 생생한 광경이 너무나 끔찍하고 잔혹해서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살아남은 자들을 더 이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인간이 더 이상 인간으로 살 수 없는 세상이라면 그녀의 선택도 충분히 납득이 된다. 그런 세상에 과연 어떤 살아갈 만한 희망이 남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세상은 이미 끝났는데. 그렇다면 인간답고자 하는 인간에게 남은 마지막 선택지는 오직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뿐이지 않을까.


한 세계의 종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을 운반해야 해"


남자는 소년과 함께 남쪽으로 길을 떠나는 여정을 선택한다. 남쪽에 그 어떤 희망이 있어서가 아니다. 다만 생을 유지하기 위한 여정에서 목적지가 필요했을 뿐이다. 남자는 소년에게 자신들은 ‘불을 운반하는 사람들(The man carrying the fire)’이라고 말한다.


소년은 남자에게 그 불을 꺼뜨리지 않아야 함을 배운다. 그리고 그 불이야말로 좋은 사람들과 나쁜 사람들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여긴다. 소년은 자신들이 '좋은 사람들'이 맞냐고 거듭 묻는다. 그렇다고 믿고 있었지만, 아버지가 자신을 살리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거나 죽어가는 사람들을 외면하는 것에 큰 실망과 저항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직 '불을 꺼뜨리지 않았는지'를 묻고 싶은 것이다.


"그게 진짠가요, 불이? 그럼 진짜지. 어디 있죠? 어디 있는지 몰라요. 왜 몰라. 네 안에 있어. 늘 거기 있었어." - 코맥 매카시, <더 로드> 중에서 -


이 소설이 흥미로운 점은 인간의 선의, 인간다움을 ‘불’로 표현해 마치 예전의 세대에서 다음 세대에 물려줘야 할 어떤 가치로 불의 이미지를 차용했다는 점이다. ‘불’은 책에서도 계속 등장하는 생존의 필수 요건이자 인간 문명의 시작을 상징하기도 한다. 꺼지기 쉽고, 위험하며 잘못 다스리면 파멸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불’은 마치 세계에 존재하는 인류 그 자체로 느껴지기도 한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인류는 크게 멸망하기 이전의 기억을 가진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로 나뉘곤 한다.


멸망 이전을 직접 경험한 세대는 새로운 세계에서 예전의 것을 찾으려 하면서 상실감과 좌절을 느끼는 데 비해, 멸망 이전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대는 새로운 세계의 질서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가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세대 갈등이 아닌 과거 세계의 단절이고, 새로운 인류와 문명의 시작이 된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는 아버지가 과거에 대한 플래시백으로 불러낸 것들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기반으로 다시 아들에게 물려줄 만한 가치들을 선택적으로 선별해 가르치게 한다. 이미 사라진 것들은 무의미하지만 아들이 여전히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것은 폐허가 된 세계, 식인의 세계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예전의 가치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인류의 마지막 사랑은, 언제 어느 곳에서


책에서는 모호하게 서술된 ‘불’이라는 것이 과연 구체적으로 무엇이 '되어야' 할까. 작가가 생각한 것이 무엇인지보다,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고 싶었다. 세계가 완전히 망했고, 내 목숨이 당장 위험하고, 내일을 살 희망과 근거가 없다면, 과연 무엇이 삶의 동력이 되어줄 것인가.


가까스로 살아남은 후손들에게 앞으로 무엇을 위해 살아가라고 말해줄 수 있을까. 생의 본능? 살아남은 자들 간의 연대? 평화로운 세계의 재건? 인류애? 어차피 망한 세계에서 도덕이나 윤리를 강요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애초에 인간이 그런 극한의 상황에서 생존 본능 이상의 숭고한 가치를 실천할 수 있는 존재일까.


나는 이러한 의문에 결국 확실한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아들에 대해 성스럽게 느껴질 정도의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부성애로 둘의 여정을 그려낸 저자의 선택이 현명했는지도 모른다. 그 어떤 최악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한 것을 위해 움직일 수 있는 자가 있다면, 마지막 인류애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자식을 감싸 안은 아버지 혹은 어머니일 테니까. 멸망한 세계에서 과거에서 온 불이 이어질 수 있다면 오직 그런 방식일 게 분명하니까.


내 목숨을 담보로 사랑을 실천하려는 부모들의 숭고한 희생에 의해서 인류애는, 인간에게 남은 마지막 사랑은, 그렇게 불꽃을 태우며 사라져 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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