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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은 Oct 21. 2020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 알고 있어"

테드 창 <내 인생의 이야기>



나는 너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계획된 것도 특별히 의도한 것도 아니었다. 안타깝게 끝나버린 마지막 사랑이 남기는 부작용이 흔히 그렇듯 불쑥 버스 좌석에 앉아서 창밖을 보며 네 생각을 했을 뿐이다. 보고 싶다, 도 아니고 그립다, 는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닫힌 문밖의 손에 잡힐 듯한 풍경을 습관적으로 떠올리듯 네 얼굴과 목소리를 몽글몽글한 기억의 촉수로 무심코 더듬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때였다. 마치 그 타이밍을 기다렸다는 듯이 눈앞에 네 이름이 또렷이 떠올랐다. 차창밖에 스치는 풍경 속에서 돌연 나타난 네 이름. 네 이름이 한 식당의 간판 속에 나타나 있었다. OO식당.  마치 내가 그 순간 너를 생각하며, 그 곳을 바라볼 것을 누군가 알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귓가엔 악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소름이 끼쳐서 나는 순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야기의 끝을 봐버린 사람들, 그들이 세상을 보는 눈


프랑스의 수학자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는 “우주에 있는 모든 물질의 역학적인 데이터를 알고 그것을 순식간에 해석할 수 있는 지성이 존재한다면 그는 정확히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후대 사람들은 이 놀라운 지성적 존재에 ‘라플라스의 악마’라고 이름 붙인다. 이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라플라스의 마녀’의 소재로 차용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미래를 이미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테드 창의 놀라운 시도는 이것을 생각하게 하는 데 있다. 미래를 안다면 삶의 무엇이 달라질 것이며, 우리는 그런 삶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광선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선택하기 전,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나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 알고 있단다.” - 테드 창, <네 인생의 이야기> 중에서 -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의 주인공 루이즈는 외계에서 온 헵타포드와의 소통과정에서 그들의 비순차적이고 동시적인 언어패턴을 발견한다. 그들의 ‘언어’를 습득하면서 그러한 그들의 관점 역시 함께 습득하게 된다. ‘언어’가 세상을 보는 관점을 결정한다는, 이른 바 언어결정론이다. 헵타포드의 관점을 설명하기 위해 소설은 긴 글을 할애하지만, 영화 ‘컨택트’에서는 이를 보다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데 성공한다. 리벽에 뿌려지던 먹물과도 같던 문자의 꿈틀거림. 이미 완성된 모습을 알고서 형성되어가는 원형의 문자 형태는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대략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했다.


예전에 독서모임에서 양자물리학을 언급하면서 김상욱 교수님께서 하신 말이 떠올랐다. 보통의 인간이 양자물리학을 본질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물리학자들은 양자물리학을 위해 일종의 뇌수술을 해야 한다 등 고충을 토로하는 일종의 교수님식 농담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깊은 흥미를 느꼈다.그것은 인간이 일반적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어떤 ‘패턴’이 결국 이 세상을 완전히 이해하는 데는 실패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고, 이 세상이 우리가 ‘이해’하는 방식대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세상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일 때야만, 우리의 자유의지가 성립한다는 사실이다. 미래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노력하고, 꿈을 꿀 것인가.


우리는 모두, '삶'이라는 연극의 수행자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봐버린 사람들의 삶의 동기란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할까. 하지만 테드 창은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발동하는 인간의 자유의지, 그로 인해 완성되는 주체적 삶이라는 인류 보편적인 ‘믿음’을 외계에서 온 ‘라플라스의 악마’를 소환함으로써 간단히 전복시킨다. 그것도 아주 개인적인 서사, 루이스가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 과정을 통해 인류의 오랜 환상에 균열을 내려는 것이다. 네가 설사 미래를 알 수 있다 하더라도 네 삶은 조금도 바뀌지 않을 거라고. 게다가 모든 삶의 순간 역시 빛을 잃기는커녕 전혀 다른 가치로 빛나게 될 거라고.


루이즈는 딸이 죽게 될 것을 알면서도 딸을 낳고, 사랑으로 키운다. 결말은 결말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에 이르는 무수한 희열과 고뇌의 눈물을 우리는 알면서도 기꺼이 흘릴 것이기에. 우리는 결국 루이즈에 공감한다. 가장 아름다운 고전 영화의 하이라이트를 돌리도 또 돌려보며 눈물을 흘려본 사람이라면, 있어야 할 곳에 그것들이 있고, 일어나야 할 것들이 그 순간 일어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 것이다.


“벌써 무슨 얘긴지 알고 있는데 왜 나더러 읽어달라는 거야?”

“얘기를 듣고 싶으니까!” - 테드 창, <당신의 이야기> 중 루이즈와 딸의 대화 -


헵타포드의 경우 모든 언어는 수행문이었다. 정보 전달을 위해 언어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화를 위해 언어를 이용했다. 그것은 소설 속에서 일종의 ‘연극’에 비유되기도 한다. 우리가 모두 연극배우라고 상상해보자. 이미 대본을 받았더라도, 내가 무대에서 맞을 결말을 다 알더라도, 하나하나의 대사를 읊고 몸짓을 하면서 우리는 ‘수행’하는 자의 희열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단지 그렇게 될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삶을 완성할 수 없다. 우리는 그 길을 직접 걷고 그 광경을 직접 보면서 삶의 축복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존재들이다. 몇 달 전쯤, 내가 쓴 대본을 연기했던 배우들도 무대가 끝나고 내게 이렇게 말했었다. “연기를 하고서야 대본의 의미를 알게 됐어요.”라고.


운명처럼 던져진 생(生), 우리의 연극은 이미 시작됐다


일상에서 스치듯 묘한 기시감이 들 때가 있다. 데자뷔가 이런 것일까. 그것은 꿈속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과거에 한 차례 겪은 일처럼 앞에 벌어질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는 감각이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것이 내 선택을 바꾸어놓은 적은 없었다. 나는 그것을 그대로 ‘수행’하면서 기시감에 겹쳐지는 현실에 오히려 ‘살고 있다는’ 강렬한 실존의 감각을 체험했다. 마치 생을 두 번 사는 것 같은 감각이랄까. 작품 속 루이즈도 이미 아는 미래를 하나씩 수행하는 감각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손을 뻗어 선반에서 샐러드 볼을 집어들어. 이 움직임에 특별히 강요받은 느낌은 없지. 오히려 네 머리 위로 떨어지려는 볼을 잡으려고 달려갈 때 같은 절박한 느낌에 가까워. 본능적으로 주저 없이 따라야 하는 느낌.”


소설의 제목은 ‘네 인생의 이야기(Story of your life)’이고, 국내에서는 영화 제목이 ‘Contect’로 소개됐지만 원제는 ‘Arrival’이다. 나는 때때로 추리 소설의 결말을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읽어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결말을 알았다고 해서 책을 그대로 덮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잘 완결된 이야기(Story)의 과정을 따라가는 과정이야말로 더욱 더 결말을 타당하게 느끼게 했으니까. 또한, 단순한 접촉(Contect)보다 이미 와버린 현실에 대해 느끼는 도래(Arrival)라는 표현은 우리에게 던져진 운명과도 같은 ‘생’을 떠올리게 했다. 우리는 언젠가 ‘죽음’으로 귀결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닥친 우리 ‘생’을 살아가야 한다. 이미 도래한 그것에 ‘왜’를 붙이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는 무대에 던져졌고 연극은 시작되어 버렸으니까.


우리는 결국 삶이라는 연극을 수행하는 수행자들이다. 다만 미리 대본을 받은 헵타포드에 비해 대본을 받지 못해서 즉흥극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좀 어설픈 배우들일 뿐. 하지만 모든 것이 극작가와 연출자의 의도였다고 해도 무대에서 연극을 완성한 것이 결국 배우의 연기라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산다. 어차피 죽을 것을 알아도,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완성할 권리는 여전히 우리의 것이다. 루이즈에게 있어 게리의 푸른 눈을 바라보는 순간을, 태어난 지 한 달된 딸에게서 나는 아기 냄새를, “엄마가 최고야.”라는 말과 함께 껴안아지는 감각을 어떻게 빼앗을 수 있을까.


그 어떤 연극도 언젠가는 막을 내리고, 생도 결국은 죽음으로 나아갈 뿐이다. 그래도 우리는 연극을 사랑하고, 생을 사랑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오롯한 우리의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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