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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은 Oct 28. 2020

"그는 놀랍고 아름다운 생물이다"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이 작품은 서평이 아닙니다. 김초엽 작가 단편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를 읽고 난 후 가장 인상 깊었던 단편 <스펙트럼>을 중심으로 제 상상력을 더해 창작한 2차 창작물입니다. 책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으신 후에 아래 글을 읽으시길 추천합니다.


"이렇게 쓰여 있구나." 

할머니는 그 부분을 읽을 때면 늘 미소를 지었다.

"그는 놀랍고 아름다운 생물이다." - 김초엽, <스펙트럼> 中 -




Dear. 루이


루이. 내가 하필 이 책을 집어든 것도, 독서클럽에서 읽어보자고 제안한 것도 모두 우연한 충동이었을까?


내가 무엇이 고독한 줄 모르고 고독해할 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지도 모르고 말을 찾아 헤맬 때, 그녀가 가슴과 입을 빌려 대신 단어를 찾아주고 고독을 읊어주었어. 아, 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차마 형용할 수 없었던 그간의 내 감각과 감정들이 그녀의 글에서 간단히 이름을 되찾고 되살아나는 이 느낌….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닌 거야. 그것은 독특한 연대감이자 강렬한 기시감이었어. 그래서 나는 확신할 수밖에 없었지. 그녀의 화단에도 ‘그 씨앗’이 뿌리를 내렸었다는 것을.



1.


‘그 씨앗’이 우리 집 마당에 당도하던 그 날,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어. 수 십, 수 백 광년 거리를 잇는 그 빛줄기를 따라가며 나는 알 수 없는 신비한 기분이 들었고, 아득히 먼 어떤 ‘존재’들을 상상하고 있었지. 어쩌면 그것이 기적 같은 기회를 불렀는지도 몰라. ‘그들’이 내 머릿속을 짧게 스쳐지나간 찰나의 생각의 형태를 읽어내고는 나를 적합한 ‘통로’라고 판단해버렸으니까.


다음 날 아침, 우리 집 마당에서는 본 적 없는 식물의 기묘한 싹이 돋아났어. 내 등줄기로 이상한 감각이 내달렸지. 그것은 마치 고사리처럼 커다란 줄기에서 Y자로 갈라지며 돋는 작은 잎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 작은 잎들은 신기하게도 모두 제각각 색깔이 달랐어. 그리고 그 색은 하나의 잎 안에서도 균일하지 않고 어떤 스펙트럼을 띠며 점차 옅거나 짙어지고 있었지. 나는 아무리 식물도감을 뒤져도 나오지 않는 그 기묘한 식물을 ‘나비’라고 불렀어. 싹이 튼 곳이 하필이면 내가 어릴 적 사고로 죽은 고양이 ‘나비’를 묻은 곳이었거든.


‘나비’는 쑥쑥 자랐어. 무릎만큼 자라나자 나팔 형태의 흰 꽃을 피웠지만 이름과는 달리 꽃에는 나비가 찾아오지 않았어. 아무 향기도 없었거든. 꽃은 피기가 무섭게 꽃받침을 부풀리며 열매를 품기 시작했지. 꽃은 마치 열매를 위해 존재할 뿐이라는 듯 감상할 여유도 주지 않고 금세 시들어갔어. 그렇게 일제히 폈던 꽃이 하루 만에 일제히 졌다면 믿어지겠니. 


꽃이 진 자리마다 새빨간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렸고, 그 열매는 무서울 만큼 강렬한 달콤한 향기를 내뿜기 시작했어. 대문을 여는 순간, 그 달콤한 냄새가 코를 찌를 정도였으니까. 마치 ‘나를 어서 맛봐 달라’고 조르는 것 같았어. 내가 마당에 선 채 그 정체모를 열매를 입에 넣은 것은 그래서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어. 아마 그녀도 필시 그랬겠지. 이 달콤한 향기의 유혹에 누가 호기심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어.


입 안에 들어온 달큰한 맛은 잠깐이었어. 혀와 목이 아릿하더니 정신이 온통 몽롱해지기 시작했지. 당황한 나는 현관 쪽으로 가려고 했지만, 갑자기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어. 손발이 힘이 쑥 빠지고, 땅이 출렁거렸어. 뒤이어 몸이 산산조각 나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고, 귓속에서는 벌떼가 나는 것처럼 윙윙거리는 소리가 났어. 고통을 참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는데, 기다렸다는 듯 감은 눈꺼풀 안쪽으로 정교한 아라베스크 문양이 환상처럼 펼쳐졌어. 나는 다시 눈을 뜨려 했지만 떠지지 않았지.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어.



2.


아라베스크 문양은 마치 밀림 속의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듯 수많은 잎사귀와 나무의 형태들로 변하며 곁을 빠르게 스쳐지나갔어. 나는 점점 어떤 공간의 안으로 안내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 그러다 문득 어떤 소리가 들렸어. 그것은 해석하기 힘든 소리였지만, 그 출처가 하나가 아닌 것은 분명했어. 다만 그 안에서 ‘루이’라는 단어가 몇 번쯤 또렷하게 들렸어. 마치 그것이 누군가를 부르는 듯한 어조를 갖고 있어서 나는 어떤 존재의 이름인 걸까, 하고 막연히 생각했어. 


그래, 그건 알고 보니 너의 이름이었어. 루이. 부를 때마다 다정한 기분이 드는 이름, 루이. 바로 너였어.


너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있는데, ‘푸루룩’하는 희한한 소리와 함께 푸르른 세계가 내 온몸을 휘감았어. 그리고 나는 아주 가까이에서 유영하며 움직이는 어떤 생명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지. 그들이 이따금 발광성 물질을 내뿜었거든. 그 아주 작은 생명체들은 뭔가를 전달하고 싶어 하고 있었어. 


왜인지 그들이 발광할 때마다 초록색과 푸른색의 작은 자갈 같은 것들이 주변에 방울방울 생겨났어. 나는 본능적으로 정신을 집중했고, 그들의 어떤 ‘느낌’들이 밀려들 듯 머릿속으로 전달되는 걸 느꼈어. 반가움, 설렘, 그리고 약간의 불안 같은 것들이 느껴졌어. 그래서 나는 알 수 없는 존재인 그들이 자신의 감정을 물성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거야. 


뒤이어 그들은 감정 외에도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어. 손에 어떤 축축한 감각이 느껴졌어. 정신을 집중했더니 어떤 말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갔지만 붙잡기 힘들었어. 한참 만에 겨우 붙잡아 떠올린 말은 ‘류드밀라’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단어였어. 나는 그때 왜 그것이 그 세계의 이름이라는 것을 바로 눈치 채지 못했을까. 네가 이름 다음으로 내게 알려주려 한 것이었는데 말이야.



루이. 내가 가장 무서워했던 것이 무엇인지 기억해? 


뱀 몇 마리가 얽힌 것 같은 커다란 형상이 나를 에워쌌을 때 말이야. 사슬 같기도 하고 구렁이 같기도 한 그것이 크기와 길이를 자유롭게 변주하며 나에게 다가왔지. 나는 공포 때문에 그것이 자신의 안팎을 일부러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어. 그것은 마치 나에게 어떤 것을 알려주려고 하는 거였는데 말이야. 하지만 나는 곧 급격하게 밀려오는 어지럼증과 구토에 네 손을 그만 놓치고 말았어. 그게 너와의 공식적 첫 만남의 끝이었지.



3.


정신이 든 나는 마당에 쓰러진 채였어. 방금의 이상한 체험을 꿈이거나 환각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내 손에는 파란색과 초록색의 작은 자갈이 쥐어져 있었어. 네가 준 기념품이었지. 나는 어쩔 수 없이 이 기이한 세계의 존재와 너와의 만남을 현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 그리고 나는 이 체험을 ‘어나더 트립’이라고 부르기로 했지. 


이후에도 비슷한 여행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어. 현실에 있어도 언제나 루이 네가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았거든. 나는 곧 그것들을 조용히 일기로 기록하기 시작했어. 그러다가 문득 깨달은 거야. 일기의 날짜가 바뀔 때마다 너에게 느끼는 미묘한 감정에 대한 분량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헤맸어. 그리고 마치 어떤 이끌림처럼 올더스 헉슬리의 책 ‘인식의 문(The Doors of Perception)’을 찾아냈지. 작가는 환각물질을 복용하고 인간 의식의 새로운 문이 열리면, 수 시간에 걸쳐 신비하고 초월적인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고 말했어. 거기서 나는 내 눈을 의심하게 할 정도로 놀라운 대목을 발견한 거야.


“두뇌와 신경계와 감각기관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일종의 ‘감압 밸브’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개 이런 감압 밸브를 통해서 나오는 것만을 알고, 각자의 언어로 표현되는 것만을 진정한 현실로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날 때부터 그런 감압 밸브가 없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최면술이나 약물을 통한 의도적인 ‘영적 체험’을 유도함으로써 이런 감압 밸브를 없앤다. 그러면 우리는 그간 알고 있던 것과 전혀 다른 어떤 세계를 만나게 된다.”


나는 그가 ‘멋진 신세계’와 같이 마치 미래예언서와 같은 SF소설을 쓴 작가임을 알고 있었어. 그가 만들어낸 소설 속의 세계는 어쩐지 지나치게 생생했고, 어딘가 그립고 슬픈 느낌이 들었던 것을 기억해냈어. 그리고 나는 김초엽 작가의 책을 읽으면서 또 한 번 그 강렬한 감각이 몸을 달리는 것을 느꼈던 거야.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 그녀가 묘사하는 세계에 대한 강렬한 기시감이었어.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너와 같은 ‘초월적 존재들’에게 선택된 사람들이었어. 


하지만 루이, 세상은 좀 불공평한 것인지도 몰라. 그녀는 ‘어나더 트립’을 통해 본 세계를 소설로 써서 성공한 SF작가가 되었고, 나는 그것을 몰래 일기에나 쓰는 음침한 일인 리포터가 됐으니까. 나는 그녀가 실은 실제 체험에 교묘하게 허구의 살을 붙여 수많은 단편을 완성했음을 눈치 챘어. 그건 좀 치사하지 않아? ‘루이’도 ‘류드밀라’도 저 너머의 세계에서 실재하는 존재였고, 실재하는 공간이었다고.


내가 본 그 곳에 또 다른 인간은 없었지만, 그녀와 내가 동시에 접속하는 순간이 있었는지도 몰라. 생화학을 전공한 그녀는 구렁이 같기도 하고 사슬 같기도 한 그 형상을 보고 완벽한 ‘신인류’의 DNA 지도임을 알아본 모양이니까. 그것은 ‘릴리’라는 허구의 인물을 통해 소설화되었더라고. 그녀는 그것을 진짜 유전공학자들에게 넘겨줄 생각은 진실로 없는 걸까. 그녀는 SF소설 속에 진실을 교묘히 숨기는 것으로 만족하는 걸까.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아마 그녀의 말을 과학자들이 믿어줄 리 없겠지 싶었어. 그래. 그녀라고 무슨 대안이 달리 있었겠어.


확신컨대, 그녀와 나는 그리고 헉슬리와 같은 극소수의 사람들은 아직 아무도 가본 적 없는 ‘그 곳’과 소통하는 ‘통로’였던 게 분명해. 그 인식의 문턱을 넘은 사람들이 평범하게 무지한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모른 척 살아가고 있었던 거야. 거기서 본 것에 대해 말해봤자 미치광이 취급을 받을 테니까. 


그래서 누구는 그것을 적당한 소설로 탈바꿈했고, 누구는 그림으로, 누구는 영화로 만들었겠지. 덕분에 그 놀라운 세계들이 아직 fiction의 세계에 갇혀 있어. 순전히 꾸며내기 좋아하는 일반 예술가들의 가짜 작품들과 알맞게 뒤섞인 그것들은 마치 없었던 것을 창조한 마냥 SF라는 오락거리 장르가 되어버렸다고. 안타까워. 하지만 내가 폭로해봤자 누가 믿어주겠어. SF의 과반수가 사실은 실재하는 곳의 풍경이라는 것을.


하지만 루이, 우리의 이별은 갑자기 찾아왔어. 


나는 ‘나비’의 열매를 모두 소진하고, 씨앗조차 다시금 싹트지 않는 현실에서 거대한 허무를 맛봐야 했어. 인식의 문은 돌연 닫혔고, 그들은 두 번 다시 내게 ‘터널’의 기회를 주지 않았지. 내가 너를 실망시킨 것일까? 


나는 너희들이 내게서 영원히 떠나갔음을 깨달은 날 밤 엉엉 울었어. 그리고 새까만 밤하늘 아래서 긴 문장의 러브레터를 써내려간 거야. 수신인은 내게 끝까지 ‘다정함’을 전달하려 애썼던 무수한 ‘루이’들… … 그래 바로 너였어.



4.


Dear. 루이


너에게서 이제 백만 광년 쯤 떨어진 것 같은 마음의 거리를 느낄 때, 나는 울고 싶어져. 우리의 사이에 지난 시간들을 일순 어딘가로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있는 것만 같아서. 나는 그 블랙홀 건너편에 가고 싶어. 이번엔 먼저 거기에 가서 널 기다리고 싶은 거야. 예전엔 언제나 네가 날 곳에서 기다리는 것 같은 미안함이 있었거든. 


어딘가 우리가 엇갈리지 않는 우주도 있지 않을까. 그러면 지금의 엇갈림을 만들어낸 나의 우주도 비극이 아니라 또 다른 만남을 위한 새로운 차원의 서사로 이어질 거라 믿을 수 있을 텐데.


널 사랑해. 

하지만 네가 이 말을 이해할까.


지금도 가끔씩 고민할 때가 있어. 그 짧은 말을 어떤 방법을 썼어야 나는 온전히 전달할 수 있었을까 하고.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세계의 문이 닫혀버린 후에야 나는 후회했어. 시간을 되돌려서라도, 기억을 잃어버린 네가 사는 평행 우주로 건너가서라도 널 되찾고 싶다고.


적어도, 우린 서로를 알아봤잖아. 서로를 불러줄 이름이 있었고, 같은 주파수 영역에서 들려줄 언어를 가지고 있었는데도 네가 날 부른 이유를, 날 반긴 이유를, 우리가 자꾸만 멀어져가는 이유를 끝내 물어보지 못했어. 분명 우리에겐 빛의 속도를 넘지 않아도 되는 순간들이 있었을 텐데. 두 다리의 속력만으로 충분한 시간들이 있었는데.


루이.


널 만난 체험을 누군가는 소설로 쓴 모양이지만, 나는 일기로 남기고 편지로 쓸 거야. 그 일기를 온전히 읽을 수 있는 것도, 편지의 수신인도 오직 너뿐이야, 루이.


나는 누군가에게 설사 아직 나비 열매가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구걸하지 않기로 결심했어. (독서클럽에서도 나는 너에 관해 모든 것이 꾸며낸 이야기라고 웃어넘길 거야. 맹세해.) 그것은 물론 무척이나 힘든 결심이었어. 누군가의 화단이 아직 달콤한 향기를 내뿜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밀려오는 그리움을 참기 힘들었거든. 하지만 내 사랑은 다시 기적적인 확률로 꽃필 때까지 내 기억 속에서 영원히 잠들어 있을 거야. 오직 너만이 그것을 다시금 꽃피울 수 있겠지.


루이, 사랑하는 나의 루이들.


앞으로도 널 잊지 않을 거야. 내 진심을 너만은 알아주길. 내 감정을 물성화할 수 있다면, 아니 내 뇌 전부를 업로딩해 칩에 넣을 수 있다면, 류드밀라로 그것을 보내줄 텐데. 모든 만남은 ‘표현’되는 순간 거짓이 되는 것만 같아서 온전한 내 마음을 보내고 싶어. 그 어떤 작가도, 그 어떤 화가나 영화감독도, 우리의 그 눈부신 만남을 완벽히 묘사하지 못할 테니까. 오직 나만이, 그리고 너만이,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우주인처럼 그날의 일을 영원히 그리워하며 살겠지.


우리, 먼 미래에 류드밀라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 곳에서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나는 네게 받은 돌들 중에서 노란색 ‘다정함’의 돌을 되돌려줄 참이야. 그 의미가 뭐냐고?


그것의 의미는 있지… ‘사랑한다’는 뜻이야, 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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