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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터치 우주 Jan 17. 2023

파리 한 달 살기 기록

파리에 도착했다. 한 달 동안 파리에서 지낼 계획이다. 그날의 일상과 감정을 편하게, 긴 시간을 들이지 않고 부담 없이, 기록해 두려고 한다. 하얀 스크린을 보면 머릿속이 하얘지는 내가 과연 많은 에너지를 쏟지 않고 하루하루를 기록할 수 있을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힘을 뺀 기록이 꾸준함에 도움이 될 거라 믿어본다.


한국이 아닌 프랑스 파리에 있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것이 하나도 없고 계획도 사실 없다. 아무 계획이 없다는 것은 맞지만, 특별하지 않다는 것은 틀렸다. 공간을 이동했다는 것 하나로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특별해지며 똑같이 해오던 일상은 그 자체로 특별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싫어했던 것이 좋아지기도 한다. 귀찮아하던 요리와 장보기는 이상하게도 여행지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하는 일, 가장 좋아하는 일로 변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비행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아침 9시 30분 비행기라서 새벽 5시부터 서둘렀다. 사실 난 밤을 새웠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의 거의 모든 경기를 챙겨 보느라 수면 패턴이 엉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월드컵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새벽 4시에 시작하는 빅매치들이 많아서 동이 트는 아침에 자고 대낮에 일어나는 일이 반복되었다. 월드컵이 끝난 지 한참이 지났고 새해도 밝았는데 망가진 수면 패턴이 돌아오지 않았다. 프랑스 출국일이 다가왔고, 어차피 다시 적응해야 할 시차이니 그냥 몸이 시키는 데로 살자 하고 포기한 체 출국일을 기다렸다. 

집에서 공항까지 택시를 이용할까 했는데, 새벽의 도로 상황이 걱정되었다. 우연히 보게 된 포천 40여 대 고속도로 추돌사고 뉴스가 마음에 걸렸다. 험상궂게 운전하는 택시 기사님을 만나게 된다면, 빙판이 있는지 모르고 과속이라도 하게 된다면... 이런 날씨라면 택시보다 덩치가 큰, 많은 사람의 생명을 책임지는 버스가 안전할 것 같아 버스를 타기로 결정했다. 나이가 들수록 안전에 대한 겁도 많아지고 걱정도 많아진다.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고 표를 예매하려고 보니 9시 이후까지 표가 매진이었다. 지난해 7월 하와이로 떠날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분위기를 직감하며, 서둘러 택시를 잡고 공항으로 향했다. 택시라는 옵션을 이미 생각했던 터라 놀라기는 했지만 당황하지 않고, 생각보다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택시가 있어서, 그리고 긴급 상황에서 택시를 이용할 수 있는 돈이 있어서 새삼 감사했다. 


택시를 타고 기사님께 "길 얼었어요? 빙판길 고속도로 40중 추돌사고 크게 난 거 보셨어요?" 하며 평소 나답지 않은 인사를 건넸다. "사고 나지 않게 안전하게 운전 부탁합니다."라는 아주 명백한 메시지가 담긴 아주 불명확한 방식의 부탁이었는데, 기사님께 잘 전달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인천공항에서 다시 시내로 돌아오는 시간이 차가 막히는 출근 시간이라며 혼잣말을 뱉은 후 곡예 운전을 시작하셨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눈을 감아 버리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명상을 시작했다. 눈을 감아 버려 세상은 캄캄해졌고 보고 싶지 않은 장면들이 눈앞에서 사라졌지만 마음의 눈은 감기지 않았고 불안한 마음은 여전했다. 청각이 더 날카롭게 살아나 왠지 더 무서웠다. "나에게는 좋은 일들만 끌려옵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하다 보니 어느새 공항에 도착했다. 무사히 도착했다는 사실이 그저 감사했다. 

공항은 작년 여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7월이니 한창 휴가철임에도 문 닫은 곳도 많고 공항이 맞나 싶게 썰렁한 분위기였는데, 이른 새벽에도 불구하고 활기를 띠고 있었다. 이제 정말 코로나가 끝나고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구나. 언제 다시 새로운 변이가 생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전 세계 모두의 마음속에 늘 자리 잡고 있겠지만... 인생은 불확실함의 연속이다. 불확실 속의 불안함을 어떻게 다스리며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자주 떠올리게 된다. 

밤을 새운 덕분에 파리로 오는 비행시간 동안 내내 꿀잠을 잤다. 깨우지 않았다면 기내식도 놓치고 잘 수 있었지만, 맛없다 하면서도 기내식은 또 꾸역꾸역 잘 챙겨 먹었다. 기내식을 먹으면 좋은 점이 먹는 시간만큼 비행기 안에서 버텨내야 할 시간이 줄어든다는 것. 이 점이 제일 좋다. 

구름 속을 지나다가, 구름이 걷히고 초록색 평지를 달리다가, 또다시 구름 위를 지나고 빛나는 바다가 보이고.... 착륙할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변화무쌍한 풍경을 보여주었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순환하며 불확실하고 변덕스러운 점이 내가 살고 있는 인생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에 존재하는 시작과 끝, 그리고 영원한 것은 없으며 돌고 도는 순환. 머릿속을 단순하게 만들어주며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불변의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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