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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터치 우주 Jan 20. 2023

파리 한달살기 길을 잃는다면

오늘의 "목표"는 <목표 없이 걷기>가 "목표"이다. 과연 나에게 목표가 있는 걸까 없는 걸까? 목표가 없긴 한데 있기도 하고, 있긴 한데 없기도 하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여기는 파리니깐. 길을 잃어도 손해 볼 일 없는 파리. 파리에서는 길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오히려 손해 보는 일이다. 길을 헤매지 않는 것이 시간 낭비다. 


이번에는 딴 길로 새지 않고 지도앱이 알려주는 동선을 따라 끝까지 가보자 마음먹었더라도 나의 눈길은 쉴 새 없이 앱이 알려주는 동선을 벗어나 골목, 카페, 사람들을 두리번거린다. 약속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기꺼이 눈길이 가는 곳으로 경쾌하게 발길도 함께 따라가 본다.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면 앱을 끄고 손과 눈에 자유를 준다. 이때부터는 마음껏 방황하고 헤매기 시작한다. 인터넷 와이파이로부터 해방! 손도, 눈도, 발도, 마음도 모두 자유롭고 자연스럽다. 


길을 잃긴 하겠지만, 사실은 잃을 거 없는 항상 남는 장사다. 우연히 들어선 골목길의 어느 집 앞을 지나다 역사적 인물이 살았던 곳이라는 조그맣게 붙어 있는 안내문이라도 보게 된다면... 소름이 돋고 심장이 뛴다.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하는 곳이 바로 파리다. 생각보다 정말 자주 일어난다. 

한 도시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은 길을 잃어 보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마음 놓고 길을 잃어보자. 남는 장사다. 길을 많이 헤매면 헤맬수록 생각하지 못한 여행의 보너스들이 덤으로 줄줄이 사탕처럼 따라온다. 심각한 길치인 나는 그 누구보다 여행에서, 파리에서 헤맴이 주는 선물을 잘 알고 있다. 지금처럼 모두가 핸드폰을 켜고 앱으로 길을 찾는 시대가 도래하기 전, 나는 참 많이도 헤맸고 바삐 가던 현지인을 멈춰 세우는 무례를 참 많이도 저지르며 다녔다. 

시간이 지체되고, 계획이 틀어지는 일도 많이 생겼다. 난감했던 경험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시간이 계획 보다 더 오래 걸려 숙소에 늦게 도착했다거나, 밥때를 놓쳐 음식점들이 문을 닫았다거나 하는 정도라 불행 중에 다행이었다. 길을 헤매고 사람들에게 물어 가면서 잊지 못할 특별한 추억거리와 소중한 인연도 많이 만들었다. 


손바닥 위에 놓인 지도 한 장에 의지 하는 것 외에는 길을 찾을 방법이 없었던 그때 그 시절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지도앱을 켜고 아무 생각 없이 알려 주는 코스로 따라 걷기만 하면 누구나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누구나 같은 동선으로 효율적인 길 안내를 받을 수 있는 지금의 시대가 어쩌면 축복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고 다시 종이 지도에 의존하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다. 난 여전히 지도를 보고 길을 찾는 것이 불가능한 인간이며, 간편하고 정확한 지도앱을 포기할 수가 없는 거다. 

처음으로 배낭 메고 떠났던 나 홀로 40일간의 유럽 여행이 떠오른다. 수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기억이 바래기는커녕 시간이 쌓여 갈수록 숙성이라도 되는 것인지 더 선명하고 강렬해지는 느낌마저 든다. 그때 시간을 떠올리다 보면 보고 경험한 것들이 생생하게, 보다 자세하게 머릿속에 그려진다. 


함께 배낭 여행을 가기로 했던 친구가 못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나 혼자라도 떠나기로 결심했던 과거의 나란 녀석! 참 잘했다. 부모님께는 나 혼자 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거짓말을 하고 나 홀로 여행을 감행한 것도 참 잘했다. 내 인생에서 잘한 거짓말 중에 베스트 오브 베스트다. 


학교 가면 교수님이, 선배가, 친구가 "너 이메일 만들었어?"라는 질문을 하던 그때 그 시절. 인터넷에 온갖 정보들이 넘쳐 여행을 가기도 전에 이미 그곳에 갔다 온 것만 같은 친숙함을 주는, 생생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릴 수 있는 지금과는 전혀 달랐던 그때.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다. 사람들은 이제 막 이메일 주소라는 것을 만들기 시작했고, 다음 포털 사이트에 다양한 테마별 다음카페가 한두 개씩 생기던 시기로 그때를 기억하고 있다. 


숙소 예약 없이 유레일 패스 한 장 달랑 준비하고 여행을 떠났다. 유레일 패스는 횟수에 상관없이 일정 기간 동안 자유롭게 기차를 이용할 수 있는 티켓으로 야간열차를 이용해 이나라 저 나라를 옮겨가며 숙박을 해결하고 다녔다. 


기차역에 도착해 공중전화에 붙어 있는 광고를 보고 전화를 걸어 숙소를 잡기도 했고, 여행 책자에 나온 유스호스텔을 찾아가 묶기도 하고, 기차가 도착할 시간에 맞춰 여행객에게 다가오는, 소위 현지인 삐끼를 통해 숙소를 잡았다. 현지인이 제시하는 숙소 위치, 가격 등이 마음에 들면 그 현지인을 따라나서면 된다. 지금 생각하니 참 겁이 없었다. 현지인을 통해 숙소를 구해야만 할 때는 할머니 삐끼만 쫓아갔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만났던 할머니 생각이 제일 많이 난다. 숙소를 정하지 않고 가는 여행이 부담스러운 여행객을 위해 숙소만 잡아 놓고 자유 여행을 가는 <호텔팩>이라는 여행 패키지 상품이 유행했었다. 

디지털카메라도 없었다. 나만 없었던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없었던 믿기 힘든 시기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동대문에서 수십 통의 필름을 샀다. 혹시라도 손상되지 않도록, 비에 젖지 않도록 비닐에 꽁꽁 싸서 배낭에 넣었다. 사진 한 장을 찍더라도 소중하게, 신중하게, 셔터를 누르던 시절이다. 지금처럼 일단 찍고 보자의 마인드는 있을 수 없었던 셔터 한 번의 소중함. 내가 누른 그 셔터 한 번은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 현상소에 필름을 맡긴 후 내 눈앞에 이미지로 나타날 예정인 소중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셔터 한 번이 그렇게 소중했다. 40일이라는 긴 일정에 맞춰 여유 있게 필름을 챙겼다 생각했지만, 어떤 장소에서 어떤 장면을 만나 평소보다 많은 셔터를 눌러 필름을 얼마나 소비하게 될지 예상할 수 없으니, 필름 한 장을 허투루 쓸 수 없다.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은 반드시 현상으로 이어지지 않지만, 필름카메라는 찍은 장면이 사진 현상으로 이어진다. 필름을 현상소에 맡기며 현상할 사진을 고를 수가 없으니 당연하다. 필름 한 장이 소비되고, 현상비까지 추가로 돈이 드는 일이니 내가 셔터를 눌러 담은 장면 하나하나, 기억 하나하나가 더 소중할 수밖에.

유로로 통합되기 전이라 여행할 각국의 돈을 한국에서 미리 환전을 하거나 유럽 여행자수표를 가지고 간 후 현지 은행에서 그 나라 돈으로 바꿔서 사용했다. 모든 은행이 여행자 수표 환전 업무를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길을 헤매다 어렵게 찾아간 은행에 헛걸음도 여러 번 해야 했다. 현지 돈이 있어야 버스도 타고 빵도 사먹을텐데... 또르륵. 직원이 알려준 주소를 들고 길에 맞춰 지도를 돌려가며 요상한 방법으로 길을 찾으려 애썼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은 인터넷이 있으니 정보를 얻기도 쉽고, 지도앱만 있으면 길을 찾기도 쉽다. 길을 헤매는게 더 어려운 세상. 그땐 정보도 없고, 지도앱도 없으니 매일이 멘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작고 꼬불거리던 골목을 헤매고 또 헤맸다. 당장 돈을 환전해야 싸구려 빵이라도 뜯을 텐데.... 당연히 신용카드도 없던 어렸던 나. 지금 돌이켜보니 나 참 용감하고 무식했다. 막무가내로 순진하게 애쓰느라 서툴렀지만 나의 빛나고 빛나던 젊음. 장하다! 아, 벨기에 브뤼셀에서는 끝내 숙소를 찾지 못해 노숙을 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과거의 나, 토닥토닥!

옛날 생각하니 나 정말 오래된 사람이구나 새삼 다시 느끼게 되고, 나이가 그만큼 많이 들었다는 사실이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을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좋다. 그저 일찍 태어난 덕분이긴 하지만 지금은 절대로 다시 하지 못할 시대적 경험들을 많이 했고 내 안에 차곡 차곡 쌓여 있다 생각하니 뭐랄까, 든든하면서 애틋하기도 하고, 뭔가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된 듯한 느낌? 그래봤자 다른 사람들에게는 "라테는 말이야"를 신나서 혼자 떠드는 꼰대 비슷한 사람쯤으로 보이겠지만. 그냥 급변하는 시대에 때마침 태어난 오래된 사람이라 해도 추억을 회상하고 있는 지금, 게다가 파리에 있는 지금, 나는 행복하고 감사하다. 작던 크던 추억할 것이 많은 사람은 행복하다고 했는데... 정말 맞는 말이다. 


목적지 없이 동네 주변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 네덜란드인 교수님을 만났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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