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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꽃의 숨결

아네모네

기다림의 바람꽃

by 자명

평소처럼 커피를 들고 마리언니 꽃집에 갔는데, 아네모네 꽃을 보게 되었다.

"언니, 색이 진짜 예쁘네요. 쨍한 청보라색과 쨍한 핫핑크라니."

마리언니는 주문 들어온 꽃다발을 만들며 대답했다.

"옷 잘 입은 아가씨들 같지?"

나는 언니의 말이 재미있어서 웃음이 나왔다.

"얘들을 데려갈래요."


집에 오자마자 아네모네를 그리기 시작했다. 아네모네는 꽃잎에 혈관 같은 무늬가 있고 꽃술이 동그란 형태로 보이는 게 귀엽기도 하다. 줄기에는 솜털이 가득하며 줄기의 곡선은 참 예쁘다.

꽃잎 한 장, 한 장 그리는 시간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 여린 아이보리 색의 아네모네와 '내가 주인공이야!'라고 외치는 것 같은 화려하고 선명한 청보라색의 아네모네, 그리고 수줍은 공주님 같은 핫핑크색의 아네모네까지 이렇게 세 송이가 종이를 가득 채웠다.


아네모네를 그리면서 내내 기다림이라는 단어가 마음속에서 맴돌는데, 아네모네는 바람의 신 제피로스가 사랑한 님프의 이름에서 태어난 꽃이라고 한다. 그래서 바람꽃이라고도 불린다. 꽃말은 기다림, 덧없는 사랑, 그리고 허무함. 하지만 내가 아네모네를 그리는 순간엔 오히려 작은 희망 같은 것이 피어나는 기분이 든다. 색연필 끝에서 번져가는 색을 따라가면서, 기다림이라는 말이 슬픔으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기다림은 언젠가 다시 피어날 것을 믿는 조용한 기도 같았다. 그림을 그리는 그 순간이 참 좋았다.

세 송이의 아네모네를 그리면서 나는 각자의 줄기가 서로에게 방해되지 않으면서 어우러져 아름답게 보이길 원했다. 조화롭게 잘 어우러진 꽃들은 여백의 미와 곡선의 미를 살리며 더욱 곱게 피어났다.


선을 한 겹, 한 겹 쌓아 오랜 시간을 들여 완성된 그림은 장옥미술관에서 처음 선보였다. 그리고 그 옥미술관 전시기간에 일찍 좋은 분께 팔렸다.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마음에 드는 그림이었는데 딱 마음에 들어 하시는 분이 있다니 복했다.

아네모네 (종이에 색연필, 2018. 김예빈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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