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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꽃의 숨결

양귀비

줄기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다

by 자명

어느 날은 마리언니가 새로 가져온 꽃양귀비를 보여줬다.

"줄리아, 이것 봐. 너무 귀엽지 않니?"

봉오리상태의 양귀비여서 그냥 털만 가득했다. 언니는 말을 이었다.

"얘들은 속에 무슨 색의 꽃이 들어있는지 몰라. 이 귀여운 털모자가 벗겨져야 알 수 있어. 꽃이 피어나면 털모자는 휙 던져버리는데 그 모습이 웃기더라. 그리고 양귀비는 줄기가 참 예뻐. 길가에 핀 양귀비도 그렇게 줄기가 예뻐. 길에 핀 양비귀 꽃은 가까이서 보면 별로거든? 근데 멀리서 보면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는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몰라. 그게 사람을 홀리게 만들어. 사람들은 꽃을 볼 때 꽃의 얼굴만 보는데, 꽃들이 가진 줄기도 참 예쁜 거 알아?"

나는 언니의 말에 양귀비의 줄기를 보았다. 곡선이 참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언니, 저 이 양귀비 10송이 주세요."

"그래~ 예쁘게 잘 그려봐."


꽃집에서 파는 양귀비는 우리가 흔히 아는 그 마약성 양귀비랑은 다른 품종이라서 꽃집에서 구입할 때 안심해도 된다. 양귀비는 봉오리에서 꽃이 피는 과정이 매력적인데 보송보송한 털모자를 쓰고 숨어있던 아이는 어느새 털모자를 벗고 모습을 드러낸다.


그 모습은 애벌레가 번데기 상태였다가 갓 태어난 나비처럼 구겨진 꽃이 드러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나비의 날개가 활짝 피듯 구겨져있던 양귀비의 꽃도 점차 활짝 피어난다.



나는 이런 양귀비꽃을 그림에 담았다. 보송보송한 털이 가득한 봉오리와 줄기, 그리고 피어있는 꽃잎, 그 안에 숨어있는 꽃술.... 색연필로 털과 꽃술을 한 올, 한 올 그리는 과정은 인내심이 필요했다. 색연필을 뾰족하게 깎아서 끝부분을 쓴다. 그러면 선이 가늘게 나오는데 이 방법이 하늘하늘한 꽃잎과 얇은 털을 표현하기에 적당했다.


그리는 과정

이 아이들을 그리면서 계속 머릿속을 채우는 생각은 '줄기의 곡선이 참 아름답다'였다. 문득, 마리 언니의 말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꽃을 볼 때 꽃의 얼굴만 보는데, 꽃들이 가진 줄기도 참 예쁜 거 알아?


줄기의 곡선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이 만들어낸다. 식물은 태양의 빛을 바라보며 고개를 돌린다. 아름답게 자연적으로 만들어지는 이 곡선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생각해 보니까 나도 평소에 꽃의 줄기에 관심을 둔 적이 없었다. 어쩌면 사람들의 시선은 쉽게 눈에 들어오는 것들에게 가고 그 안에 머물러 있을지도 모른다. 화려한 꽃의 얼굴에 가려 눈에 띄지 않는 줄기나 잎사귀의 매력은 숨어있다. 사람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얼핏 봐도 쉽게 보이는 외모나 치장한 차림새 등은 그 사람의 내면이 어떤지는 숨겨져 있다. 늑대의 탈을 쓴 양일 수도 있고, 양의 탈을 쓴 늑대일 수도 있다. 우리는 사람에게서조차 겉모습에 현혹된다. 꽃을 볼 때 줄기와 잎사귀는 잊은 채 꽃의 얼굴만 보는 것처럼.


양귀비를 그리는 과정은 줄기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 아름다운 경험이었다.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처럼 줄기의 곡선이 아름다운 꽃이 좋아졌다.


꽃양귀비 (종이에 색연필, 2018. 김예빈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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