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에 대한 다른 시각을 알려준 마리언니
꽃을 그리는 나의 여정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있다. 바로 ‘Mari'꽃집에서 꽃을 가꾸고 전하는 플로리스트 언니. 나는 그녀를 '마리 언니'라고 부르는데, 그녀와 나눈 소소한 대화와 웃음은 나를 언제나 행복해지는 꽃의 세계로 안내했다. 어쩌면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꽃을 그리는 게 즐거워진 건 마리언니 덕분일지도 모른다. 항상 갈 때마다 커피를 사들고 가서 함께 꽃수다를 떨며 우리는 둘 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데, 마리언니가 얼마나 꽃을 사랑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꽃일을 사랑하는지는 언니와의 대화 속에서 매번 느끼게 되고 나 또한 상상력이 피어난다.
"줄리아, 얘 좀 봐~ 레이스치마를 입은 소녀 같지?"
( 당시 내가 줄리아라는 예명으로 활동 중이어서 언니는 나를 그렇게 불렀다)
"어? 생각 못했는데 정말 레이스치마 같네요!"
어떤 날에는,
"이 장미 색깔 좀 봐. 어쩜 이렇게 귀부인 같을까~"
또 어떤 날에는 천일홍꽃 한 움큼을 보여주며
"줄리아, 이거 너무 귀엽지? 꼭 요정들이 들고 다니는 가방 같잖아?"
마리 언니가 꽃을 대하는 마음과 언니의 상상력이 가득한 표현은 나에게 다른 시각으로 꽃을 보게끔 해주고 꽃을 더 사랑하게 만들었다.
2018년 초 어느 날, 평소처럼 마리꽃집에 갔다.
"안녕하세요!"
"줄리아 왔어?"
나는 들고 간 커피 두 잔 중 하나를 언니에게 드렸다. 우리는 언제나 그렇듯 자연스럽게 커피를 마시면 꽃이야기를 했다.
"언니, 이건 프리지아네요?"
"아, 맞아. 이제 프리지아가 나올 시즌이거든. 예쁘지? 수줍은 아가씨들 같이 예뻐."
"네! 그런데 노란색만 있는 게 아니라 보라색도 있는 건 처음 봐요."
"나도~ 노란색, 흰색, 주황색은 봤는데 보라도 있더라."
"흰색이랑 주황색도 있구나. 노란색만 있는 줄 알았어요."
"거의 다 노랑만 있는 줄 알고 노랑만 찾지. 근데 향도 색깔별로 다르다?"
"그래요? 몰랐어요. 신기해요."
언니의 말에 나는 향을 맡아보았다. 내가 아는 그 프리지아향이긴 한데 색깔마다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언니, 오늘은 저 프리지아 가져갈래요."
"그래~ 그림으로 그릴거지? 어떤 아이들이 예쁜지 직접 골라봐."
프리지아 꽃들 사이에서 한 송이를 골라 들었을 때,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화사한 노란빛은 마치 햇살이 꽃잎 위에 머무는 듯했다. 다른 어떤 꽃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특유의 생기와 따뜻함이 프리지아 안에 담겨 있었다. 그러다 어떤 한 송이가 내 시선을 붙잡았다.
"언니, 얘는 줄기가 왜 이렇게 S모양으로 휘었죠? 특이해요."
"어머 그러게, 걔는 화형이 신기하게 생겼네?"
"이렇게 특이해서 더 예쁜 것 같아요. 얘는 꼭 가져갈래요."
"그래~ 그렇게 해~"
나는 그렇게 꽃을 고르고 언니와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프리지아 그려봐야지.'
특이한 화형의 보라프리지아 1송이와 화사한 노란프리지아 1송이로 구도를 잡았다. 나머지는 꽃병에 꽂아두었다. 보라색 노란색으로 물든 향기가 가득했다. 종이 위에 꽃잎 한 겹 한 겹을 색연필로 촘촘하게 결을 쌓았다.
그림을 그리면서 이 보라색의 프리지아는 참 독특하단 생각을 했다. 지금껏 봐온 프리지아는 다 ㄱ같은 형태로 휘어있는데 이 보라색 프리지아는 S 같은 형태라서 오히려 그게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그리는 과정이 더 재미있었다. 그리는 동안 프리지아는 향기와 색감으로 나를 감싸며, 행복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렇게 여린 꽃 속에 담긴 소중한 순간들은 꽃 그려낼 때마다 내 삶을 더 환하게 밝혀준다.
2020년, 우연히 네이버밴드 활동을 하다가 어떤 글의 댓글에서 낯익은 그림을 발견했다.
'어? 저거 내 그림인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그림이 밴드스티커로 만들어져 있었다.
당혹스러운 마음으로 마리언니에게도 카톡으로 보여줬다.
"언니, 이거 예전에 우리 그 프리지아 맞잖아? 저 보라프리지아 그때 그거."
"응, 그거 맞아."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내 그림 도용당한 것 같아요. 나는 한 적이 없는데 저게 네이버밴드 스티커로 만들어져 있더라고."
언니는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 줄리아. 이게 무슨 일이야? 맞지. 저 보라색 화형 독특해서 기억난다. 그리고 난 내가 팔았던 꽃은 다 기억해. 그때 그 꽃 맞아."
그 해 나는 코로나 때문에 강의도 못하는 상황이라 힘든 시기였고 발목 부상으로 깁스도 해서 경제적으로도 몸도 마음도 힘든 상태였다. 이 일은 그런 나를 더 힘들게 했다. 결국 나는 저작권 침해 고소를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내 그림을 도용한 그 사람은 전혀 반성하지 않고 나 때문에 힘들다며 내 탓을 해서 그런 태도에 나는 더 힘들었다. 법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6개월이 걸렸다. 그 긴 시간동안 내 그림의 가치를 되새기며 나 자신을 다독였다. 결과는 그 사람이 초범이라 집행유예로 끝났지만 그래도 처벌은 된거니까 괜찮다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남들에게는 그저 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색연필이라는 재료의 선입견 때문에 별거 아닌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그린 모든 꽃들에는 그것을 그리게 된 이야기가 있다. 그날 마리언니와 함께 프리지아를 고르던 대화, 향기 속에서 느꼈던 작은 행복들이 담겨 있다. 이런 나의 추억과 기억은, 누군가에게도 그 꽃을 바라보며 떠올릴 수 있는 소중한 기억이 되길 바란다. 나에게는 한 장의 그림이 그냥 꽃이 아니라, 누군가의 추억과 이야기를 담아낸 창문 같은 존재인 것이다. 창문을 열면 그날의 풍경이 보이는 것 같은 그런 느낌.
다행히도 나의 프리지아 그림은 마음 아픈 이슈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좋은 분을 만나 좋은 운명으로 향했다. 그림이 머무는 곳에 프리지아의 화사함이 가득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