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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치유의 반복

핏빛 파도가 지나간 자리

by 자명

아주 많이 힘든 날이었다. 독하고 독해서 잡초처럼 밟혀도 다시 살아나고, 오뚝이처럼 잘 일어나는 나였지만, 그날은 정말 마음이 무너질 듯 무거웠다. 술에 취해있었다. 바다를 그리려고 푸르름을 담아내려던 캔버스를 보며 술을 마셨다. 텅 빈 정신으로 붓을 들었다. 그러다 문득 서러워졌고 화가 났다. 빨간 물감을 종이컵에 풀어서 농도를 맞추기 시작했다. '이거 보다 더 피 같았으면 좋겠어'라는 생각을 하면서 최대한 핏물 같은 색을 만들어냈다. 피가 응고된 느낌을 연출하기 위해 덩어리를 일부러 다 풀지 않고 그대로 캔버스에 천천히 부었다. 피가 흐르듯 고통이 흐르는 느낌을 원했다. 내가 많이 아픈 만큼 그림이 많이 아파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 날, 술이 깨고 조금 괜찮아졌다. 전 날에 난리법석을 떨어놓은 그림을 보았다. 조금 괜찮아진 마음을 얹고 싶었다. 이전에 덮은 빨간색도 이번에 덮는 흰색도 물감이 흐르는 강약을 위해 흘려지는 속도와 손에서의 힘조절이 중요했다. 흰색 물감을 캔버스에 흘리며 천천히 위로를 얹었다.

고통과 치유의 반복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2019. 김예빈 作)

이번 작업의 야광은 치유의 빛이다. 어둠 속에서 빛을 내며 치유한다. 바닷속에 고통과 치유를 다 담았다.


인생이라는 건 때때로 고통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 고통의 시간은 계속 머물지는 않는다. 힘든 시간은 지나가려고 온다는 말처럼 시간이 약이 되며 어느 순간 치유되기도 한다. 삶은 고통과 치유가 물방울처럼, 파도처럼, 계속 반복된다. 어쩌면 그것 자체로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야광 그림이라서 밝은 곳에서 볼 수 있는 모습과 어두운 곳에서 보이는 모습이 하나에 담겨 있기에 위의 첨부 이미지 2장이 그림 한 점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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