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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Mar 05. 2023

솔직히 날로 먹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인생은 그렇지 않지


오랜 기간 아이들을 만나 진로진학 지도를 해 오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이것이었다.

- 분명 공부를 했는데 성적이 안 나와요!

뻔한 말이다. 그럼 나의 대답도 대체로 뻔해진다. 

- 그걸로는 부족했나 보지.

아이의 얼굴이 어쩐지 붉어진다. 

- 아니에요! 열심히 했어요!

이때 한 번 더 뻔한 답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 다른 아이들이 더 열심히 했나 보지. 

- 아니라니까요옭!!!


하지만 방금과 같은 대화는 내 성격상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아니, 한 번쯤은 있었으려나. 아무튼 현실에서 저런 패턴으로 대화를 하다가는 상담이고 뭐고 파국으로 치닫기가 십상.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아무튼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옳은 말'이 꼭 '맞는 말'은 아니고, '맞는 말'이 꼭 '약'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깊이 느끼고 있다. 물론, 성향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정신이 번쩍 들게 콕 찔러 주는 말이 살이 되고 피가 되기도 하겠지만 그게 누구일지 어느 타이밍이 그러할지 나는 잘 모르겠더라. 그건 말하는 나뿐만이 아니라 듣는 나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창 속으로는 곪아 들어가면서도 겉으로는 아주 괜찮은 척 당당하게 사는 척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십 대 중반. 하는 일마다 이게 아니야, 내가 생각하는 나는 이렇지 않아, 이건 내 길이 아니야 하면서 돌아 나오던 그때 아무에게도 말 못 하던 내 속내를 한눈에 들여다 보고 독침 같은 말을 해 준 친구가 있었다. 그때 내 통장 잔고는 내 또래 직장인이 한 달 열심히 일하면 받을 수 있는 월급 정도였고, 그게 내가 그때까지 살면서 벌어들인 수입의 전부였다. A4 용지를 앞에 놓고 내 나이 27과 내 통장 잔고를 숫자로 쓴 다음 펜을 놓은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태주야. 27년 동안 이게 전부야. 근데 미안하지만, 이 정도 돈을 한 달 동안 버는 사람도 많아. 


아팠지만, 사실이었고 그게 내 현실이었다. 그 말을 하기까지 친구는 많이 고민했을 것이다. 솔직히 듣기에 아프고 싫은 말은 하는 사람도 아프고 싫다. 그러니까 안 하면 그만이다. 아무리 친구라 해도 남이고, 타인이다. 어떻게 살든 내가 알 바 아니지 하고 넘기면 끝이다. 내 인생도 복잡해 죽겠는데 언제 남의 인생을 걱정하고 있나. 그런데도 내가 살고 있는 집까지 찾아와 그 말을 하고 커피를 사 주고 돌아간 친구를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 한가운데가 뜨거워진다. 


내가 바로 정신을 차렸다면 참 멋진 드라마가 되었겠지만, 그 후로도 나는 2년을 더 헤매다가 서른 가까이 되었을 때에야 가까스로 그 암울했던 시기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시간 동안 무수히 많은 다짐을 하고 번복을 하고 주변 사람 눈치를 보고 아닌 척, 괜찮은 척, 씩씩한 척을 하며 살았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줄도 잘 몰랐다. 어딘가에 빠져 있으면 자기 객관화가 잘 안 되는 법이다. 지금 돌이켜 보니 그랬다는 것. 


그럼 지금은 어떤가 하면, 아주 크게 천지개벽하듯 달라진 것은 당연히 없다. 타고난 성정이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 휙휙 바뀐다면 인생이 참 작위적인 드라마로 느껴리리라. 그러나 인생은 생각보다 '진실된 드라마'이고 때로는 너무나 진실해서 '지루하고 답답하게' 느껴지는 드라마라는 것을 요즘 들어 더욱 느끼고 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솔직히 날로 먹고 싶을 때가 있다. 아니 많다. 


서두에 아이들 이야기를 왜 꺼냈느냐 하면 '공부'만큼 날로 먹고 싶은 것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하루에 공부를 정말 1분도 안 하다가 갑자기 정신이 들어서 한 30분 했다 치면, 당사자에게 그건 거의 환골탈태의 수준으로 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은근히 기대가 된다. 지금까지 하나도 안 했는데 이번에 이 정도 했으니 성적이 오르겠지? 물론 오를 수도 있겠지만 0분에서 30분 했다고 눈에 띄는 수직 상승 곡선을 그릴 리가... 없다. 


운 좋게 그렇다 해도 30분이 한 시간이 되고, 한 시간이 세 시간이 되면서 계속해서 이어져야 조금 기대해 볼까 말까 하다. 공부든 뭐든 아무튼 인생이라는 '진실된' 드라마 속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이제 겨우 10년 남짓 산 아이들에게 이런 '진리'를 들이대 봤자 '뻔한 소리'요, '개꼰대'요, '맞말이지만 짜증 난다'는 말만 들을 가능성이 높다. 나도 그랬으니까. 물론 소심해서 속으로만 그랬다. '아, 뭐래. 그래서 당신은요?'


그 '당신'이 된 지금의 나도 아주 별 볼 일 없이 그럭저럭 간신히 살아내는 중이다. 헬스장을 끊어 놓고 일주일에 한 번도 갈까 말까 하면서 아무튼 어서 빨리 몸짱은 되고 싶고, 인스타도 안 하면서 팔로워가 많은 건 부럽다. 소설을 안 쓴 지 몇 년째인지 이제는 감감하지만 아무튼 좋은 소설을 보면 나도 이런 걸 쓰고 싶다. 로또는 안 사는데 왜 로또 당첨자는 또 그렇게 부러운지. 죄다 날로 먹고 싶은 마음이다. 


겉으로 볼 때 그게 다 운 같고, 노력도 안 한 것 같고 타고나길 그렇게 타고난 것처럼 보이지만 세상에 그런 건 없다. 누군가가 혹은 무엇이 지금 잘 되고 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의 정당성 여부까지 내가 물고 뜯고 할 필요는 없다. 뭔가가 잘못되었다면 그에 응당한 결과가 있겠지. 인생이라는 드라마는 그렇게 구조화 되어 있을 것. 


이렇게 믿지 않으면, 자본주의 각자도생 AI의 시대가 몰고 올 광풍에 힘 없이 스르륵 쓰러지고 말 것 같다. 인간은 언제나 그랬듯 또 답을 찾아내겠지만 그 답이 누구에게나 모두 답이 될 지는 또 알 수가 없으므로, 나는 여전히 인생이라는 드라마가 줄 교훈에 대해 생각해 본다. 작정하고 교훈을 주려는 드라마는 올드하고 재미가 없지만, 다행히 인생은 그렇지가 않으니까. 


턱 관절에 이상이 생겨 병원에 다니는 중인데 매일매일 찜질을 하고 질긴 음식도 피하고 모로 누워 자지도 않아야 낫는다고 해서 어떻게 좀 '날로 낫는 방법 없을까' 하다가 몇 자 적어 본다. 확실한 건 하루 세 번은 찜질을 하고 부드러운 음식 위주로 먹고 똑바로 누워 잤더니 훨씬 좋아졌다는 것이다. 


그러게 뭐든 정성을 들여야 하는 법이야! 


엊그제 엄마 말씀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는데 진성으로 끄덕일 걸 그랬다. 뭐든 정성을 들일 것. 오늘의 교훈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정성 들여 찜질을 하고 자야겠다.  


* 덧: 

턱 관절에서 어느 날 갑자기 딱딱 소리가 난다, 입을 벌릴 때 아프다 하면 지체 없이 '턱 관절' 전문 병원으로 가세요. 그냥 치과 말고 '구강내과' 전문 치과가 있습니다. 저는 그냥 한 번 가 볼까 했다가 3개월째 다니는 중인데 많이 좋아졌어요. 습윤팩(수건을 물에 적셔서 꼭 짠 후 전자렌지에 1분)으로 찜질을 많이 하는 게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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