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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Oct 08. 2023

아무것도 아닌 나에게

편지를 쓰듯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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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새벽 다섯 시에 가까스로 잠들었다. 오늘 동틀 무렵에야 눈을 붙였고, 수면 패턴이 망했다는 얘기다. 번잡한 꿈 끝에 간신히 눈을 떴다. 아침 열 시였다. 딱히 뭘 하지 않으면서 시간 죽이기에 큰 재능이 있는 터라 열한 시 반이 되어서야 이불을 걷어차고 나왔다. 아침 아니, 점심으로 뭘 좀 먹어 볼까. 밖을 내다보니 날이 흐리다. 배가 고픈 건지 안 고픈 건지 잘 모르겠다. 요리 대회 결선 진출자처럼 심각하게 냉장고를 들여다보다가 불빛이 사라질 때 즈음 우유를 꺼내 컵에 따랐다. 차가운 우유는 시한폭탄이지만 집에 있으면 전혀 상관없지, 하하. 자다 일어나기만 했는데 정오가 된 기적을 맛보며 천천히 우유를 마셨다. 네스퀵을 사야겠다. (라떼는 '마일로'가 짱이었는데 막 운동선수 그려져 있고, 막 초록색에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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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K 선생님의 개인전에 다녀왔다. '습지'를 주제로 한 그림들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한동안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함께 소설 수업을 들은 다른 선생님들을, 전시회장에서 만났다. 인사동은 맑고 산뜻했다. 무슨 행사가 있는지 피카츄 모자를 쓴 사람들이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언젠가 간사이 국제공항에 갔을 때 커다란 피카츄 그림이 있어 그 앞에서 돌아가며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왜 우리들은 좋은 날이면 사진을 찍는 걸까. 


반갑고 애틋하게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어깨를 두르고. 또 조금은 어색하게. 사실 나는 사진을 찍는 순간이 어색해서 하나, 둘, 셋 할 때 자주 숨을 참는다. 그렇게 사진을 찍고 나면 옹기종기 머리를 맞대고 모여 사진을 들여다본다. 누군가는 미소가 어색하고 또 다른 이는 눈을 감았다. 깔깔대며 다시 찍느니 어쩌니 하다가 분위기가 풀린다. 디지털카메라나 휴대폰 카메라가 보급되기 전에는 찍고 나면 그만이었다. 잘 나왔는지, 빛이 들어가진 않았는지, 렌즈를 손가락으로 가리지는 않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사진을 찍는 순간에 누가 지나가기라도 하면 반쪽만 나오기도 하고 그랬다. 그런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얼마나 신나고 즐거웠는지 '모른다'. 필름을 맡기고 기다리는 동안에는 또 왜 그리 설레던지. '사진 찾아왔다!' 하는 소리가 들리면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달려나가는 거다. 눈 감은 사진을 가리키며 놀리고, 잘 나온 사진은 다 같이 나누어 갖기로 약속하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몰랐다. 


때늦은 사진들을 깔깔대며 보는 일이, 그때는 그렇게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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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른 일 없이 하루가 흘렀다. 어제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고 몇 줄의 글을 끼적이고, 무협도 보았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무협을 좋아했다. 심지어는 강호를 떠도는 무인(武人)이 되겠다는 게 내 오랜 꿈이었다. 여섯 살 무렵 후뢰시맨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대신 품게 된 나름 진지한(?) 꿈이었는데,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열한 살 때는 혼자 무협을 쓰기도 했다. 내용은 기억도 잘 안 나거니와 기억이 나더라도 차마 말할 수가 없다. 다행히 중학생이 되고 스스로 그 원고를 찢어 폐기함으로써 후환을 없앴다. 그래도 내가 쓴 그 글이 혼자서 볼 땐 꽤 재미났는지(예?) 꿈도 꾸고 그랬다. 그 후로 다시는 무협을 쓰지 않았지만 강호에 대한 동경은 여전히 남아, 고교 시절 문집에 '다시 태어나면 꼭 고대 중국의 무술인'이 되겠다고 적었던 기억. (증거 있음) 


지금은 아쉽게도 그 꿈을 접었지만(대체 왜 아쉬워하는 건지?) 그런 게 참 재미있고 좋았다. 서유기, 봉신연의, 호소자, 황비홍... 판관 포청천 왕팬이었고 수호지와 삼국지를 탐독했다. 김용의 영웅문은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모았다. 고1 때 시험을 잘 봐 엄마가 뭐 갖고 싶은 건 없느냐고 물었을 때는 주저 없이 김용의 <청향비>를 골랐다. 닭갈비를 먹고 서점에 가서 <청향비>를 뿌듯하게 끼고 나온 저녁, 그 봄을 기억한다. 좋은데 어쩌겠나. 좋다는데 이유가 있나, 장사가 있나. 좋은 건 그냥 좋은 거지. 이번 가을에는 다시 한번 무협을 써 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오후를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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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는 어둠에도 무게가 실린다. 겹겹이 쌓이듯 가라앉는 오후. 오후는 그렇게 밤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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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는 마음이 좀 망가진 채로 산다. 가을에 내 마음은 조금 망가져 있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산다'는 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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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의 기일이 다가온다.


여기까지 쓰고 약속 시간이 다 되어 밖으로 나갔다. 옆 동네에 사는 희연 선생님이 어둠을 가르며 내 앞에 나타났다. 손에는 작고 귀여운 귤이 가득 담긴 봉투를 들고. 나는 귤 봉투를 강아지를 안듯 품고 희연 선생님과 같이 길을 걸었다. 발끝에서 어둠이 조심조심 물러났다. 우리는 버스 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며, 사는 일과 글을 쓰는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희연 선생님을 태운 버스가 멀리 사라져 가는 모습을 보다가 집으로 들어왔다. 제주도에서 왔다는 못난이 귤을 까먹으며 어둠 속에서도 희미한 빛을 찾아내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귤이 맛있다. 벗들을 만나러 갈 때 한 봉지 챙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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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 나에게 편지를 쓰는 기분으로 이 글을 썼다. 이 역시 사는 일 중 하나가 될까. 아마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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