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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Oct 10. 2023

망했다 싶어도 그냥 하기

내일 말고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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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는 오전에 운동을 마치겠다. 이왕이면 여덟 시에 가야지. 딱 한 시간 땀 쫙 빼고 오면 그날 하루가 아주 멋질 거야. 벌써 기대가 되는걸? 하하하! 


어젯밤 다짐이었고, 아침에 눈을 뜨니 열 시였다. 


그 와중에 알람은 아침 일곱 시 삼십 분에 기똥차게 울렸고, '클로밝! 꺼 줘!'를 외치며 다시 잠들었던 기억이 아련하게 남아 있다. (쓸데없는 아련함) 하, 미쳤군. 뒷머리를 북북 긁으며 재빨리 침대를 탈출했다. 싱크대 앞에 서서 물을 마시며 생각했다. 시작도 전에 망했군. 하지만 정말 망한 건가? 계획보다 조금 늦게 일어나기는 했지만(조금? 양심 어디?) 아직 오전이 두 시간이나 남았잖아? 긍정 회로를 돌려 보자. 자,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된다. 이건 선택의 문제이다. 그 선택에 따라 정말로 망했는지 아닌지가 결정된다. 


그윽하게 창밖을 바라보며 마치 '발렌타인 30년산'이라도 마시는 사람처럼 물을 홀짝였다. 오늘을 실패로 만들려면 운동을 안 가면 된다. 늦게 일어난 나를 자책하고, 내가 그렇지 뭐 하고 단정 지어주고, 내일로 다시 계획을 미루면 된다. 그리고 이 일의 반복. 이게 진짜 망하는 거고 실패하는 거겠지. (아니, 또 뭐 실패 좀 하면 어떤가!) 물을 다 마시고 귤 하나를 까먹고 요거트를 먹었다. 마음이 바뀌기 전에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운동 가방도 꺼내 놓았다. 도서관에 반납할 책 두 권을 챙기고 텀블러도 넣었다. 동선을 생각해 본다. 도서관에 책 반납 후 커피 한 잔 테이크아웃해서 헬스장으로 간다. 그사이 열한 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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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을 갔다. 오전 열한 시 반. 아직 오전이다. 앗싸,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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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반납한 책은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이다. 집 근처 도서관에 없어서 상호대차를 통해 빌렸다. 독서모임에서 '제2논문'의 발제를 맡았고 10월 초에 근사하게 해 냈다. ...는 뻥이다. 나쁘지는 않았지만 만족스럽지 않다. 철학서를 너무 오랜만에 접한 까닭일까? 잘 읽히지 않았고 몇 차례 다시 보아도 내 언어로 재구성하는 게 어려워 결국 좋은 질문을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 함께 이야기 나눠 보고픈 문장을 골라내고 이에 내 의견을 조금씩 덧붙여 설명하는 선에서 그쳤다. 위기감을 느끼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왔더니 정말로 위기에 봉착해 버린 느낌이다. 잘 해결해 봐야겠다. 


책을 반납하고 다시 한 권을 빌렸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이다. 예전에 추천을 받고 제목만 기록해 두었는데 눈에 띄어 들고 왔다. 정말 다정한 것이 살아남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이조년은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했다지만 그런 다정이라면 살면서 한 번쯤 품어 봐도 좋겠지. 너무나 많은 것들이 순식간에 태어나 순식간에 사라져 가는 현대에서 무엇 하나를 미치도록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다정하여 병까지 나 버린다는 게- 소설 같다. 그것도 판타지 소설. 하지만 인생에서 다정하게 사랑하는 일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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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일을 해야 한다. 하반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실행으로 옮기려니 쉽지가 않다.  왜 나는 불혹이 되어서도 여전히 구직 활동을 하고 있는 걸까? 답은 간단하다. 글을 쓰고 강의를 하는 것으로는 생계유지가 안 되니까. 그래도 또 어떻게든 살아왔다. 고정급을 포기하면서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 '나에 대한 이해'. 조직 생활을 벗어나자 시간이 허락되었고, 내가 나와만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할 게 없으니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생각을 했다. 그 생각들은 주로 글이 되었다. 때로 불안했지만 조직에 있다고 해서 평정심을 얻은 것도 아니었다. 장단이 있지만 30대의 대부분을 흘러 다니며 산 것에 만족한다. 자,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또 어떻게 살까? 


그걸 잘 모르겠다. 앞으로의 십 년이 어떻게 흘러갈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다. 하긴, 십 년 전의 나도 내가 이렇게 살 것이라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잘 살아남은 것을 보면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까? 그렇게 믿고 싶은 가을이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든 계속해서 읽고 쓰며 끝까지 살아남기를 바란다. 나에게 하는 당부이자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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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햇살이 좋았다. 친구들과 귤을 나누어 먹고 점심도 먹고 차도 마셨다. 내년 3월에 지수와 마라톤을 나가기로 했다. 5km가 있는 줄 알고 한다고 했는데 10km부터 있었다. 망했... 아니, 안 망했다. 지금부터 연습하면 된다. 오래 고민하다가 등록해 버렸다. 하여, 오늘 러닝머신에서 7분을 뛰고 23분을 걸었다. 차츰 늘려서 30분까지 가자. 그리고 50분, 1시간까지도 뛰어 보자. 친구들을 만나고 오니 힘이 생겼다. 너무 많은 말을 한 것 같아서 돌아오는 내내 미안했다. 반가워서 그랬다. 


그리고 회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제는 이 가을을 조금은 즐길 수 있을 것 같다고, 예전처럼 좋아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런 말들을 했다. 그게 고맙고 뭉클했다. 나도 그렇다. 비틀거리면서도 아무튼 살자고, 살아내자고 다짐하며 서로를 보았다. 우리들의 인연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걸까. 오래오래 살자. 그래서 늙어가는 얼굴들까지도 마음껏 사랑해 주자. 애틋하게 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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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어제를 보내고, 오늘은 마음을 내어 식사도 잘 챙겨 보았다. 양배추를 사서 찌고 밥을 싸서 먹었다. (마음을 낸 것임) 끼니를 잘 안 챙긴다고 하니 희연 선생님이 2주만 잘 챙겨 먹는 습관을 들여 보라고 했지. 배고프지 않아도 시간이 되면 뭔가를 먹었다. 뭔가 잘 안 되더라도 멈추지 않고 한다는 게 중요하다. 


그러니까, 망했다 싶어도 그냥 하기. 일단 그냥 해 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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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으면서 빈 벽을 보았다. 허전해서 무언가를 걸어 둘까 하던 벽이다. 그런데 빈 채로 두었더니 가을 햇살이 와서 걸렸다. 아름다워서 제목 배경으로 넣어 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벽, 이라 여긴 건 나뿐이었다. 바람도 다녀가고, 햇살도 걸리고, 음악도 스쳤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존재한다는 걸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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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사람들이 오래 살아남기를. 

병이 든 채로도 좋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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