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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Oct 18. 2023

이런 어른이 되어 버렸다

별수 없지,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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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인간>이라는 책이 있다.


나는 이 책을 작년 이맘때, 마음이 아주 슬프던 어느 날 저녁에 문득 사 버렸다. 이런 책이 있는 줄 몰랐고, 어떤 책인지는 더욱 몰랐지만 제목만 보고 덥석 집어 왔다. 집에 와 찬찬히 살펴보았다. 일본 작가들의 산문을 엮은 '세계산문선'. 한 편씩 읽기에 좋아 보였다. 한국 문학인들의 수필을 엮은 <모단 에쎄이>가 생각나는 책이었다.


첫 글은 나쓰메 소세키의 '자전거 일기'. 나쓰메 소세키가 어쩌다 런던에 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런던 하숙생이던 시절 자전거를 배우던 이야기이다. 지독한 향수병에 걸려 방에 틀어박혀 있던 그를 하숙집 주인이 반강제로 끌어내 자전거를 배우게 했다고. 뭔가 코믹한데 슬펐다. 원래 이런 게 재밌지. 흥흥 웃으며 읽었다. 그렇게 쭉 보나 싶었는데 몇 편을 못 가 책장에 꽂아 두고는 잊었다.


어느 순간 마음의 슬픔이 좀 가셨던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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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엊그제 갑자기 이 책이 눈에 띄어 다시 펼쳐 보고 있는데, 엄마께 전화가 왔다. 얘, 뭐 하니? 그냥 집에 있는데 왜용? 늬 오빠가 오늘 하루 휴가를 냈어. 점심으로 맛있는 거 사준다고 하는데 너도 올래?


몇 달을 뭔 프로젝트에 매여 있더니 드디어 마치고 휴가를 얻었나 보다. 엄마는 이번 주에 조카들을 보러 서울에 올라오신 참이었다. 겸사겸사 한 번 들르라는 걸 못 들은 척하고 집에만 있었는데 겨우 맛난 점심으로 날 유혹하시다니! 게다가 나는 지금 <슬픈 인간>이라는 고요하고도 섬세한 산문집을 읽느라 아주 매우 몹시 바쁜 와중이란 말입ㄴ... 결연히 입을 열었다.


몇 시까지 가면 되는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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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초밥 때문에 간 건 아니다. 진짜 정말 맹세코. 그냥 엄마가 한 번 오라고 하셨는데 안 간 것도 마음에 걸리고 또 아기들 본 지도 좀 된 것 같... 아니구나. 추석에 봤구나. 아니 근데 벌써 또 10월 중순이고 하니 한 3주는 지난 거 아닌가? (어허, 혀가 길기도 하구나 이놈!)


그래여. 초밥, 맛있잖아여.


나는 어느 순간 오빠네 동네 초밥집에 가서 앉아 있었다. 분명 1시간 전까지 <슬픈 인간>을 읽으며 분위기 잡고 있었는데. 뭐, 인생이 이런 거지. 사실 요새 오빠는 뭘 하며 사나 그런 것도 좀 궁금하긴 했다. 들어 봤자 모르겠지만 혹시 알지도 모르니까.


요새 뭐해?

나? 뭐 그냥 PT 자료 만들고 보고하고.

뭔 내용인데?

회사 프로젝트지 뭐.

아.


좋은 시도였다. 하긴 오빠도 내가 요새 뭘 하는지 잘 모를 테지. (사실 나도 모르겠음) 그냥 대충 알아서 잘 살고 있겠거니 하면서 응원이나 해 주는 거지. 우리는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점심을 먹었다. 그러다가 책 이야기가 나왔다. 오빠는 추리소설광인데 최근 추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대번에 물었다. 너 저번에 빌려 간 <환상의 여인>은 가져왔냐? 아니... 다 읽긴 했냐? 아니...... 초밥 생각에 달려오느라 완전히 잊었소이다. 그리고 요새 무협 소설 보느라 시간이 없어서용. 죄송.


-

밥만 먹고 그냥 달아나려는 나를, 엄마가 붙드셨다. 조금 있으면 아이들 오는데 얼굴만이라도 보고 가렴. 그럼, 그럴까요? 못 이기는 척 집까지 들어가 커피를 마시고 오빠가 사들인 새로운 추리소설들을 보고 있으려니 조카 율이와 린이가 뛰어들어왔다. 둘은 아주 귀여운 아가씨들이다. (고모 필터 주의) 어느새 열 살이 된 율이는 장래에 지질학자가 되어 '돌'을 연구하는 게 꿈이다. 보물 1호는 새 깃털(그사이 바뀌었을 수도 있음). 고모가 너의 진로 탐색에 뭔가 도움을 좀 주고 싶은데 지질학과 출신은 JYP밖에 모르겠어. 미안. 한편, 린이는 잠들기 전까지 공주 드레스를 입은 채 지낼 수 있는 여섯 살 꼬마. 예쁜 것들에 관심이 많고 호기심쟁이다. 얼마 전에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런 걸 물었다.


고모!

왜.

고모랑 엄마는 나이가 같잖아요.

그렇지.

근데 왜 언니라고 해요?

어? 어, 그건...


예리한 녀석. 내가 동갑인 제 엄마한테 언니, 언니 하는 소리를 듣고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렇지. 유치원에서는 비슷한 또래를 모아 놓고 다 친구들이라고 하니 나도 그래야 할 것 같은데 아니니까 이상했겠지. 아, 근데 뭐라고 해야 눈높이에 맞는 설명이 될까? 고민하다가 타이밍을 놓쳤다. 어, 그냥 부르는 말이야. 호칭이라고 하지. 버벅이며 대답했다. 이렇게 구리디 구린 설명을 듣고 린이는 아아- 하더니 놀이방으로 가 버렸다. 이런 질문을, 엄마 아빠들은 하루에 오천 개 정도씩은 받지 않을까? 그때마다 성심성의껏 답을 해 준다고 생각하면-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집으로 간다고 나서니 갑자기 린이가 힝 하며 달라붙었다. 원래 좀 깍쟁이라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내 손을 끌고 놀이방으로 가더니 여기에서 가만히 둘만 있자고 한다. (린아, 근데 고모는 가만히 혼자 있고 싶어) 아, 린이가 고모랑 있고 싶구나? 근데 고모가 오늘 일이 있어서 가야 해. 대신 나중에 또 올게. 정말요? 응. 언제요? 어... 10월 가기 전에 올게. 린이는 힝! 하더니 순순히 나를 놓아준다. 순식간에, 좀 나쁜 어른이 된 것 같다. 나도 '나중에'로 시작하는 약속들을 참 많이 듣고 자랐는데.


나중에, 나는 저런 어른은 되지 않을 거야.


하고 일기장에 썼던 기억도 나는 것 같고. (그래, 참 어렸었다) 하지만 용케도 저런 어른 아니, 이런 어른이 되어 버렸지. 후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어른의 세계를 이해하려면 아이도 어른이 되어야겠지. 내가 그랬던 것처럼.


린이는 샐쭉한 표정으로 제 아빠 품에 안겨 손을 흔들었다. 그게 마음에 걸려 저녁에 전화를 하니 수화기 너머로 꺄르륵 하는 린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이란. 나도 모르게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엄마, 나중에 또 간다고 했는데 린이가 기억할까요? 혹시 못 가면 서운해할까 봐. 엄마의 대답은 쿨했다. 뭐, 기억은 하겠지만 그렇다고 날짜를 세면서 기다리겠니? 쟤도 바쁘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명답이시네. 내가 여섯 살 인생을 얕잡아 봤네. 얼마나 심오하고 경이로우며 찬란한데, 매일매일이. 날마다 새로운 것들 투성이라서 몹시도 바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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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니 책상 위에 <슬픈 인간>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읽던 곳을 펼쳤다가 덮고는 책장에 꽂아 두었다.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이라는 책 옆이다. 오늘따라 참 찔리는 제목이군. 사실 이 책도 사 놓기만 하고 아직 다 읽지 못했다. (진정한 북 컬렉터의 면모랄까) 등화가친의 계절답게 천천히 하나씩 읽어 나가 보자. 근데 이제, 새로 산 무협 소설만 조금 더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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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를 견디기에 책만 한 것이 없다.  


저런 어른은 되고 싶지 않았던 한 꼬마는, 때때로 몰아닥치는 허무에 맞서 보고자 무협을 읽고 몇 줄의 글을 끼적이는 이런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라는 말은 여전히 내 사전에 남아 있다. 아무렴 어떤가.


각자의 방식으로 건너갈 뿐이다.

누구도 대신 건너 줄 수 없는 깊은 허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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