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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Oct 20. 2023

엄지가 새끼를 낳았다

아무도 모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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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가 새끼를 낳았다. 아무도 모르게.


오늘 아침, 가족 단톡방에 웬 사진 하나가 전송되었다. 비몽사몽한 가운데 눈을 가늘게 뜨고 유심히 봤다. 아주 어린 꼬물이 강아지 두 마리가 이불 위에서 뒤엉켜 자고 있었다. 우왁! 귀엽다! 그때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얘, 사진 봤니?

네! 엄청 귀엽네요!

엄지 애기야. 오늘 새벽에 두 마리 낳았어.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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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는 시골집에서 아빠 엄마랑 칠 년째 살고 있는 백구다. 1대 엄지가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엄지가 낳은 진도를 지극정성으로 키우셨는데 진도가 엄마 팔을 물어 크게 다치신 적이 있다. 진도는 야생성이 강한 강아지였다. 아기 때도 펄펄 날아다니더니 다 커서는 엄마를 자기 아래로 보았던 것 같다고, 아빠는 후회하며 말씀하셨다. 엄마가 병원에 가서 깁스를 하고 오신 날, 아빠는 진도를 다른 사람에게 보내셨다. 그러고는 절대, 다시는 강아지를 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엔가 뒷집 할머님께서 놀러 오셔서 그러셨단다.


저기유, 괜찮으믄 강아지 한 마리 데려가유.

어머, 새끼 낳았나 봐요?

다 주구 인제 두 마리 남았는듸 은제 한번 와서 보셔유.


엄마는 두 눈을 반짝였다. 아빠도 마음이 동한 눈치셨으나 괜히 딴청을 피우며 모른 척하셨다고. 우리 한번 가 봐요. 에이. 가 보자는 엄마의 말에 아빠는 싫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셨다. 그거 뭐, 키우면 또 여행도 못 가고(원래 안 가시면서) 귀찮고(새벽 네 시부터 돌보심), 괜히 신경만 쓰이고(너무 사랑하셔서)... 끝도 없이 이어지는 아빠의 말씀에 엄마가 단칼에 그러셨단다.


에그,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가서 딱 구경만 하고 옵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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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신각신하며 뒷집 할머님 댁에 갔더니 하얗고 오동통한 아기 백구 두 마리가 폴짝폴짝 뛰어오더라고. 쭈그리고 앉아서 우쭈쭈 하니 한 마리가 와서 폭 안겼단다. 두 분은 그렇게 엄지를 만났다. 잠깐만 보고 오는 거라며 마뜩잖은 얼굴로 떠난 아빠는 아기 백구를 아주 소중히 품에 안고 돌아오셨다. 저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집을 꺼내 깨끗이 닦고 이불도 깔고 밥그릇과 물그릇도 새로 마련하셨다. 아기들 먹는 사료도 사고.


새로 온 2대 엄지는 금방금방 컸다. 어찌나 순한지 잘 짖지도 않았다. 사람이 다가가면 납작 엎드려 꼬리를 살랑대며 깊은 눈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그래, 동물들의 눈은 참 깊은 데가 있다. 가끔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해서 마주 들여다보면 엄지는 슬그머니 눈을 피하고 고개를 숙였다. 손을 뻗어 쓰다듬으면 귀를 납작하게 접었다.  


그런 엄지가! 우리 몰래 아기를 가지고! 아기를 낳았다!


엄지의 아기들은 진한 갈색이었다. 엄지는 아기들을 지극정성으로 돌보았다. 두 분도 덩달아 분주해지셨다. 아빠는 급히 이불을 가져다 깔아주고 엄지에게는 고기를 삶아서 먹이셨다. 한숨 돌리고 나서 우리들은 용의견(?) 색출에 나섰다. 아니, 언놈(?)이 우리 엄지와! 그것도 아무도 모르게! 하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빠는 가끔 시골집까지 내려와 기웃대는 닥스훈트가 있다며 의심하셨지만 우리들은 모두 에이 설마- 했다. 그런데 색깔을 보면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강아지 사진을 다시 찬찬히 보았다. 이거 정말 좀 닮은 것 같기도 한데...? 좀 자라 봐야 알겠지? 아직 눈도 못 뜬 아기들이라 둘의 성별도 모르겠다고 하셨다. 우리들은 강아지들의 아빠 찾기는 그냥 포기하고 이름 짓기에 몰두했다.


검지와 약지 - 율이 의견

체리와 베리 - 린이 의견

초코와 커피 - 털 색깔이 닮아서

누룽이와 숭늉이 - 털 색깔이 닮아서

하늘이와 구름이 - 엄마 의견


나는 누룽이와 숭늉이를 밀었으나, 발음이 너무 어렵다는 엄마 말씀에 탈락했다. 내 주변에서도 반응이 가장 핫한 아이디어였는데, 아쉽게 됐다. 그래서 나는 다시 초코와 커피를 밀고 있다. 초코야, 커피야 하고 부를 생각만 해도 너무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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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 '왜 엄지에게 아기가 있는 걸 몰랐을까?'라며 자책했다. 두 분은 그것도 모르고 여행을 다녀왔다며 안타까워하셨다. 이웃들이 돌아가며 돌보아 주셨지만 주인만 했겠느냐며. 나도 마음이 짠했다. 하지만 정말 몰랐다. 두 마리여서 그랬을까? 1대 엄지가 일곱 마리를 낳았을 때는 누가 봐도 배가 볼록했는데 이번에는 정말 눈치도 못 챘다. 원래 날이 추워지면 엄지 털이 두꺼워지고 통통하게 살이 올라서 더 그랬나 보다. 밥을 많이 먹어도 여느 때처럼 월동 준비를 한다고만 여겼지 아기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아빠는 하루 종일 강아지들 옆에서 사시는 것 같다. 요새 일 거리도 별로 없고 해서 무료하게 지내시던 아빠의 목소리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낮에 전화를 거니 신이 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원래 1분 컷인 통화가 6분 54초나 이어졌다. 그중 6분 50초는 엄지와 강아지 이야기였다. 나머지 4초는 강아지 울음을 들려주셨다. 삐익, 삑 하고 낑낑대는 강아지들 소리가 들려왔다.


아빠의 겨울에 생각지도 못한 강아지들이 선물처럼 찾아왔다. 나도 무척이나 기쁘다.    


두 마리 모두 키우실 거예요? 하니 두 마리면 충분히 키우지 하셨다. 1대 엄지가 일곱 마리를 낳았을 때 한 마리만 남기고 모두 분양하셨더랬다. 한 마리씩 새로운 주인이 와서 데려갈 때마다 두 분은 아주 슬픈 얼굴로 기념사진을 찍으셨다. 두 마리인데 한 마리만 보내면 너무 슬퍼하지 않겠니? 엄지가요? 아니면 아기가? 이렇게 물으려다가 말았다. 언젠가 아빠는 동물들도 다 생각이 있다고 하셨다. 모든 생명들에게는 다 생각이 있다. 인간만 그런 게 아니다. 슬픈 건 엄지와 아기들 그리고 아빠와 엄마, 우리들 모두의 이야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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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통한 엉덩이를 씰룩이며 뛰어올 강아지들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엄지의 아기들이 어서 눈을 뜨고 폴짝폴짝 뛰어다녔으면 좋겠다. 보들보들한 털을 쓰다듬고 꼬옥 안아 주어야지. 그 꼬숩한 향기와 따끈한 체온으로 가을과 겨울을 넘어 봄까지 가자.


그래, 봄까지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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