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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Oct 16. 2023

1년 뒤, 나는 어디에 있을까?

질문에 답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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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글쓰기 좋은 질문 642>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영화감독, 작가, 저널리스트, 시인, 비평가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 35명이 공동 집필한 '글감' 642개를 묶은 것이다, 라고 책 뒤에 쓰여 있다. 아마도 이 문구를 보고 혹해서 사겠지, 나는. 여지없이 중고서점에서 샀고, 산 지는 몇 년 됐다. 살 때에는 아주 야무진 꿈을 꾸었다. 642개의 질문에 모두 답해 보리라는 원대한 포부였다. 그리고 짐작하다시피, 앞의 두어 질문에 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곧 잊었다. (그럼 그렇지)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어서 작업용으로 쓰는 책상 위에 줄곧 올려 두었다. 가끔 눈길이 닿을 때마다 괜히 찔려서 얼른 다른 곳을 보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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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뭘 써 볼까 하는데 문득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오호, 그래 이런 책이 있었지? 아무 곳이나 휙 펼쳐서 딱 나온 질문에 대해 한번 써 보자. 책을 집어 들고 심호흡을 했다. 왜 예전에 이런 책 있지 않았나? <질문의 책>이었나? 마음속으로 어떤 질문을 생각하고 아무 데나 책을 펼치면 그에 대한 답이 나오는 책. 가령, '제가 결혼을 할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던지면 답으로 '하던 일에나 집중하세요' 이런 게 나오고 막. (해 본 건 아닙니ㄷ...)


책을 펼쳤다. 앗, 이런! 한 페이지에 무려 4개의 질문이 있었다.


232 내가 가장 좋아하는 뉴스 앵커의 헤어스타일

233 지금부터 정확히 1년 뒤, 나는 어디에 있을까?

234 내가 가장 좋아하는 청바지

235 가장 마지막으로 내가 누군가를 속였을 때


232 / 요즘 뉴스를 잘 안 보긴 하는데요. 한국은 왠지 좀 다들 헤어스타일이 비슷한 것 같아서요.

234 / 청바지요? 제가 옷에 큰 관심이 없어서 그냥 하나 사면 무릎이 튀어나올 때까지 입는데용.......

235 / 오늘 점심에 라면 먹어 놓고 엄마한테는 밥 먹었다고 한 거요. (중2의 거짓말 같군)


아무래도 233번 질문이 제일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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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지금부터 정확히 1년 뒤, 나는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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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솔직히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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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계획형 인간이 아니다. 그렇다고 계획 무용론자도 아니다. 오히려 철저히 계획을 세우고 이를 하나하나 달성해 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부러워하는 편이다. 계획을 잘 못 세우기도 하거니와 계획대로 되지 않은 일들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다. 아니, 계획대로 된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면서 어쩌면 인간의 계획 자체를 그다지 못 믿게 된 것일 수도 있겠다. 음, 인간이라고 하면 너무 일반화 같으니 그냥 '내 계획'이라고 하자. 점차 내 계획을 못 믿게 되었다.


이동진 평론가의 블로그 소개 글이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 대로.'인 것을 본 적이 있다. 매우 공감한다. 물론 나는 하루를 성실하게 보내면 그 다음 날 약간 삐끗하는 경우가 아직 많지만- 대체로 성실하게 보내려고 애쓴다. 특히 나처럼 직업만 있고(있다고 할 수 있나 모르겠...) 직장이 없는 경우에는 성실하려 애쓰지 않으면 낭패를 보기가 십상이다.


가령, 정오까지 이불 속에 들어가 있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밥을 먹어도 안 먹어도 그만이다. 일이 없을 때는 일주일 동안 밖에 안 나가도 상관없다. 그런 고로,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잃기가 매우 쉽다. 그렇다면 오히려 계획형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게 말이다. 지금 일별, 월별 리스트를 짜서 하나씩 지우며 살아도 될까 말까 한데 무계획 라이프라니? 이런 표현은 좀 무책임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나는 꽤 오래전부터 '느낌'에 의거해 사는 중이다. 이게 대체 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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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느낌'이라는 것은 상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것이어서 뭐라고 딱 표현할 길이 없다. 조금 대중적인 말이 '촉'이려나? 나는 내 '촉' 그러니까 '느낌'을 믿고 산 지가 좀 되었다. 이건 지난 십오 년간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 분투해 온 나의 삶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이다.


아, 내가 지금 힘들구나.

아, 내가 지금 슬프구나.

아, 내가 지금 이 일이 괴롭구나.

아, 내가 지금 이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구나.

아, 내가 지금 이 일을 하고 싶지 않구나.

아, 내가 지금 침잠할 시간이 필요하구나.


내 마음을 예전보다 더 잘 알아차리게 된 이후로 나는 바깥으로 한없이 뻗어 있던 신경들을 조금은 거두어들일 수 있게 되었다. 아직 주변의 시선이나 평가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지만 (모범생으로 자란 아이들이 많이들 그러하듯이) 그래도 이전보다는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 쉽사리 주변에 휩쓸리거나 현재나 미래의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몰라서 걱정하다가 원치도 않는 시공간에 나를 놓아두는 일도 줄이게 되었다. 물론, 잘 안될 때가 더 많다. 하지만 노력 중이다. 내가 좀 더 마음을 두는 일에 시간과 노력을 쏟고, 내가 애틋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위해 살기로 마음먹었기에. 그리고 여전히, 이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싶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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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러기 위해 오늘을 또 살았다.


운동을 다녀왔고, 두 끼를 나쁘지 않게 챙겨 먹었고, 책을 읽었다. 글쓰기를 건너뛰고 싶었지만 결국 썼다. 잘 안되더라도 노력할 것이다. 1년 후에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할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오늘을 살면 내일에도 나는 존재할 것이고, 그렇게 1년이 흐르면 어디에선가 무엇으로든 살고 있겠지. 그리고 그때의 내가, 스스로가 원하는 나에 조금 더 가까우리라는 믿음. 그런 걸 가져 보는 밤이다.


나 같은 사람이 그저 하루를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렇게 허술하게 흐르는 내 하루에도, 누군가는 위안을 받고 또 힘을 내어 내일을 향해 걸어갈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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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도 그렇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그런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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