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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Oct 14. 2023

<이별의 푸가>에 연필을 대어 볼까

기록해 두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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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청라의 밍기 선생님댁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그런데 어제 저녁,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엄 선생님이 아무래도 너무 먼 길을 오가시는 것 같아서요. 저희가 서울로 갈게요. 다음 달 초 괜찮으시면 그때 만나요. 휴대폰을 내려놓고 창밖을 물끄러미 보았다. 쌀쌀한 가을날 저녁. 고개를 한 번 들 때마다 어둠이 짙어진다. 멀-리 점점이 이어지는 자동차 불빛들을 볼 때, 겨울 같다는 생각을 한다.


가을은 겨울을 좀 닮아 있다.


휴대폰을 들어 몇 번인가 메시지를 적었다가 지웠다. 밍기 선생님댁은 식구만 다섯이다. 우당탕탕 부산하게 움직일 식구들을 그려 보다가 내가 훌훌 다녀오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선생님은 이런 내 마음까지 미리 읽고 메시지 뒤에 덧붙이셨다. 서울 어머님 댁에 아이들 맡기고 우리 오붓하게 만나요. '오붓하게'라는 글자를 한참 바라본다. '홀가분하면서 아늑하고 정답게'라는 뜻이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단어가 사라지고 단 몇 단어만 살아남아야 한다면 '오붓하게'도 후보에 올릴 수 있을까?


적어도 돈, 자본, 부동산, 이익, 경쟁 이런 말들이 남지는 않겠지.   


11월 초에 만나기로 했다. 벌써 아늑하고 정다운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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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민이가 집에 왔다. 약속이 취소되어 집에 있다고 하니 여기까지 오겠단다. 얼마나 지났을까. 직접 끓인 국과 밥, 삶은 콩나물에 간장까지 만들어 소담하게도 담아 왔다. 전에는 김치를 담갔다며 바리바리 싸서 왔었다. 옆 동네지만 이래저래 하면 50분은 걸리는 거리. 뭘 이렇게 챙겨 왔어! 미안해서 타박을 하듯 말하면 민이의 대답은 늘 똑같다. 이거 맛있어서 갖고 온 거 아닌 거, 알지? 그냥 한 끼 이걸로 때우면 좋잖아. 귀찮다고 대충 먹지 말고. 국은 보온통에, 간장은 자그마한 락앤락에 담았다. 보온통을 열고 무슨 국이냐고 하니 잡국이란다. 그 말에 서로 빵 터졌다. 이게 민이의 매력이다.


1996년에 민이를 처음 만났다. 털털하고 유쾌한데 다정하기까지 해 민이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유머 감각이 어찌나 뛰어난지 하는 말마다 재치가 넘쳤다. 그건 지금도 여전하다. 오죽하면 민이가 빠진 모임은 재미가 없다고들 한다. 나도 십분 동의. 그런 칭찬을 하면 본인은 정작 쥐구멍에 숨고 싶어 한다. 숨긴 왜 숨어. 너의 유머 감각과 다정함을 만천하에 공개해야지. 그러면 야, 죽을래? 라는 협박이 돌아오기도 한다. 후후, 어린 날의 친구는 이런 게 좋지.


나는 나대로 무엇으로라도 좀 갚아 보려고 열심이다. (그래도 못 갚음) 귤, 천혜향, 커피를 바리바리 싸서 내놓았다. 서로 친정 엄마냐면서, 뭘 또 이렇게 쌌느냐며 마음에도 없는 타박들을 하다가 날이 저물었다. 먼 길을 걸어 배웅했다. 자연을 사랑하는 민이는 가는 내내 가을의 내음을 이야기했다. 풀 향이 좋다, 꽃이 예쁘다, 마음이 참 편안하다. 한 육십 즈음 되면 제주도 가서 살까. 민이의 말에 오십에 가라고 하니 유빈이 다 키우고 가야지 한다. 그래, 애기 다 키워야지. 우리 중 제일 먼저 아이를 낳은 민이는 유빈이를 벌써 열한 살까지 키워 놓았다. 말로는 늘 얼렁뚱땅 허술한 엄마라고 하지만 나는 안다. 민이는 사랑을 주는 사람이다. 그러면 됐지. 너무나 좋은 엄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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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이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스터디 카페에 들러 사물함을 정리했다. 무슨 책이 있는지조차 잊었는데, 꺼내고 보니 열 권은 족히 된다. '다 안 읽고 - 새 책 가져다 놓고 - 다 안 보고 - 다른 책 또 가져다 놓고'의 무한 반복. 이런 습관도 뭔가 병명 비슷한 게 있지 않을까? 장서병(藏書病), 북 콜렉팅 신드롬(Book Collecting Syndrome) 뭐 그런 거. 아무튼 낑낑대며 들고 와서 펼쳐 놓았다. 그중에 김진영 선생님의 <이별의 푸가>가 있었다. 집어 들어 휘리릭 넘겨 보는데 끝부분에 영수증 하나가 곱게 접혀 끼워져 있었다. 교보문고에서 책을 사고 받은 것이다. 흐릿해진 영수증을 유심히 보았다. 내가 산 게 아니다. 2019년 7월, 총 네 권의 책, 합계 52,000원.


이별의 푸가(양장본 Hard Cover)    

중학 수학 3(하)                           

천일문 입문(500 Sentences Intro)

영어 독해 완성 Level 1 (자이스토리)


이 책을 중고 서점에서 샀었나 보다. 까맣게 잊고 있었네. 나는 가만히 영수증을 들여다보다가 누구인지 모를, 전 주인의 하루가 그려져 빙긋이 웃고 말았다. 어느 여름날 저녁, 아이의 손을 잡고(어쩌면 사춘기라 데면데면한 채로) 서점에 갔겠지. 아이는 중3이겠다. 수학 문제집도 사고, 천일문 영어도 사고, 독해 문제집도 사야지. 요즘 책값이 비싸네 하고 한 마디 중얼거리며 아이가 필요하다는 건 어쨌든 다 담는다. 그러다가 엄마 책도 하나 넣었겠지. 그게 <이별의 푸가>라니. 마음이 괜히 일렁인다. 아이의 문제집을 사고 <이별의 푸가>를 읽고 카페에서 커피도 한 잔 마신다. 이건 어떻게 알았느냐면- 책 앞 속지에 '아메리카노'라고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다. 아니면, 엄마 혼자 와서 아이가 주문한 책을 사고 잠시 동안의 휴식을 즐기고 간 걸까.


어느 쪽이든 그날 하루가 참 행복했기를.


이제 아이는 스무 살 성인이 되었겠다. 그러고 보면 아이가 다 자라기까지의 시간이 얼마나 짧은가 싶다. 엄마는 18개월 차이 우리 남매를 키우면서 매일 기도하듯 생각했다고 한다. 오빠가 어서 두 돌이 넘기를, 두 돌만 지나기를. 지금 두 돌이 다 뭔가. 사십 돌도 넘었다. 시간이라는 게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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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지 않는 과거의 내가 <이별의 푸가> 어느 한 페이지 귀퉁이를 살짝 접어 놓았다. 평소라면 밑줄이 있을 텐데 그런 표시 없이 깨끗하다. 나는 어디가 마음에 들었던 걸까. 이 부분일까.  


그러나 당신은 떠나고, 이별의 곤비함만이 남았다. 당신은 부재해도 당신이 가르쳐준 사라져감의 행복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별의 푸가>, 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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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라에서 아이 셋을 데리고 올 밍기 선생님, 열한 살 아이를 키우는 민이 그리고 얼굴을 모르는 어느 여름날의 엄마까지- 기록해 두고 싶었다.


나는 내가 사랑을 잘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을 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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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별의 푸가>를 누구에게 보낼까. 형신이 제격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는 내 필기가 빼곡한 책을 좋아한다. 너무 지저분하게 읽었는데 어쩌지? 하면 아주 좋아! 하며 웃는다. 그렇다면 <이별의 푸가>에 연필을 대어 볼까.


그사이 가을의 얼굴은 점점 더 겨울을 닮아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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