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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Nov 16. 2023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나

<쾌걸보이 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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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무협 사랑의 시작은 '아지'였다.


그렇다. 만화 <쾌걸 조로>와 <쾌걸 근육맨 2세>, 드라마 <쾌걸 춘향> 전에 <쾌걸보이 아지>가 있었다. 엥? 그런 게 있었나? 제목 한번 참 그렇군!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네, 그런 게 있었어요. 무려 15편까지 비디오로 나온 '어린이 무협 시리즈'랍니다. 설마, 소장하고 있나요? 네?! 무슨 그런 질문을! 당연히 '네!'죠... (13편 하나가 집에 있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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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입학할 무렵이니 1990년대 극 초반이던 시절이다. 어느 날 집 근처에 비디오 대여점이 문을 열었다. 엄마는 매주 토요일 딱 한 번 비디오를 빌릴 수 있는 기회를 주셨고, 우리 남매는 공평하게 한 주 걸러 한 번씩 번차례로 자신이 원하는 비디오를 빌려 와 같이 보았다. 단, 조건은 1) 서로 원하지 않는 비디오라 해도 토 달지 않기, 2) 빌려 오면 무조건 같이 보기였다. 우리 남매는 원체 사이가 좋고 취향이 잘 맞아서 척! 하면 딱! 으로 매번 똑같이 원하는 비디오를 빌려 아주 즐거운 토요일 오후를 보낼 수 있었......


...을 리가 없잖아요! 취향이 달라도 어쩜 이렇게 다른지 나는 <슈퍼 홍길동>처럼 악의 무리를 처단하는 정의의 사도가 나오는 걸 좋아한 반면, 오빠는 <고인돌 가족 플린스톤> 류의 서양 만화를 좋아해서 서로 아주 질색을 했다. 특히 나는 한번 꽂히면 두 번이든 세 번이든 상관없이 똑같은 비디오를 매번 빌리려고 해서 오빠를 늘 분통 터지게 했다.


엄마아, 태주가 <쾌걸보이 아지> 2편을 또 빌렸어요오! 으허엉! 서로의 선택에 대해 토 달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비디오 가게에서는 인상만 쓰고 있다가 집에 와서 엄마한테 이른다. 그럼 엄마는 나에게 타이르듯 말씀하셨다. 태주야, 본 걸 또 보면 재미가 없지 않니? 다음에는 안 본 걸 빌리면 어떠니? 나는 그때에도 참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고.


엄마, 저는 본 걸 또 봐도 너무 재밌는데용?! (억울)


착하고 순했던 오빠는 그렇게 내 옆에서 이따금 분통을 터뜨리면서도 열심히 같이 봐 주었다. 그렇게 마음에는 썩 안 들지만 서로의 '취향을 존중'해 준 까닭에 지금도 사이가 괜찮은 편. 아무튼 그렇게 티격태격하면서도 나란히 앉아 보곤 했던 무협 시리즈들이 참 많다. 그런데 나는 그 어린 시절부터 무엇에 그렇게 이끌려 지금까지 이런 이야기들을 좋아하며 즐겨 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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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걸보이 아지>는 대만에서 만든 어린이용 무협 드라마로 한국에서는 <비드콤>이라는 회사에서 정식 수입해 비디오로 제작되었다. 대만의 한 방송국에서 1980년대 후반에 만들었다고 하니 제작 후 곧바로 한국에 들어온 셈이다. (비드콤에서는 <황금동자 소야>라는 또 하나의 대 명작을 출시한 바 있다)


스토리는 간단하다. 여협 '홍고'의 아들 '진아지'가 주인공. '간가보'로 대표되는 악의 무리를 처단하고 무림의 정의를 수호하는 이야기. 여기에 아지의 친구이자 무술 고수인 '이티'(민머리에 목이 길어지며 앉아서 이동하는 특이한 캐릭터)도 주조연급으로 나온다. 가물가물하지만 이티는 아마도 어떤 사연으로 모든 인연을 끊고 기이한 모습이 되어 숨어 살았던 것 같다. 하지만 결국 열 몇 살 된 아지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지. 이런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좋다. 어른과 아이가 편견 없이 친구가 되는 것.


충격적인 씬은 2탄에서 1대 아지가 간가보 일당의 폭탄 공격에 그만 불에 타 죽어 버린 것인데, 어떤 사연이었는지는 몰라도 아마 배우가 중도에 하차하게 되었나 보다. 그래도 그렇지. 아이들이 보는 드라마에서 온몸에 불이 붙어 땅바닥을 구르는 씬은 좀 잔인하지 않았나 싶다. 3편에서 죽은 아지를 살리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4편에서부터는 새로운 2대 아지가 나온다. 그때부터 흥미가 급격히 감소하였으나 의리로 보았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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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지나간 시간들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지금 보면 아주 말도 안 되는 씬들이 즐비하다. 어쩌면 저리 어설플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뭔가 어색한 소품들과 뚝뚝 끊기듯 급전환되는 장면, 입 모양과 자주 어긋나는 더빙 등 소위 '항마력'이 필요한 장면들도 꽤 많다. 하지만 제작 시기가 1980년대 후반임을 감안하면 제법 잘 만든 괜찮은 드라마라는 생각이 든다.


그 무렵 한창 인기를 끌던 <후뢰시맨>, <우뢰매>, <슈퍼 홍길동> 등 '대 명작들' 역시, 열악한 제작 환경과 기술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만들어 낸 작품이라는 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비록 날아다니는 씬에서는 배우들을 매단 줄이 다 보이고, 바위를 번쩍 들어 내던지는 씬에서는 스티로폼인 게 확연히 느껴지며, 폭발 씬에서는 누가 봐도 대단치 않은 불꽃이 푱푱 튀고 말지만- 바로 그 모든 장면들에서 어린이들은 흔히 열광했고 놀라워하며 이야기에 몰입했다.


이런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자랐다.


그러는 가운데, 선(善)이 어떠한 방식으로 고통받고 악(惡)이 어떻게 죗값을 치르는지 간접 경험할 수 있었다. 가끔 처절히 실패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성공하는 '권선징악'의 이치를,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주 잠시나마 그런 꿈도 품어 보았다. 나도 커서 착한 사람 편에 서는 정의의 사도가 되어야지! 그렇게 못 되더라도 적어도 악의 편에 서지는 말아야지! 은연중 다짐한 채로 어른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뻔하고 유치하지 않으냐고? 어른이 되어 지나간 날들을 보면 그렇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유치한 내용들을 기획하고 감독하고 연기한 어른들이 있었다. 이 작품을 보고 기뻐할 아이들을 생각하며, 어떤 한 아이의 꿈에 아주 조금은 기여한다는 마음으로 메가폰을 잡고 심혈을 기울여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낸 사람들. 이만큼 멋지고 훌륭한 일이 어디 그리 흔할까. 나는 여전히 그런 사람들이 참 멋있게 느껴진다. 남들이 은근히 비웃고 때로는 우습게 볼지라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진지하고 즐겁게 해 나가는 사람들. 나는 그게 멋이고 힙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게 힙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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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지막이다. 사실 <쾌걸보이 아지>가 내게 더 큰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인생의 한 문장을 남겨 주었기 때문이다. 오프닝 곡에 나오는 그 한 줄의 글이 현재의 나로 살도록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너무 미화된 기억일까.


씽씽씽 신난다 하늘을 나른다

핑핑핑 천하무적 수퍼전자 수퍼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나

우리의 친구 쾌걸보이 아지


씽씽씽 핑핑핑 변화무쌍 번개처럼

천하무적 쾌걸보이 아지


'씽씽씽 핑핑핑'이라니...! 이 맛깔나는 라임 좀 보소. '수퍼전자 수퍼검'은 지금도 약간 의문이긴 하다. 극 중에 아지의 무기로 '개구리 장갑'(칼을 죄다 먹어 버린다)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게 수퍼검 같지는 않다. 게다가 비디오 겉면에 보면 '수퍼보이 아지의 SF 모험 활극'이라거나 '21세기 과학무기로 무림의 세계를 지배하는 날으는 전자비법!'이라고 강렬하게 쓰여 있는데 정말 심오하고 거대하기가 이를 데 없는 표현이다. 하긴 그때는 정말로 21세기가 되면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여겼던 듯도 하다. <2020 원더키디>에도 우주복 입고 날아다니는 씬이 참 많이 나왔으니까. 그리고 드디어 그 문장이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나


두 번째 책 <배움의 배신>을 내고 쓴 작가 후기를, 나는 원래 이런 문장으로 시작했었다. 다분히 <쾌걸보이 아지> 오프닝 곡에서 영감 받은 시작이었달까.

나는 누구일까, 우리들은 모두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걸까 궁금해하던 어린이는 자라고 자라 이런 어른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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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런 어른이 되었다. 후기는 아래와 같이 이어진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럽게 놓아 버리거나 잊게 된다던 어린 날의 꿈과 호기심을, 나는 다 크고 나서도 끝내 놓을 수가 없었다. 잊히지도 않았다. 이미 지나온 시간들은 여전히 내 안에 머물며 문득문득 말을 걸어오곤 했다.

 

네가 원하던 어른이 되었니?

네가 살고 싶었던 하루를 살고 있니?

그래서 네가 누구인지 이제는 알게 되었니?


그 무엇에도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이런 어른’이 된 나는, 답을 찾고 싶어 무엇이든 배웠고 그 경험들을 글로 남겼다, 는 게 첫 번째 후기였는데 너무 길어서 짧게 다시 썼다. (지금 이 글도 너무 길어져서 마음이 조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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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일생일대의 질문을 던져 준 생애 최초의 무협 드라마로 인해 어쩌면 나는 또래보다 조금 더 진지하고 철학적인 문제들에 관심을 가진 아이로 자랐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타고난 기질과 천성이 원래 그런 걸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나는 이런 생각들을 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편하고 잘 맞았다. 그러면 되었지.


누구에게나 조금 쑥스럽고 한편으로는 애틋한 이런 기억이 하나쯤은 있을 테다. 무언가에 미쳐서 하루 종일 그 생각만 하고 그것만 보이고 그거면 다 되는 그런 시절의 사랑은 꽤나 맹목적이어서 골 때리는 순수가 있었다. 얼마 전 그런 글을 봤다. 어린 시절에 끊임없이 돌려 보았던 뭔가가 의외로 그 사람을 잘 설명해 준다고. 그렇다면 나는 <쾌걸보이 아지>가 시작이었다. 오빠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니 짧게 답이 왔다.


후뢰시맨.


하긴 지난번에 집에 놀러 가서 <후뢰시맨> 오프닝을 보며 낄낄댔던 기억이 나는 것도 같고.


나는 어린 날의 내 마음속을 파고들었던 그 문장에 대한 답을 아직 구하지 못했다. 어쩌면 영원히 못 구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괜찮다.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몰라도, 내가 왜 가고 있는지를 알면 끝내 마지막 날에 다다를 수 있을 것 같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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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기까지 용기가 필요했다. 뭐야, 호기롭게 시작해 놓고 왜 그래! 당당하라구! 시작해 버렸으니 어쩔 수 없어. 시작했으니, 다음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


여기까지 다 읽는 사람이 있을까? 있다면, 다음 글은 <판관 포청천>이라는 걸 알려 드립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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