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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May 13. 2021

어떤 풍경이었는지 나는 모르지만

부모님의 첫 만남에 관한 짧은 기록


1980년대 초 청량리에는 '동산다방'이 있었다고 한다.


청량리 동산다방. 그곳은 엄니와 아부지가 처음으로 만난 곳이다. 나는 우리 부모님이 '카프카'나 '앤티크', '나폴리' 혹은 '괴테'와 같은 이름의  뮤직 살롱에서 만나지 않고 '청량리' 그것도 '동산다방'에서 만났다는 사실이 제법 귀엽고 근사하게 느껴진다. 근사한 귀여움이랄까.


어떤 계절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곳이 어떤 풍경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내가 주워들은 몇 가지 일화들을 그러모아 하나로 만들어 보면 대략 이런 이야기가 되겠다.

 


1980년대를 목전에 두고 허 여사(외할머니)는 마음이 급했다. 스물다섯이 되도록(겨우 스물다섯이라고!) 아직 남자가 없는 네 번째 숙이(울 엄니) 때문이었다. 네 번째 숙이가 가야 다섯 번째 숙이(맙소사, '숙'이만 다섯이다)도 시집을 갈 수 있으므로(아니, 아무나 먼저 가면 어떠냐고) 허 여사는 넌지시 이곳저곳에 과년한 딸이 있다는 말을 넣어 본다. 그러던 중 허 여사 사촌의 누구의 누구 중 한 분이 자신의 사돈 집안 쪽에 이제 서른을 바라보는 점잖은 총각(울 아부지)이 있다는 말을 전해 온다. 무릎을 탁! 친(진짜 치셨는지는 모르겠다) 허 여사는 얼른 만날 날짜를 잡는다. 그때 막 직장생활 5년 차가 되었던 네 번째 숙이는 딱히 시집 갈 생각은 없었지만(이라고 내 맘대로 적어 본다) 사람이 괜찮다 하니 호기심 반 의구심 반으로 어쨌든 만나 보기로 한다.


당시 네 번째 숙이는 한 회사에서 타이피스트로 일하며 동료들 사이에서 '멋쟁이 미스 리'로 불리고 있었는데 인기도 나름대로 살짝 있었던 것 같다. 남몰래 미스 리를 흠모하던 한 직원이 어찌저찌 어렵게 고백을 했는데 그날이 마침 미스 리가 청첩장을 돌리던 날이었다, 라는 건 제법 흥미로운 (그리고 아마도 나만  아는) 일화다.  '어머, 어떡하죠... 저 다음 달에 결혼해요...' 라는 드라마틱한 대사를 날리자 그이는 '거... 거짓말...이죠?'라는 대사를 친 후 얼굴이 하얗게 질려 비틀거리며 나갔다고 하니 과연 진실은 저 너머에(아부지는 이 사실을 아시려나).


아무튼 그렇게 어찌어찌하야 시간은 흐르고 바야흐로 약속한 날이 되었다. 미스 리는 허 여사와 함께, 맞선을 보기로 한 점잖은 총각은 주선자인 형수님(지금의 큰어머니)과 함께 청량리에 나타나기로 했다. 허 여사의 등쌀에 못 이겨 이십 여 분 정도 넉넉히 나온 미스 리는 약속 장소에 거의 도착할 무렵 허 여사가 무슨 웃긴 이야기를 해서 깔깔거리며 크게 웃었다는데, 그때 멀리 점잖은 총각네가 벌써 나와 있는 걸 발견한 허 여사가 급히 입단속을 했다. '어머! 얘! 입 다물어라. 저기 나와 계신다.' 이쯤에서 궁금한 것은 대체 점잖은 총각은 언제부터 나와 있었던 것인가 하는 것. 칠순 잔치 주인공보다 먼저 식장에 도착해 있던 전례로 보아 삼십 분에서 한 시간은 일찍 도착했으리라는 게 정설.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주선자들까지 총 네 명이 여기 어디 근처로 갑시다 해서 간 곳이 아마도 동산다방이었으리라. 미스 리의 전언에 따르면 그날따라 그랬는지 다방은 아주 들뜨고 복잡하고 시끄러운 분위기였다는데 주선자들은 앉자마자 여기 그 얘기했던 총각... 여기 그 얘기했던 아가씨... 잘 얘기 나눠 봐요 하고는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고. 미스 리는 어쨌든 뭐라도 말을 붙여 봐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저렇게 말을 붙여 보는데 점잖은 총각은 미스 리 얼굴도 제대로 못 쳐다 보고 고개를 수그린 채 말없이 계속 웃기만 했다 한다. 게다가 뭐라고 답을 하는데 다방이 시끄러워서 잘 안 들렸다. 예? 네? 예? 계속 이러기도 민망해서 아,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다 보니 시간이 제법 흘러(대체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나누신 걸까 알 수 없다) 이제는 식사를 하러 갑시다 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미스 리가 뭘 먹으러 갈까요 하니 점잖은 총각은 '만둣국 먹으러 갈까요?'하고 잘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간신히 그렇게 제안을 했는데 그걸 듣고 미스 리는 속으로 깔깔 웃었다. 필시 누군가 그 얘기를 했나 보다. 아가씨가 만둣국을 좋아하고 잘 먹는다고. 나중에 알고 보니 허 여사가 상대편에 미스 리에 대한 이런저런 정보와 함께 몰래 사진 한 장까지 덥석 보내고 만 것이었다. 그걸 받아 본 점잖은 총각은 이미 만나기 전부터 미스 리에게 반해 정작 실제 만남에서는 얼굴도 제대로 못 쳐다본 것(...이라고 엄니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날이 뭐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그날 이후로 점잖은 총각은 매주 수요일 정오에 미스 리가 근무하는 직장으로 전화를 한 통씩 걸어 그 주 주말 데이트 약속을 잡았다는 것. 점잖은 총각이 지극히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엄청나게 용기를 낸 결과이다. 당시 미스 리 자리에는 직통 전화가 없어 꼭 다른 직원이 전화를 받았는데 한 번에 건네어 주는 법이 없이 점잖은 총각의 전화는 으레 놀림거리가 되곤 했으므로.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매주 수요일 전화를 걸어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만나 짜장면을 먹고 중국 영화를 보았다고 한다. 그때마다 돈을 낸 것은 미스 리 쪽이었는데 왜냐하면, 점잖은 총각은 그때 백수였기 때문이다.


백수에 수줍음 많고  말주변도 부족했던 점잖은 총각이, 나름 커리어 우먼에 밝고 활기찬 도시 여자 미스 리를 만나기까지 얼마만큼의 용기가 필요했을까. 미스 리는 점잖은 총각에게서 무엇을 발견했기에 탄탄한 직장을 때려치우고 서울에서 남쪽 끝 시골까지 따라가 살기 시작했던 것일까.


인연이란 참 오묘한 것 같다.

그렇게 미스 리와 점잖은 총각은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고 시간은 흘러 흘러 점잖은 총각은 여전히 내성적이고 수줍음 많은 할아버지가 되고, 미스 리는 여전히 밝고 활기찬 할머니가 되었으니. 스물다섯과 스물여덟에 만나 스물일곱과 서른에 결혼을 하고 올해로 각각 예순일곱과 일흔이 된 그 사이사이의 세월을 헤아려 보다가 몇 자 끼적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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