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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May 14. 2021

우리가 상처라고 부르는 것들

열두 살 그해 봄에 관한 짧은 기록



왜 좋은 과거가 좋은 미래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지, 과거의 오점들이 어떻게 미래의 발목을 잡는지 실감하는 요즘이다. 학폭 미투 사건으로 시끄러운 안팎을 돌아보다가 털어 버려도 이따금씩 생각이 나는, 어떤 기억들에 주목해 본다.


지우려고 해도 가끔씩 밀고 올라오는 '어떤 기억'을 우리는 상처라 부르는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칼질을 하다가 휙- 하고 손을 베어 버린 적이 있다. 얼른 나으라고 꽁꽁 싸매고 있었는데 영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동여맨 반창고가 날아가 버리고 맨손으로 하루를 보낸 적이 있는데 기가 막히게도, 그 순간부터 벤 곳이 아물기 시작했다. 상처를 드러내고 바람을 쏘이고 얼마간 더러운 것들도 묻으면서 비로소 재생이 시작된다는 것이, 신기했다. 어쩌면 상처라는 것은 그렇게 꺼내어 드러내고 소리 내어 이야기하며 서서히 회복으로 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아마도 용기이리라. 내 언어가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


글쎄, 모두가 똑같은 시공간을 지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의 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억울하게 모함을 당한 제2, 제3의 피해자가 나타나고, 그 때문에 미래를 저당 잡힌 사람들도 나올 수 있다. 확실히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그 일이 정말 사실이라면, 팩트에 기반한 고발이라면- 그렇다면, 기억이 약간 흐트러질 수는 있어도 완전히 틀리기는 어렵지 않을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비슷한 풍경이 반복될 때마다 깜짝 놀라며 그날의 일들을 반복 재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열두 살 때 서울로 전학 오면서 찬란하게 빛나던 어린 시절을 급히 마감했다. 쓸데없이 에너지가 넘쳐 헛짓거리도 많이 하고 엉뚱한 일들도 많이 벌였지만, 원래 어린애들은 그러면서 크는 법! (...이라고 큰소리쳐 본다.) 그네는 꼭 서서 타야 하고 뱅뱅이는 친구들이 소리를 꽥꽥 지를 정도로 빠르게 돌려줘야 맛이 나던 나는, 내 삶이 제법 신났었다. 인생에서 가장 인싸이던 시절이다. 단적으로, 서울로 오기 직전인 열한 살 생일 때 23명의 친구를 집으로 초대해 엄니를 기절초풍하게 만들었던 인싸력은 일 년 후 정전이 되듯 한순간에 0에 수렴해 버렸다. 아무도 오지 않고 아무 데도 가지 않았던 그해 봄에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그때부터 오만 이야기를 일기에다가 끼적거렸는데, 웬만하면 이런저런 상을 주던 시절이라 생활일기 대상이란 것도 몇 번인가 타 봤다. 지금 돌이켜 보면 얼굴이 화끈거리는 시 비슷한 것도 일기에다 주절거리곤 했는데 대체 왜 그랬을까. 주로 나는 왜 지금 여기에 있나, 나는 누구인가, 이게 다 무언가, 지나가 버린 옛 시절... 뭐 이런 이야기였다. (응원의 의미였겠지만 아무튼 그런 글을 읽고도 상을 주셨던 당시의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서울로 오면서부터 늘 거의 혼자였기 때문에 스스로 ‘마음 맞는 친구가 없다’고는 느꼈지만 그것을 큰 문제로 인식하지는 않았다. 그냥, 약간 겉도는 스타일이었고, 그런 생활도 나름대로 나한테 잘 맞았다고 할까. 아무튼 나쁘지 않았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바로 집으로 뛰어오고 아침이면 다시 학교에 가는 그런 단조로운 일상을 매일 반복했다. 학원도 다니지 않았다. 당시 대부분의 친구들이 학원에 다니며 그곳에서 맺은 친분을 매개로 다양한 정보를 주고받던 것으로 볼 때, 나는 여러 가지로 자발적 아싸(혹은 은따였을지도)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주부이던 엄니는 서울로 올라오며 생긴 빚 때문에 결혼 후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셨고, 나는 그렇게 점점 혼자만의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대부분의 시간을 그냥 흘려보냈다. 노트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그마저도 질리면 바깥을 내다보며. 그러다 보면 오빠가 왔고, 엄니가 오셨고, 저녁이 시작되곤 했다.


설상가상으로 그해 여름에 생리를 시작했고, 생리대가 준비된 날보다 아닌 날이 더 많았다. 하지만 반에서 생리대를 가진 아이를 찾기에 나는 너무 수줍었다. 점심시간에 몰래 집에 다녀오려다가 교문을 지키던 주번한테 걸려 번번이 실패했다. 왜 집에 가야 하느냐는, '참된' 주번의 질문에 맥없이 돌아서던 그해 여름은 괴롭고도 외로웠다. 그리고 마침내 성적마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수학은 나머지 공부를 해야 할 정도로 형편없어졌는데, 열두 살 때 담임선생님은 수학 시간이 되면 늘 일정량의 문제를 풀도록 시키고 먼저 다 한, 게다가 풀이도 완벽한 친구들이 다른 친구들의 답안을 채점하도록 시켰다. 그러면 소위 '채점자'로 선택된 아이들은 빨간펜을 들고 채점을 하러 다녔다. 빨간펜을 든 친구들이 돌아다니면 손을 들고 내 답안을 내미는 일이 나한테는 참 굴욕적으로 느껴졌다. 만약 그렇게 채점을 했는데 틀리면? 일정 점수 이하로 떨어진 아이들은 10개이고, 20개이고 더 많은 문제를 숙제로 풀어가야 했다. 그래서 난 늘 숙제가 많았다. 그때부터 수학을 '정말로' 싫어하게 된 것 같다. 원래도 딱히 호감 있는 과목은 아니었지만, 수학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렇게 나는 점점 더 수줍고 소극적인 데다가 어리숙한 아이로 변모해 갔다. 그것은 참 순식간이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딸내미가 나머지 공부를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신 엄니는 나를 집 앞 보습학원에 보내셨다. 친구도 만나고 공부도 하라고. 하지만 지금도 멀티가 안 되는데 그때라고 되었겠나. (친구만 만났다...) 그곳은 나쁘지 않았지만 공부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이래서 학원은 본인이 필요성을 느낄 때 가야 합니다...) 특히 그때 만나 지금까지 연을 맺고 있는 J와는 주로 놀았던 기억밖에 없다. 유독 마음이 맞아 집에도 한 번인가 놀러 갔었는데, 불행히도 학교가 달랐다. 같은 학교였으면 깨 볶으며 좀 더 재밌게 지낼 수 있었을까?


그 후로도 몇 군데인가 이런저런 보습학원에 적을 두었지만, 나는 한두 달을 못 버티고 그만두곤 했다. (그때부터 퇴사 전문가의 싹이...) 그때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다시 어딘가로 공부하러 간다는 것이 이해되지가 않았다. 왜 또 공부를 해야 하지? 부족한 공부를 보충하니까 '보습학원'이었겠지만 알 게 뭐람. 나는 다 귀찮은 걸. 어쩌면 그때 소아 우울증 비슷한 게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서울에 와서도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하던 모범생 오빠도 괜히 꼴 보기 싫고, 나한테 밥 해 놓으라 시키고 저녁 늦게야 돌아오시는 엄니도 미웠다. 그런데 그런 말을 대놓고 하지는 못했다. 마음속에 쌓아둔 괴로움은 주로 노트에 풀어냈다.


겉돌긴 했지만 그래도 학교생활은 열심히 했다. 누가 어디에 불러주면 꼬박꼬박 나갔다. 뭐 해야 한다고 하면 빠지지는 않았다. 단체사진에서 주로 끄트머리에 서기는 했지만 아무튼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그러다가 몇 번인가. 누군가가 방과 후에 놀자고 제안한 것을 싫다고 거절했던가. 노래방인가 어디를 가자고 했는데 시끄러워서 나는 싫다고 했던 것 같다. 아닐 수도 있다. 무엇 때문인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아무튼 여느 친구들과는 좀 다른, 달리 한 언행 때문에 나는 한동안 은따가 되어 버렸다. 안 그래도 친구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학교생활은 뭐 그럭저럭 했는데,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


하나는 A가 내게 전화를 걸어 모월 모일 몇 시에 학교 운동장에 모여 놀기로 했는데 너도 나오라고 한 것. 고민하다가 모처럼이니 나가 볼까 하여 땡볕에 나갔는데 아무도 없고, 아무도 오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B가 나를 바보야, 라고 부르며 너 자꾸 그렇게 굴면 애들이 바보 취급해! 라고 알려준 것. 나는 그렇게 군다는 게 어떤 건지 몰랐지만 그냥 힛 웃고 말았다. 바보같이.


또 다른 하나는 C가 자기가 다니는 절에서 석가탄신일 기념 연등 행렬이 있다며 나도 오라고 하여 약속한 장소에서 오래 기다린 것. 정말 오래 기다렸다. 결국 C는 오지 않았고, 다음 날 왜 안 왔냐고 했더니 잊어버렸다고 했다.



이런 기억들쯤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까.


나는 바보가 아니었지만 바보라고 불리는 순간 바보가 되어 바보처럼 굴었고, 나는 그때까지 수학을 못하는 아이가 아니었지만 나머지 공부를 하는 순간 정말 나머지도 못 구하는 수학 바보가 되어 오래도록 고생했다. 나는 그 시절 타인의 부름말대로 살았던 것 같다. 아직 어리기도 했고, 마음 나눌 누군가도 없었으며 있다 해도 뭘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몰랐기 때문에. 할 말을 고르는 데도 한참이 걸렸고, 그러다 보면 새 날이 되어 다시 학교에 가야 했기 때문에.


김춘수 시인의 시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누군가에게 어떻게 불리는가에 따라 이렇게나 달라질 수 있다. 열두 살을 기점으로 팍 꺾여 버린 나를 되찾는 데 3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텅 빈 운동장을 바라볼 때 피어나는 어떤 기억을 떨쳐버리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가끔 그때 그 아이들은 나한테 왜 그랬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보지만 이내 그만둔다. 정말로 잊었을 수도 있고, 나름대로 조언이라고 한 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때의 기억으로 나는 꽤 오랫동안 주눅이 들었고 괴로웠으며 상심한 채 살았다. 겨우 이런 소소한 에피소드가 이러한데 물리적 폭력과 폭언은 얼마나 큰 상처일까.


지옥이라는 표현이 맞겠다.

어떠한 이유로든 학교폭력은 피해자에게 또 다른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사과와 회복의 절차가 시작되어야 한다. 상처 앞에서 늦은 건 없다. '미안하다'는 그 말 한 마디면 충분한 일이었다, 라는 작은 목소리들이 그것을 말해 준다.


숨겨서는 안 되고, 숨길 수도 없는 많은 일들 가운데서 정의가 끝까지 길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시대에 정의가 다 무어냐 한다면- 그럼에도 끝까지 말해야 하고 이야기되어야 하는 것들은 있게 마련이라고 굳이 다시 덧붙여 본다.



쓰고 나니 두렵다.

나는 서른 후반으로 접어들며 적당히 비겁해지고, 적당히 타협할 줄 아는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글을 쓸 때만 정의를 외치고, 나는 이렇다! 라고 목청껏 소리친다. 바보 같다. 상처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실은 나도 살아오며 어떤 이유로든 손쉽게 상처를 주고는 그만 잊었을 것이다. 상처를 주기만 하는 사람은 없듯이 상처를 받기만 하는 사람도 없으므로. 어쩌면 그렇게 상처를 주고받고 치유하는 과정을 우리는 산다, 라고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모든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내게 상처가 되었던 사람들까지도. 빈 말이 아니라 정말로 행복해서, 다시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스스로 행복할 줄 아는 사람들은 타인을 괴롭히지 않는다. 본인이 괴로워서 타인까지 괴롭히고 말았던 많은 어린 시절들이 이제는 좀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도 행복하자. 그래야 나 또한 타인은 물론, 내 자신을 괴롭히지 않겠지. 여전히 이런저런 격랑들에 휩쓸리고, 그때마다 처음인 것처럼 아파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나이 듦이 주는 이로움이리라.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주어진 몫을 다해 살기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살아내기로 다짐한 만큼 좀 더 힘을 내어 이 계절을 지나가 보자.


그러기 위해서, 여태껏 꼭 붙들고 있었던 어린 날의 손을 이제는 놓아줄 때가 된 것 같다. 놓아주고 놓여나면-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다. 가볍게, 그해 봄 열두 살의 내 손을 살며시 놓아 본다.


안녕. 수고 많았어. 고생했다.

잘 있어, 그해 봄 여름 가을 겨울.

나도 잘 살게. 언제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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