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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May 15. 2021

저의 아침은 오늘도 안녕합니다

지하철 1호선에 관한 짧은 기록



별다른 이야기는 아니다.

지하철 1호선 또 고장... 출근길 시민 불편 겪어... 이런 타이틀의 뉴스는 이미 식상해진 지 오래 아닌가. 슥- 읽고 나면 아, 그랬군. 또 1호선인가? 하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읽던 신문을 촥- 접어 넣거나 엄지를 재빠르게 튕겨 스마트폰 화면을 다음으로 넘겨 버릴 수 있는 정도랄까.


하지만 나는 오늘 하필이면 '또 고장 난' 바로 그 '지하철 1호선' 속의 '출근길 시민'이었기 때문에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를 제법 새로운 것인 양 슬쩍 남겨 놓는다.



인생에서 제일 처음 만난 지하철은 5호선이었다.

남도 구석에서 살다 올라온 나에게 지하철이란 '쓸데없이 복잡하고 필요 이상으로 오르락내리락해야 하지만, 일단 한번 타면 어떻게든 목적지에는 데려다주는' 그런 교통수단이었다. 걸핏하면 반대로 타고 심심하면 코앞에서 놓쳐 꽤나 애통방통해 했지만 돌이켜 보면, 나는 이 알 수 없는 미로 세계에 적잖이 의지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지하철 5호선은 한강을 뚫고 가는 노선으로 유명했는데, 그 때문인지 꽤 깊은 지하까지 내려가는 역이 많았다. 당시 살던 집에서 멀지 않은 한 역사에서는 귀신이 출몰했다고 해(한 가수의 뮤직비디오를 그 역에서 찍었는데 뮤비 장면 중 하나에 귀신이 나왔다는 소문이 있었다) 나는 그 역을 지날 때마다 귀를 막고 딴생각을 하려 애를 쓰곤 했다. 강을 뚫고 가는 그 역은 그래서인지 지날 때마다 슈위이이잉- 하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도 같았다. 토요 미스테리 극장에도 비슷한 에피소드가 나와서 아주 벌벌 떨며 보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그럼, 안 보면 될 것을... 굳이 또 난리를 쳐 가며 보는 편.)


대학 때는 이사를 가 지하철 3호선에 의존하며 살았다. 대화, 구파발, 불광, 종로를 지나 남으로 남으로 꺾여 내려가는 3호선에는, 내가 좋아하는 역사들이 많았다. 우선 경복궁역, 안국역, 종로3가역은 물론이고 절친 S가 다니던 동대입구역, 충무로역까지. 나의 20대는 이 노선을 부지런히 오가는 시간 속에서 시나브로 쌓여 갔다. 대학 졸업 후 온갖 방황 끝에 들어간 광화문의 A사를 다닐 때에도 나는 대부분을 경복궁역에서 내려 출퇴근했다. 환승역이 나올 때마다 울려 퍼지던 경쾌한 국악, 자주 눈에 띄던 내외국인 관광객들, 종로를 지나 위로 위로 올라갈 때 조금씩 달라져 가던 바깥의 풍경 그리고 역사 내의 사람들. 눈칫밥을 먹어 가면서도 어쩔 수 없이 다음 칸으로 다음 칸으로 계속해서 전진해야만 하는 삶들과 콩, 팥, 떡, 귀금속을 파느라 제 부피를 숨기고 바닥으로 바닥으로 납작하게 엎드려 있던 삶들까지.


오래되어 낡아만 가는 지하 역사에는 지상의 사람들은 자꾸만 잊어버리는 총천연색 삶들이 점점이 흩어져 살았다. 숨었다, 나타났다를 반복하며.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거나 북으로 북으로 올라가며.



독립하고, 20대도 다 지난 후에는 줄곧 1호선에 의지하며 살고 있다.

원래도 종로5가, 종로3가, 종각으로 이어지는 노선을 좋아해 자주 애용해 왔지만, 1호선 라인에 정착을 하고 나서부터는 뭐랄까. '애증'하며 '애용'하는 중이랄까. 오죽하면 <지하철 1호선>이라는 희곡과 연극이 다 있을까마는- 정말로, '지하철 1호선'에서는 유독 흥미로운 일들이 많이 벌어지는 것 같다. 1호선을 타며 나는 약간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고 할까. 언제나 조금씩 어긋나는 열차 도착 시간, 한 번 떠나면 도무지 도착할 줄 모르는 열차 소식에 좌절하며 20분 넘게 플랫폼을 서성이는 일 정도는 흥미로운 일 축에도 못 낄 것이다.


어느 날인가. 아주 날씨가 지구 종말이라도 올 듯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것이 마음까지 다 무거운 날이었다. 무슨 일로 엄니랑 종로를 갔는지? 엄니를 모시고 뭔가를 하고서는 예의 그 지하철 1호선에 나란히 앉아 복닥이며 가고 있는데, 한 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 하나가 책가방을 메고 천진하고 발랄하게 통통통 뛰듯이 걷듯이 하며 내가 앉은 칸을 쏘다니고 있는 것이다. 어라 싶어 예의 주시하고 있는데, 그 아이는 그냥 그렇게 돌아다니고만 있는 게 아니라 저쪽 편 자리에 앉은 사람들 얼굴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저리로 뛰어갔다가 다시 이쪽 편 사람들 얼굴을 하나하나 보며 또 이리로 뛰어오는 것이었다. 그렇게 점차 엄니와 내가 앉은 자리까지 아이는 다가오는데... 나는 일순 힉- 하고 겁을 먹었다. 엄니 편을 슬쩍 보니 엄니도 궁금하신지 힐끔거리며 아이를 보는 듯 안 보는 듯하시는데, 순간 아이가 엄니와 내 코앞까지 뛰어왔다. 나를 슥- 보고, 다시 엄니 얼굴을 슥- 본 아이가 히죽 웃더니 그런다.


이마에 '만' 자가 있네에~?

?!


응? 만? 10,000? 만이 뭐지? 이마에 만이 있다고?? 그런 생각을 할 새도 없이 후루룩 아이는 다음으로 다음으로 빙글빙글 웃으며 건너가고 있었다. 엄니, 지금 저 애가 뭐라고 한 거죠? 글쎄? 만? 만이 뭐니? 글쎄요? 만? 마안? 이마에 만 자라... 곰곰이 생각하는데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그래, 만(卍) 자였다. 흔히 불교를 뜻하는 그 표식, 卍. 이쯤에서 우리 엄니 이 여사님으로 말하자면, 한때 OO 불교대학 34기 졸업생으로 명성(우리 집에서만 소소하게)을 날리며 절에서 꾸준히 봉사도 하신, 나름대로 독실한 불교도셨다. (약간 과거형임에 주의) 지금은 농사일이 다망하시어(다 망하신 것 아님... 아직은... 띄어쓰기 주의) 예전처럼 자주는 못 가시지만 아무튼 그때까지만 해도 '이 보살님'으로 불리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던 때.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소름이 돋았다. 엄니... 불교요. 응? 불교? 불교 만 자 말이에요. 엄니도 순간 흠칫, 하시더니 고개를 끄덕이신다. 그때 엄니께서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날씨가 이런 날에는, 그럴 수 있어. 애기들은 영혼이 맑아서 더 그래. 날씨가, 이런 날에는, 그럴 수, 있다.


'이런 날'과 '그럴 수 있다'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던 생각은 그즈음에서 우뚝 멈추어 선 채로 있다가 날씨가 유독 '이런 날'에 가끔씩 생각이 난다. 지하철 1호선의 파란 의자를 볼 때, 개구쟁이처럼 히죽히죽 웃으며 열차에 올라타는 아이들을 볼 때 특히 더 그렇다. 그 아이는 잘 지내려나. 아이가 무탈하게 잘 크고 있기를. 이런 날에도 저런 날에도 어떤 날에도 무탈하게.



신호 고장으로 멈추어 선 1호선 때문에 1시간 반이면 가던 거리를 2시간 넘게 걸려 간 이야기를 하려다가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해 버렸다. 시작할 때의 의도와는 영 다른 길로 빠져 한참만에야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은 내 특기 중 하나이므로 그냥 그러려니 하며 마저 쓰자면.


나는 평소 지하철 1호선을 못 믿어서(의지하는 것과는 별개로) 열차를 세 번 놓쳐도 지각할 리 없는 시각에 집을 나선다. 1시간 반이면 넉넉히 회사에 도착하지만 일부러 2시간 10분 전 정도에 집을 나서는 것. 열차가 한 역에서 20분이나 정차한 오늘도 나는 좀 초조하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시간 안에 닿을 수 있었다. 물론, 원래의 코스대로 갈 수는 없었다. 20분 여만에 가까스로 출발한 열차가 어찌나 느릿느릿 가는지. 집을 나온 지 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출발선 근처를 떠돌고 있는 나를 보며 결심을 굳혔다. 1호선에서 당장 뛰어내려야 한다!


해서, 평소의 출근길 노선일랑 내팽개쳐 버리고, 오늘은 중간에 뛰어내려 다급히 6호선으로 갈아탔다. 6호선으로 가는 길이 오늘따라 어찌나 멀고 험하게 느껴지는지. 일군의 직장인들과 호흡을 맞춰 가며 기막히게 뛴 후에야 간신히 올라탈 수 있었다. 그 다음은 7호선이었다. 환승역에 내리자마자 다시 뜀박질. 요즘 운동한다고 밤마다 열심히 뛰고 있는데, 이런 때 요긴하게 써먹을 줄은. 7호선 후에는 대망의 분당선이 기다리고 있었고, 더 이상의 지연은 없을 줄 알았으나! 그런 날이 있다. 뭔가 자꾸 미묘하게 어긋나는 날. 분당선에서 한 중간쯤 갔는데 갑자기 스크린 도어 고장으로 또 6분간 정차를 했다. 회복 운전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기관사님의 다급하고 절절한 안내 방송 후 침묵의 시간은 흐르고, 나는 그렇게 8시 53분에 역에 내려 또 열심히 뛰었다. 오늘 다리에 근력 좀 붙었으려나. 8시 56분 건물 진입. 8시 57분 건물 내 복도 진입. 8시 58분 아침 인사.


한녕하세효오오...


누가 봐도 다들 안녕하시고 나만 안녕하지 못한 아침이었지만, 어쨌든 세이프했고 나는 자리에 앉았고, 다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제가 이렇게나 열심히 출근하고 있습니다. 네? 진짜 열심히 출근하고 있다고요. 네? 에너지를 출근길에 다 쏟아부은 회사원 1은 아침부터 배터리 부족을 알리는 몸뚱이를 간신히 모니터 앞에 앉히며 어렵게 시작한 하루를 '안녕히' 보내 본다.


지하철 1호선은 이렇게 저와 함께, 오늘도 안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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