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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May 12. 2021

괜히 그래 보고 싶어지는 것이지

양배추 인형에 관한 짧은 기록


짧은 글이 될 것 같다.


어린 시절 내게는 장난감 바구니가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커다란 빨래 바구니 같은 것인데 육각형 모양의 분홍색 바구니였다. 올해 육십 대 후반이 되신 엄니는 '당연하게도' 오빠에게는 파란색, 내게는 분홍색 바구니를 하사하셨다. 거기에는 장난감을 비롯한 온갖 잡동사니가 담겼으므로 '장난감 바구니'라고 하기보다는 그냥 '잡동사니 통'이나 '거의 쓰레기통'이라고 불러도 좋을 법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더욱 정신 사납게 구는 장난꾸러기였으므로, 내 바구니에 든 것 중 성한 것은 별로 없었다. 반동강 난 크레파스, 심이 빠져 버린 색연필, 부러진 모양자, 표지가 날아간 공책, 팔이 빠져 버린 마론인형, 눈알이 없어진 곰인형, 누구의 신발인지 모를 인형 신발, 녹슨 똑딱 핀, 늘어난 머리 방울... Fifth-Handed쯤 되는 누구의 누구의 누구의 누구가 준 인형들은 사실, 내 손에 오기 전 이미 거덜 난 상태였지만 난 그런 것도 좋아했다. 너무 좋아해서 마구 휘두르고 다녔다. 너무 좋으면 주체가 안 되는 것이, 아이들의 사랑법 아닌가. (물론, 어른도 주체가 안 될 수 있다...)


그렇게 주체를 못 하는 아이로 자라던 어느 날 내 손에 '양배추 인형'이 들어왔다. 서울에 살고 계시던 외할머니께서 사 주신 것으로 안다. 양배추 인형은 1988년 당시 유행의 최첨단을 달리던 핫 아이템이었다. 반짝 뜬 눈, 인디언 보조개가 쏘옥 들어간 볼, 한껏 웃고 있는 귀여운 입꼬리. 대. 흥. 분.


그 무렵 찍힌 사진들마다 양배추 인형이 등장한다. 머리도 양배추 인형을 따라 볶았는지 뽀글뽀글 볶은 채로. 얌전하게 안고 찍었으면 좋으련만.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인형에 표시하곤 했는지 인형은 늘- 약간 나가떨어진 채다. 너무 늦은 사과이지만 미안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시들해지고 말았는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아니면 갖다 버렸는지 양배추 인형은 사진에서 사라져 버리고 실제로도 실종되고 만다. 워낙 어렸을 때라 아, 그런 게 있었지 정도로만 희미하게 남은 기억. 어느 날엔가 그 기억의 끝을 좇다가 엄니께 여쭈어 본 적이 있다.


엄니.

왜.

그... 양배추 인형 있잖아요, 왜.

어, 있었지.

그거 어디 갔죠?

......


30년 만에 갑자기 양배추 인형의 안부가 궁금한 딸내미의 '정말 궁금한 표정'이 진짜일까 의심스레 들여다보시던 엄니는 그러셨다. 너 기억 안 나니? 네. 진짜? 네에. 기억 안 나는구나. 제가 버렸나요? 아니. 제가 잃어버렸나요? 아니 아니. 그럼, 그 아인 대체 어디로 갔죠?


사연인즉슨 이랬다.    


그날도 양배추 인형을 휘두르며 놀던 나는 끝내 양배추 인형의 모가지(라고 표현하셨다...)를 쑥 뽑아 버렸다. 그러고는 끼우려다 잘 안 되었는지(...라고 믿고 싶다) 내버려 두고 놀러 나갔다. 때마침 손주네 집에 와 계시던 할머니께서 손주가 놀다 팽개쳐 둔 꼬질꼬질한 양배추 인형을 발견! 원 애두... 쯧쯧... 하며 그 모가지를 세숫대야에 넣고 조물조물 빠신 다음에 긴 꼬챙이에 걸어 효수형 받은 죄인처럼 높이높이 달아 베란다에서  말리셨다고... 또 마침 베란다를 지나시던 엄니는 에그머니나! 모가지만 대롱거리고 있는, 화사하게 씻은 양배추 인형을 끌어내려 아무도 모르게 버리셨다나...


아니! 다시 끼워서 주시지요!


참으로 쓸모없고 의미 없는, 뒤늦은 항변. 엄니는 철이라고는 1g 없는 딸내미를 그시 바라보시다가 그러기에는 몸체도 너무 너덜너덜했다, 라고  말씀. 그래... 기억조차 못하는 내가 무슨  말이 있으리오. 양배추 인형아, 즐거웠다.  어린 날의 어떤 순간을 함께해 줘서 고마웠다. 목을 잡아   미안해. 어린 시절에는 흔히 그런  궁금하단다. 이건 빠지나  빠지나. 이걸 잡아 빼면 어떻게 될까. 다시  들어가면 망한다는  알면서도 괜히 그래 보고 싶어지는 것이지. 어린 날에는. 어쩌면 지금도, .


짧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길어졌다. 겨울날의 오후 같다. 짧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길다. 내가 산 지 다섯 해 되는 어떤 날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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