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름은> 영화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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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너의 이름은!'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다. 2017년 무렵으로 기억한다. 새해가 밝고 얼마 지나지 않은 겨울에 나는 이 영화를 보았다. 아니, 보았으나 보지 못했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2017년 겨울에 나는 자주 긴 잠을 잤다. 그렇게 끝도 없이 잠이 왔다. 상실에 대한 방어기제였을까. 나와 내 친구들은 이전 해에 갑작스레,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저마다 긴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후, 우리들은 몇몇씩 짝을 지어 여행을 떠났다. 나도 두 명의 친구와 함께 오사카와 교토로 짧은 여행길에 올랐다. 길 위에서 우리들은 자주 웃고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오롯한 시간을 보냈다.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 경우에는 떠남의 반복이 특효약이었다. 잠도 그중 하나는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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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에 나는 모처럼 활기찬 생활을 해 보겠다며 이 영화를 보았다. 응? 활기찬 생활과 영화라니? 별 건 아니다. 그냥 가장 이른 시간의 영화를 택해 예매해 놓고 그 시간에 맞추어 영화를 보러 가는 것. 다만, 가기 전에 주변 사람들에게 큰소리를 뻥뻥 쳐 놓는 것이 핵심이었다.
얘들아, 나 내일 <너의 이름은> 보러 간다.
오! 그 영화 요즘 핫하더라.
영화 좋지.
근데 오전 7시 50분 영화야.
어?
뭐라고?
왜 그런 선택을...
나는 할 수 있어. 꼭 볼 거다.
그냥 오후 걸로 해.
그래, 무리하지 마.
아니야, 해낼 거야.
응원... 한다...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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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알람이 울렸을 때 손가락이 본능적으로 '예매 취소'를 향하여 움직였으나 내가 또 누군가! 한다면 한다의 아이콘! 언행일치의 대표 주자! .....는 헛소리고, 호언장담으로 저질러 놓은 일 처리하기의 달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일어나 영화관으로 향했다. 그렇게 비몽사몽간에 발권을 하고 자리에 앉았는데 잠 기운 때문인지 아무리 두 눈을 부릅떠도 집중이 잘 안 됐다. 그래서 초반에 한 20분 보았나? 아차! 하는 순간 그만 꿈나라 기차를 타 버렸다. 그러고는 쾌속으로 질주. 아마 잡아탄 꿈나라 기차가 KTX였나 보다.
눈을 떠 보니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있었다.
아니, 이럴 거면 그냥 집에서 잘 걸 그랬지. 굳이 돈 내고 영화관에 앉아서 잔 사람이 돼 버렸다. 고등학교 때 단체 관람한 <진주만> 이후로 이런 경험은 오랜만이었다. 그렇게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고 그 후로 오랫동안 <너의 이름은>은 내 안에서 '본 것도, 보지 않은 것도 아닌' 애매한 영화로 남아 있었다.
이쯤에서 강조할 점은 절대 영화가 별로여서가 아니라는 것. 생활리듬이 엉망이 된 자가 굳이 이른 시간 영화를 택해 무리하다가 좋은 영화를 다 보지도 못하고 돈과 시간을 함께 날려먹은(내 특기) 뭐 그런 이야기.
그리고 어제 저녁에 TV를 돌리다가 이 영화가 리스트에 올라와 있는 것을 보았다. 잠깐 망설였다. 일단 옆에 놓아둔 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안주로 킵해 두었던 새우깡을 뜯었다. 볼까 어쩔까. 몇 번 다른 곳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와 재생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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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미츠하'라는 고교생 소녀와 '타키'라는 동갑내기 소년의 만남과 이별이 주된 내용. 다만 이들이 사는 곳이 각각 시골과 도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서로 다른 풍경을 보는 맛이 있고, 무엇보다 초반에는 둘의 몸이 바뀌는 흥미로운 서사가 첨가되어 몰입 포인트가 된다. (그런데 왜 영화관에서는 잔 거야! 어?)
그렇다면 제목의 '너의 이름은'이 의미하는 무엇일까? (*거의 스포 같지 않은 스포...일까.)
작품에서 두 주인공은 처음에 서로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몸이 바뀐 것도 그저 꿈이라 생각하며 초반에는 그 또래답게 '걍 즐기기로' 마음먹는다. 이 부분에서는 영화 <체인지>가 생각났다. <체인지>도 두 고교생 남녀 주인공의 몸이 바뀌는 데서 벌어지는 우당탕탕 스토리가 중심이다. (꽤 재밌습니다. 안 보신 분들은 한번 보세용.) <체인지>와 다른 점은 '타임 슬립'이라고 해야 하나. '시간'의 측면에서 다시 흥미로운 전개가 펼쳐진다. 이 부분은 얼핏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닮은 느낌. 하지만 분명히 다른 점은 '서로의 이름'에 대한 강조이다.
두 주인공은 끊임없이 서로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하며 상대가 '누구'인지 묻는다.
너는 누구야?
너의 이름은 뭐야?
듣고 기억하고 잊는다. 다시 떠올리고 기억하고 또 잊는다. 그렇게 살아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눈물이 차오르고 자신이 왜 우는지도 모른 채 운다. 잊었다는 사실만 희미하게 흔적으로 남았다. 그러니까, 분명 무언가를 잊었는데 무엇을 잊었는지 모른다. 답답하게도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만 계속해서 떠오른다. 여전히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 모른 채 시간이 흐르고 다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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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를 하지 않으면서 감상을 말하려니 쉽지가 않다. 아무튼 마무리를 해 보자면-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두 주인공이 서로에게 묻는 '너의 이름은'이라는 대사가 꼭 자기 자신에게 묻는 말로 들렸다. 표면적으로는 '너'의 이름을 묻고 있지만 이는 결국 '나'에 대한 진지한 탐구와 성찰로 이어진다는 것.
또 하나. 영화에서 반복되는 '잊음'과 '잊지 않음'의 서사는 커다란 은유로 읽혔다. 즉, 영화에서는 '혜성의 낙하와 한 마을의 운명'이라는 하나의 특수한 사건으로 압축되어 나오지만 사실 이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건 사고들에 대입될 수 있는 '보편 서사'로 기능한다. 때문에 관객들은 눈으로는 <너의 이름은>을 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개개인 혹은 한 사회가 경험한 여러 중대 사건들로 이를 확장해 사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개인의 서사가 보편성을 가지게 될 때, 하나의 사건이 특수성을 넘어 보편성으로 나아갈 때 사람들은 이에 공감하고 감동하며 오래오래 곱씹게 된다. 좋은 작품이 지니는 특징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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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다 기억하면 아마 지치고 고통받아 미쳐 버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지 말아야 하는 일들은 존재한다. 놓쳐서는 안 되는 것들을 놓쳤을 때, 결코 버려서는 안 될 가치들을 버렸을 때 우리는 어떤 미래와 마주하게 될까. 벌써 그 미래의 일부가 눈앞에 다가와 있는 듯하다.
영화가 끝나고 화면이 어두워진 다음 아주 오랫동안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갔다. 나는 음악이 끝나고 크레디트가 사라질 때까지 TV를 끄지 않았다. 음악 소리가 잦아들자 위층에서 아이들 소리가 들렸다. 평소에는 고요하기 이를 데 없는 집에 사람들이 왔나 보다. 나는 천천히 남은 맥주를 마시고 TV를 껐다.
너무 비관할 필요는 없겠다.
이런 작품들이 계속해서 나올 테니까. 어떻게 살 것이냐고 묻는 글과 책과 음악과 영화들이 끊임없이 발표될 테니까. 이 사회의 속도가 너무 빨라 두려워질 때에는 내게 질문을 던지는 작품들을 통해 한 템포 쉬어 가자. 그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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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여행을 떠났던 친구도 몇 년 후 멀리 떠났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성한 것은 반드시 멸한다지만- 아무리 반복해 경험해도 고통스럽고 괴로운 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좋았던 기억들로 남은 날들을 채우며 살아가야지. 그래서 사는 동안 좋은 기억을 많이 쌓으라고 하나 보다. <너의 이름은>에서 미츠하와 타키도 그랬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일단 즐겨 보자, 라는 결심 이후로 그들은 즐거운 순간들을 쌓아나갔다. 그렇게 찬란하게 빛났다. 그건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빛의 마술사라서 그런 것만은 아닐 테다.
한 개인은 삶이 주는 거대한 서사와 그 안의 질문들을 감당할 수 없을 때가 많다. 그러나 결국 버티어 낸다. 그건 힘이 세서, 역량이 충분해서가 아니다. 부족하지만 어떻게든 견디는 것이다. 매일을 살며,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며 시간을 타고 계속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한때 이 영화만 보면 어떤 시절이 생각나서 끝내 미루어 두곤 했는데 드디어 완주한 것을 보면- 내게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주었던 한 시절이 또 지나갔나 보다. 지나갔다고 해서 잊은 것은 아니다. 회복은 아프고 힘든 기억도 화창한 봄날처럼 이따금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을 때 시작되는 걸까.
그렇다면, 회복이 시작되었나 보다.
새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