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주 Feb 12. 2024

그럼에도, 살아간다는 것

존 윌리엄스 <스토너> 독서에세이

-

마지막으로 읽은 소설이 무엇이었는지 까마득할 만큼 오랫동안 소설을 읽지 않았다. 단편은 가끔 손에 들었지만 장편은 장강명의 <표백> 이후로 오랜만이지 싶다. (아, <십각관의 살인>을 읽었군) 글 읽는 호흡이 짧아진 상태에서 <스토너>를 펼쳤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표지였다.


노란색 배경에 작은 창이 그려진 담백한 이미지. 창문 너머로 하얀색 대리석 기둥 세 개가 서 있다. 기둥은 다시 복잡하게 뻗은 검은색 나뭇가지들로 일부 가려져 있다. 그 위에 단정하고 무심한 폰트로 ‘STONER’라 쓰여 있다. 초판본 이미지라는데, 1965년도 판본임을 감안하면 꽤 세련됐다.


-

주인공은 스토너. 작가는 흥미롭게도 첫 장, 첫 문단에서부터 그에 대한 독자의 기대를 철저히 무너뜨린다. 서술자에 따르면 그는 열아홉에 미주리 대학에 입학한 후 박사학위를 받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단에 섰는데 ‘그뿐’이라는 것이다.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고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크게 기억에 남지 않았으며, 동료 교수들도, 후세대들도 굳이 그를 좋게 평가하거나 애써 떠올리지 않는다. 그냥 그런 사람이 ‘있었을 뿐’이다. 말 그대로 그가 세상에 있었을 때 사용한 ‘윌리엄 스토너’라는 ‘이름’만이 남아 한때 그가 존재했었음을 이따금 상기시킬 뿐이다.


때문에 첫 장을 읽어나가며 성급하게도, 총 몇 페이지나 되는지 뒤쪽부터 들추어 보았다. 무려 본문만 389페이지이다. 아니, 평범하다 못해 주변인들의 기억에도 별로 남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나 할 말이 많은가? 하지만 이러한 섣부른 편견은 이내 깨졌다. 나는 1장부터 여러 곳에 밑줄을 긋고 형광펜을 칠하며 작은 감탄사를 내뱉기 시작했다. 그리고 겨우 1장만 읽고 아래와 같은 감상을 브런치의 다른 글에 적어 놓았다.


내심 놀랐다. 모처럼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작품을 만난 듯하다. 한 인간이, 어떤 세계와 자기 자신에 대해 눈 뜨는 순간을 이토록 세련되고 담담하게 표현한 작품이라니! 가능하다면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 보고 싶다. 아직 구체적인 스토리가 진행되기 전이지만 이 작품은 아마도 스토리보다는, 내면의 묘사에 중점을 두고 읽어야 하지 않을까.


가령 이런 부분들 말이다. ‘그는 영문학 개론 강의를 다른 강의들처럼 대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17p), ‘수업에 들어가려고 서둘러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학생들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중략) 그는 호기심에 차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들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들이 자신과 아주 멀지만 또한 아주 가까운 존재인 것 같았다. 그는 이런 느낌을 간직한 채 서둘러 다음 강의에 들어갔다. (중략) 단조로운 목소리에 맞서 그 느낌을 간직했다.(21p)’


-

살면서 한 번쯤 이러한 순간을 만난 적이 있다면 큰 행운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런 순간은 자주 오지 않는다. 그러나 스토너는 이를 만났다. 알아보았고 용기를 내 그 기회를 철저히 혹은 처절히 붙들었다. 전형적인 농군의 아들로 태어나 땅과 흙을 만지며 살아온 십 대 소년에게 '영문학'과의 조우는 ‘달빛 속에서 알몸을 드러낸 채 회색을 띤 은빛으로 빛나는 그 순수한 기둥’을 바라만 보다가(23p)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기로 결심한 순간과도 같다. 그는 ‘자신이 받아들인 삶의 방식을 상징하는 것 같은’(23p) 제시 홀 앞의 기둥을 천천히 응시한다. 이 책의 표지로 창문 너머 대리석 기둥이 채택된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지점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기둥을 가린 검은 나뭇가지가 생각나는 부분이다.


스토너가 귀향해 농사일을 돕는 대신 대학에 남아 공부를 계속 이어가기로 결심한 이후 전쟁이 발발한다. 친구 핀치와 데이브는 입대를 하고, 스토너는 약간의 경멸과 조롱을 견디며 대학에 남는다. 이 전쟁에서 데이브는 전사하고 핀치는 살아 돌아온다. 그리고 스토너는 이디스라는 여자에게 반해 청혼하고 결혼한다. 글쎄. 작중 배경이 1900년대 초에서 중반에 이르는 시기임을 감안할 때 특별히 위험하거나 속도가 빠른 결정은 아니었을 테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위태로워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결혼의 과정부터 지속까지 수차례 흔들리고 삐걱거리는 모습이 묘사된다. 당시의 젊은 부부들도 비슷한 상황을 겪었을까? 소설이라 더욱 극적으로 그려진 감은 있겠지만 독자로서 이디스의 내면을 바라볼 때 안타까운 점이 많았다. 무엇보다 그녀는 자신을 전혀 몰랐다. 당연하다. 작가는 이 캐릭터에게 ‘자신을 궁구하고 알아갈 수 있는 시공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전술한 바, 시대적 배경 자체가 그랬을 가능성도 있고, 작가 스스로 스토너의 ‘내적 성장’과 대비되는 인물로 이디스를 활용하고자 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여성 독자로서 이디스의 무지와 혼란, 히스테릭한 행동들을 보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

주요 인물 외에도 개성 있는 캐릭터들이 여럿 등장했다. 초반에 눈길을 끈 슬론 교수를 비롯해 가장 강렬한 등장 씬을 보여준 로맥스 교수, 핀치와 캐롤라인, 찰스 워커와 캐서린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나이와 성별을 막론한 다양한 캐릭터를 창조했다. 나아가 이들에게 세세한 서사를 부여해 입체적으로 느끼도록 조율했다. 그 능력과 필력이 놀라워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다. 특히 어떤 상황을 묘사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 머릿속에 새겨 두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했다. 가령, ‘마치 얼굴에 얼룩이 묻어 있거나 코피를 흘리는 사람을 보는 것 같은 표정’(80p)과 같은 대목이다. 분명 종이로 읽고 있는데 순간 영화를 보는 듯 멍해지는 장면이다. 내면과 상황을 묘사하는 데 이렇게 새롭고 명징한 문장을 활용하는 작가를 오랜만에 본 듯하다. (아마도 훨씬 더 많겠지만, 내  미천한 독서량 때문일 듯)


마무리를 해 보려 한다. 어느 블로그에서 이 책을 ‘망작’이라 표현한 것을 보았다. 아직 1장만 읽고 감탄을 거듭하고 있던 때라 놀랐지만, 읽어 보니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스토리상으로 볼 때 그리고 몇몇의 캐릭터를 떠올려 볼 때 아쉬운 점은 분명히 있다. 확실히 통쾌하고 분명한 결말을 지닌 작품은 아니다. 전개 속도도 그다지 빠르지 않은 편이고(묘사가 많기 때문일 것), 이디스와의 결혼 생활도 답답하기 그지없다. 학문에서의 이렇다 할 성취도 없고 그렇다고 고든 핀치처럼 명석하게 굴지도 못한다. 교수로서 가르치는 일에 대해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대학자나 석학이 되기에는 또 유약하고 부족한 인간이다. 핀치가 제안하는 학과장 자리를 거절하자 핀치 역시 안심하는 장면은 이를 뚜렷이 드러낸다. 여기에서 ‘부족하다’라는 말이 함의하는 바는 다층적이다. 한 인간이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 ‘충분한 역량’을 드러내고 ‘충분한 기회’를 얻어 ‘충분히 성공’하는 데에는 무수히 많은, 정의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필요할 테니까.


그런 면에서 윌리엄 스토너의 삶은 여러모로 ‘부족’했다. 성공보다는 실패에 가까웠다고 평가할 만하다. 뜨뜻미지근했다고 할까. 완전히 뜨겁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차갑지도 못한 어중간한 삶. 하지만 이쯤에서 독자는 생각해 보게 된다. 그는 정말로 실패했는가? 그렇다고, 잘못된 삶인가? 답답하고 안타까운 측면은 있지만 그 때문에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실패’라고 단언하기에는 뭔가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지점이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그게 뭘까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다가 책을 덮을 때 즈음 한 단어를 찾아낼 수 있었다.


바로 ‘분투’이다.


스토너는 분투했다.

분투하며, 살았다.


-

우리는 흔히 눈에 띄는 사람들을 잘 기억한다. 눈에 띄게 노력하는 사람들, 눈에 띄게 훌륭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 눈에 띄게 멋진 인품을 소유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잘 드러난다.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자기 표현에 능하며 이를 잘 갈무리할 줄 알면 금상첨화겠다. 요즘 같은 시대에 더욱 두드러지는 인간형이라고 할까.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아마도 대다수일 것이다. 보통의,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렇게 눈에 띄기가 쉽지 않다. 능력과 노력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표현의 문제일 수도 있고 기회와 운, 배경과 상황의 문제일 수도 있다. 무엇 때문인지 하나를 꼽기에는 지금의 이 시대가 너무도 복잡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침잠하는 인간형’이 존재한다. 드러내기보다는 안으로 파고들고, 표현하기보다는 성찰하며, 말하기보다는 침묵하기를 택하는 사람들이다. 뭘 몰라서, 모자라서 그럴 리는 없다. 그저 많은 고민 끝에 자신에게 맞는 방식으로 살아가기를 택했을 뿐이다.


어떤 선택으로 인해 벌어지는 삶에의 모든 장면들을 견디는 것은 결국 선택의 주인이었던 그 자신이다. 그에 대해 타인이 멋대로 평가하고 단죄할 수는 없다. 지인이나 가족으로 우려하고 조언할 수는 있겠지만 그조차도 일생의 어느 한순간, 한 장면, 잠깐 동안만 유효할 가능성이 높다. 유독 가까이 연결(심지어 분절까지)되어 있는 2024년 한국 사회에서 1900년대 중반 미국 사회의 스토너를 볼 때 우리는 어떠한 결론에 다다를 수 있을까. 그것이 잘잘못이나 시시비비를 가리는 단 하나의 명확한 결론으로 모이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다만, 그가 끝까지 자신의 삶을 살고자 했다는 것, 분투하며 주어진 몫을 살아갔다는 것에 주목하고 싶다. 성공도 실패도 있었지만 그리하여 스토너라는 이름 하나만큼은 끝까지 살다 갔다는 데 의의를 두고자 한다. 아무도 모르고, 누구도 기억하지 못해 사라진 직후부터 희미해져 갈지라도. 왜냐하면 우리들 대부분도, 결국 그렇게 기억되지 못하고 천천히 아무도 모르는 새 희미해져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스토너를 진짜 영웅이라고 표현한 작가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의 분투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모든 보통 사람들의 삶이 그러하듯이.


<여담>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이 생각나는 소설이었다. 함께 읽어도 좋을 듯하다. 예전에 이와 관련해 쓴 글이 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아래 링크를 참고해 주세용.

https://blog.naver.com/rahul84/221412427944


매거진의 이전글 잊지 말아야 하는 것들에 대한 은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