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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May 08. 2024

가정의 달, 스치듯 효도

한 사람만 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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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오후, 소설 합평을 마치고 시골집으로 향했다. 안 갈 것처럼 미적거리다가 기어코 가고 마는 것은 내 몹쓸 특기 중 하나이다. 물질적 효도는 못 해도 가서 얼굴을 비추고 나름 건재하게 잘(?) 살고 있음을 보여드리는 게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 이른바, 스치듯 하는 존재론적 효도이다(라나 뭐라나). 너무 스치듯 짧은 순간이어서 아마 부모님은 효도로 못 느끼실 수 있다는 게 맹점.


아무튼 시골집 근방에는 아무것도 없으므로 중간에 장난감 가게에 들러 조카들 어린이날 선물을 샀다. <토이저러스>라는 곳이 있다는 말을 듣고 부랴부랴 찾아서 방문. 처음에는 그 명칭이 생소해서 정보를 주신 분께 계속 헛소리를 했다.


선물 사실 거면 토이 저러스 가세요!

예? 토이 뭐요?

토이 저러스요.

토이 절어쓰??

아뇨. 토이 저, 러, 스!


진짜로 저렇게 들었다. 라떼는 <토이랜드>가 짱이었는데 요즘은 이름도 아주 골저스하구만!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입성하니 이건 뭐 아주 눈이 뱅뱅 돌 만큼 엄청난 장난감 천국이었다. 큰 조카 율이는 보드게임을 좋아하니까 <방탈출 게임> 하나 사 주면 되는데(사실은 내가 해 보고 싶으니까!!!) 문제는 둘째 린이다. 린이는 아주 샤방샤방한 걸 좋아하는 공주님 스타일인데 어릴 적의 고모와는 접점이 하나도 없어서 선물 고르는 게 쉽지 않았다. 그맘때 고모는 <소년 황비홍>이랑 <후뢰시맨> 보면서 변신 포즈 연습하고 그랬...


그러다가 린이가 <캐치 티니핑>에 아주 홀릭 중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냈다. 하하하! 그럼 캐치 티니핑 그거 사 주면 되겠네! 방탈출 게임을 옆구리에 끼고 얼른 티니핑을 찾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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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뿔싸!


티니핑이 이만 개 정도는 진열되어 있었다. 예? 이게 다 티니핑인지 머리 핑핑인지라구요? 오, 대체 여기에서 뭘 고른단 말이죠? 슬쩍 다른 또래 친구들은 뭘 고르나 염탐하는데 꼬마 친구들도 마찬가지인지 그 앞에 조로록 앉아 고심 중이었다. 뒤에서 엄마 아빠들이 '하나만 골라! 약속했지?'를 연발하고 있었다. 정말 존경합니다.


나도 소설 대신 티니핑 캐릭터 연구와 스토리 작가를 해 보는 건 어떨까. 그럼 린이가 좋아하는 요소를 마구 넣어서 완전 무장 핵귀요미 캐릭터 하나를 린이만을 위해 만들 수도 있을... 어쩌구저쩌구... 중얼중얼...


...하다가 엄마께 조언이라도 구할까 싶어 전화를 드렸다. 엄마 왈, 이미 티니핑 인형이 여러 개이고 본인이 원하는 바가 명확한 친구이므로 너는 그냥 와서 재미나게 같이 놀아주는 것을 추천한다고 하셨다. 아, 그런가?!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뭐라도 사야지 싶어 고뇌 끝에 하나를 골라 들었다. 티니핑 캐릭터로 하는 게임이었다. (사실은 내가 해 보고 싶으니까!!!)


그리고 시골집에 가서 선물 증정식을 하는데 어찌나 기뻐하던지 아주 뿌듯했다. 게다가 모르고 그냥 골랐는데 무려 최신판인 '새콤달콤 티니핑'을 골랐다며 엄청난 칭찬(?)을 들었다. 예? 그런 게 또 있군요. 새콤달콤 시리즈 말고 다른 거였다면 아마 린이의 관심이 사뭇 덜했을 거라는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얻어걸렸지만 훌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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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율이는, 내 보드게임보다(흑흑) 엄마 아빠가 선물한 <부화기>에 엄청난 관심이 있었다. 그렇다. 그 부화기. 유정란을 넣어 얼마간 어미 품속처럼 적정 온도를 유지해 주고 기다리면 병아리가 탄생한(할 수도 있)다는 그 부화기다. 언니한테 율이 선물에 대한 귀띔을 들었을 때,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예? 부화기?

맞아요. 부화기.

그 알... 부화기?

네, 그 부화기.


올해 열한 살이 된 율이는 자연과 관련된 거의 모든 것들에 아주 엄청난 호기심이 있는 아이로 요새는 매주 주말마다 교육청에서 진행하는 실험 캠프에도 참여 중이었다. 확신의 이과인 친구. 수학과 과학을 좋아하고 특히 각종 실험에 흥미가 무척 많다. 그러니 지금 보드게임이 문제인가! 부화기가 왔는데! 안타깝게도 시골집에는 유정란이 없어 아빠 차를 타고 다 같이 농협에 가서 유정란도 사 왔다.


율이 덕분에 진기한 체험을 하게 됐다. 율이가 손으로 꼽아 보더니 고모 생일 즈음에 부화할 것 같다고 알려 주었다. 이번 생일에는 소설이나 쓰면서 집에 콕 박혀 있어야지 했는데 얼결에 내려오겠다고 약속을 해 버렸다. 그래,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어쩌구... 는 의식의 흐름이고 아무튼 나도 병아리의 탄생기가 궁금해서 그즈음 시골집으로 내려가 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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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어린이날을 우당탕탕 보내고 빗속을 뚫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늘은 어버이날. 큰 건 못 해 드리고 아빠 허리가 안 좋으셔서 듀오백 좌식 의자 두 개를 시골로 보내드렸다. 그것만으로도 아주 기뻐하시며 인증샷을 보내 주셨다. 마음이 좋은데 안 좋다.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생각은 이런 때 아주 섬광처럼 짧게 스쳐간다. 하지만 그러면 나는 또 고통받다가 병이 들겠지. 그렇게 그냥 내 깜냥과 그릇 안에서 자유롭게 살다 가는 게 나와 모두를 위한 길일 것...이라는 주접을 떨어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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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보았던 풍경 하나를 마지막으로 기록해 둔다.


어제 늦은 오후, 집 근처인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 청소년 둘이 하드를 먹으며 낄낄대고 있었다. 둘 다 키가 껑충하게 컸다.


야, 난 이거 샀다!

오, 난 이거!


뭐 하나 봤더니 각자 한 손에 든 자그마한 카네이션 꽃바구니를 자랑하고 있었다. 하하. 기특해라. 다들 용돈도 부족할 나이에 그걸 아껴서 꽃바구니를 다 사고. 둘은 두 입 만에 하드를 다 먹어버리고 포장지까지 깔끔하게 휴지통에 넣은 후 쿨하게 헤어졌다. 하나는 저 위로, 다른 하나는 저 아래로. 휘적휘적 멀어지는 아이들. 조금 걷다가 흘끔 돌아보니 둘의 걸음걸이에 맞추어 꽃바구니가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꽃바구니를 받아 든 부모의 표정을 상상하며 나도 걸음을 내디뎠다.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아주 사소한  순간이겠지. 아마, 그럴 것이다.


한 사람만 있어도, 사람은 산다고 했다. 그 풍경을 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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