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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Jun 06. 2021

디아츠가 망해도 걸어간 길은 남겠지

무명 그룹 <디아츠> 멤버의 공연에 관한 짧은 기록



나는 디아츠(The Art's)라는, 아직 이 세상에 알려진 바 없는 한 프로젝트 그룹의 멤버이다.

어딘가에 적을 두거나 이름을 내 걸고 오디션에 나간 적도 없고, 뭔가를 이룬 것은 더더욱 없어 아무도 모르지만, 아무튼 디아츠는 존재하고 나는 그 멤버 중 한 명이다. 성악을 하는 소라와 피아노를 치는 은신 그리고 글을 쓴다고 볼 수 있는 내가 만든 이 극무명의 그룹은 어느 날 걸려 온 소라의 전화 한 통으로 시작되었다.


내가 지금부터 너한테 한 가지 제안을 할 건데, 듣고 안 해도 돼. 알았지?

아, 벌써부터 하고 싶네. 뭔데?


그렇다. 보통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듣는 순간부터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게 무엇이든, 어떤 일이든. 게다가 소라와 나는 30년 지기로, 무려 초등학교 입학식에서 줄 서 있다가 만난 인연이 아닌가. 내가 하자고 하는 건 주로 '짬뽕 시켜 먹기'나 집에 와서 같이 '천장 보며 누워 있기'와 같은 매우 소소한 일들인 데 반해 지금까지 소라의 제안은, 뭐랄까. 좀 더 크고 거대하고 멋진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이번에도 한껏 기대하고 벌써부터 "YES"를 장착한 후 귀를 기울였다.


우리, 공연하자.



공연하니 생각나는 풍경이 있다.

고등학교 3년간 '문예부'에서 활동하며 왜 그런지 글보다는 공연에 목이 말라 1학년 때는 난타를, 2학년 때는 <生과 死>라는 주제 아래 시화전을 열었더랬다. 난타 공연 때는 리듬 짜고 연습한다고 틈만 나면 카페에 죽치고 앉아 아이디어 회의를 빙자한 수다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여름방학을 통으로 날린 열일곱들은, 그해 초가을에 냉방이 하나도 안 되어 흡사 열대우림 같던 6층 시청각실에서 조촐하게 공연을 올린다.


이름은 무려 <십 대 말의 난리부르스>.


정말 이게 웬 난리인가 싶은 난타와 영상극, 하나가 되고 싶어 불렀지만 전혀 하나가 되지 못했던 합창 <하나되어>까지. 그때 나는 무척 흠모하던 가수 김경호의 파트를 하고 싶었으나 가창력 부족으로 후렴 코러스를 했던가 말았던가. 지금 돌이켜 보면 조촐하다 못해 어설픈 그 공연에는 다른 학교로 진학했던 중학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 주었고 기념사진도 같이 찍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착하고 고맙기만 한 친구들. 그런 공연을 보고도 활짝 웃는 사진을 남겨 주었지.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리고 그때 나는 무슨 자신감으로 엄니도 오시라고 초대했는지? 엄니는 당시 보험 회사에 다니셨는데 직장 동료분과 무려 꽃다발까지 들고 오셔서 나는 그렇게 엄니의 인생에도 한 획을 그었다...(이런 딸이 부끄럽지는 않으셨...으리라고 믿고 싶은 건 내 욕심일까...)


2학년 때 열린 시화전에서는 死 즉, 죽음을 대변하는 파트에서 <死者의 노래>라는 시로 참가했었다. 그때에도 나는 그런 게 궁금한 청소년이었다. 우리들 모두는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걸까. 이 삶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 세상을 떠나간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서 머무르며 무엇으로 '살고' 있는 걸까... 그런 고민들을 담은 시 몇 줄을 써 시화전에 참가했고, 당시의 내 시화에는 친구들의 흔적이 깊게 남았다. 문예부 열혈 부원 초롱이가 보라색 물감으로 멋들어지게 글씨를 써 주고, 그림은 만능 재주꾼 세실이가 그려 주었다. 빨간색 화지에 흰색 물감을 써서 균열하는 불빛을 그려내 모두를 감탄하게 만들었지. 그 그림도 어딘가에 있을 텐데. 시화전은 시화전인데 '엽기 쌩쑈'라는 수식어(이런 건 대체 왜 달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세기말 청소년들의 세계)를 달아 교실 전체를 마치 지옥과 천국처럼 특이하게 꾸몄고, 그게 교내에 소문이 좀 났던 걸로 기억한다. 말은 이렇게 해도 사실 다시 돌아가고픈, 흥미롭고도 밀도 높은 시간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다시 공연이라고?



<십 대 말의 난리부르스>를 떠올리며 슬몃 걱정을 하고 있는데 생각해 보니 나는 이미 삼십 대 중반을 향해 가는 중이었고, 소라의 제안은 역시나 매우 근사한 것이었다. 하고 싶은 노래를 하고, 쓰고 싶은 글을 쓰며,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을 수 있는 그런 무대를 만들어 보자! 더 좋다면 어렵게 느끼기 쉬운 클래식을 좀 더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는 그런 자리를 마련해 보자!   


너는 노래를 하고, 은신인 피아노를 치고, 그럼 나는? 나는 뭐하면 되는데?

너? 너는 사회를 보는 거지. 스토리텔러라고 할까?

아, 그건 또 내 전문이지.


뻥이다. 사실 전공도 아니고, 전문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래도 한 십 년 정도 마이크를 잡으며 나름 몇 번의 MC랄까. 사회를 본 경험이 있어 또 주특기인 큰소리부터 쳤다. 당장 내일이라도 무대에 설 것처럼 고개도 끄덕였다. 소라나 은신 모두 음악을 전공하고 꾸준히 활동을 하고는 있었지만, 사실 젊은 아티스트들이, 그것도 이제 막 사회로 나온 무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마음 놓고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는 공간이 어디 그렇게 많던가. 나도, 글을 쓰고 오래도록 이 일 저 일에 몸 담으며 어떻게든 살아가고는 있지만, 사실 제일 그리운 것은 생각과 마음을 자유롭게 나누고 표현할 수 있는 시공간이었다. 꼭 무대가 아니더라도, 꼭 많은 사람들 앞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사실, 우리에게 허락된 무대가 거의 없기도 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유명한 사람들도 아니고, 아직 이렇다 할 이력이 있는 것도 아니니 누가 우리를 알아보고 대번에 무대를 주겠는가. 음. 어디 보자... 자, 그렇다면...?    


무대가 없으면? 무대를 만들면 된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면 된다.


계속해서 걸어가면 어떻게든 길은 생기고, 그렇게 생긴 길을 다시 또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너도 한다고?

야, 당연하지.


2015년 겨울, 디아츠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첫 무대는 내방동 근처의 북 카페였다. 마침 음악에 조예가 깊던 카페 사장님이 주말마다 의미 있는 작은 공연들을 마련해 오고 있었는데, 그중 한날에 디아츠의 이름으로 공연을 올리게 되었다. 2016년이었다. 대통령 탄핵으로 나라 안팎이 들썩이고, 개인적으로도 무척 힘든 일이 있던 해라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해.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널찍한 카페에서 우리는 친구들과 지인, 지역 주민들을 조촐하게 모셔 놓고 연주를 하고 시를 읊었다. 회사에 몸 담고 있을 때라 시간을 쪼개어 멘트를 짜고, 밤새 곡들을 공부했다. 그래도 즐거웠다. 가곡 <얼굴>과 <비목>의 탄생 비하인드를 빼곡히 적어 외우며 실제 무대에서는 어떻게 전달할까, 연주를 해치지 않으면서 녹아들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며 오랜만에 가슴이 뛰었다.


나 이 일을 좋아하나 봐.


소라에게 말하니 웃으면서 그랬다. 야, 그냥 떠돌며 살아. 그렇게 사는 게 네 적성에 더 맞을 수도 있어. 그런가? 나는 대체 뭐가 불안하고 힘들어서 매번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는지. 5년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당최 알 수가 없는 인생이다. 아무튼 그렇게 우리는 첫 공연을 나름 성공적으로 올렸고, 그 후로도 몇 번 더 공연을 했다. 우울하고 괴로웠던 순간들마다 기막힌 타이밍으로 디아츠 공연을 하며, 소라의 노래들로 위안받으며 그렇게 지금까지 건너온 것 같다. 그리고 2017년을 마지막으로 디아츠는 잠시 활동(?)을 멈추고 휴식기에 들어갔다. 그사이 소라와 은신은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났고, 나는 책을 출간했다. 휴지기가 길었던 만큼, 멤버들이 돌아와도 디아츠를 계속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그것도 잠시, 소라는 올해가 밝자마자 공연 이야기를 꺼냈다. 들으니 또 가슴이 뛰었다.


이제 음악홀에서 하자.

음악홀?

일단 3월 27일, 마리아칼라스홀이야.

마리아칼라스홀?


칼바람이 불던 1월의 어느 저녁, 우리는 그렇게 다시 공연 일정을 잡았고, 정말로 봄에 서울 강남의 한 작은 음악홀에서 공연을 올렸다. 봄비가 촉촉하게 내리던 토요일이었다. 공연의 제목은 C'est la vie. 이것이 인생이다.


코로나 때문에 일 년 넘게 겨울이 지속되고 있는 기분이지만, 이 또한 인생일 것. 긴 터널을 지나는 동안은 깜깜하고 어둑한 시야 때문에 괴로움과 두려움이 크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가다 보면, 그것이 무엇이든 계속해서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푸른 하늘과 빛들에 둘러싸여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 앞으로도 말이다. 늦은 밤, 모닥불 소리를 배경으로 틀어놓고 무대에서 전할 말들을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다. 노래와 연주를 따라 흘러갈 몇 줄의 글을 쓰며, 오랜만에 깊은 안정감을 느꼈다. 단 한 분이라도 이 공연을 통해 힘을 얻으셨으면 좋겠다. 음악을 듣고 잠시 눈을 감고 있는 그 순간에라도 진심으로 '살아 있어서 행복하다'라고 생각하셨으면 좋겠다. 실상 거대한 목표이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런 순간을 선물한다고? 누군가가 나의 노래와 연주를 듣고, 내 작품을 보고, 내 글을 읽고, 내 목소리를 들으며 '살아 있어서 행복하다. 다행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니! 와, 이것이야말로 진정 엄청난 목표이다. 하지만 거기까지는 우리의 몫이 아닐 테지. 우선 최선을 다해 좋은 공연을 준비하고 그 안에서 먼저 스스로 행복할 것. 그 시간 속에서 피어난 에너지가 서로에게 가닿으면 되는 것이다.  


오후 3시. 드디어 공연의 막이 올랐고, 각 세 곡씩 준비된 총 세 번의 스테이지가 모두 마무리되었다. 힘든 이 시기에 무엇이라도 나누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사실 가장 큰 힘을 얻은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어쩌면, 이런저런 비용을 치러 가면서도 끝내 이 공연을 놓지 않고 계속해서 하고 있는 것은 힘을 얻기 위해서가 아닐까.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을 발견하기 위해, 그리고 그렇게 발견한 마음을 끝까지 지킬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서 말이다. 그 힘의 이름은 행복, 기쁨, 즐거움, 위로, 위안, 휴식, 편안함... 무엇이든 상관없겠다. 빗속을 뚫고 온 사람들에게 고요한 우리의 소리들이 부디 평안한 빛으로 가닿았으면.  



그날 밤, 공연에 와 주었던 친구들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오늘에서야 정말로 봄이 왔구나 느꼈어.

다신 없을 경험을 했어. 이 첫 느낌 잊지 못할 거야.

믿지 않겠지만, 공기가 떨리는 걸 눈으로 봤어. 고막이 떨리면서 소리를 전달해 준다는 걸 직접 경험했음.  


모두가 이런 클래식 공연은 처음이라고 했다.


나는 중의적인  이 말이 기쁘고도 슬펐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도 늘 삶은 버겁고 위태롭다. 왜 그런 걸까. 힘껏 뛰어도 제자리이거나 뒤로 나자빠져 후퇴해 있거나 어느 순간 그랬다. 공부와 취업, 결혼과 출산, 육아와 교육. 그 사이를 위태롭게 넘나들며 많은 이름들을 얻었지만, 그 무엇도 내 이름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러는 사이 나이가 들고 세상에 온 지도 수십 해가 흘렀다. 그 시간들을 사는 동안 나는 무엇이었을까.


이런 먹고사는 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질문들은 주로 '처음'인 경험들 속에서 나왔다.

처음 들은 노래, 처음 본 그림, 처음 간 전시회, 처음 읽은 시, 처음 만난 사람, 처음 먹은 음식 그리고 처음으로 말해 본 마음.    


얼마간 젠체하며 글을 쓰고는 있지만, 사실 나도 이런 클래식 공연은 매번 처음이다. 문외한인 것도 마찬가지이다. 맡은 역할이 있어 무대에서는 좀 더 아는 척을 할 수밖에 없지만(밤샘 벼락치기 공부로) 나도 여전히 음악은 어렵고, 어떤 곡은 제목조차 발음하기 어려워 한글로 몰래 끼적여 놓는다. C'est la vie가 불어이고, '이것이 인생이다'라는 뜻이라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하등 쓸모없지만 삶이 걸린 의외로 중요한 질문들'이 떠오른 것은 물론이다.


나는 먹고사는 데 하등 쓸모없는 질문이 많은 사회일수록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다. 웃음이 터질 가능성, 넉넉한 마음으로 지켜봐 줄 수 있는 가능성, 그리하여 끝내는 살아갈 힘을 줄 수 있는 가능성.


나는 예술을 모르고, 예술지상주의자도 아니지만 예술이란 게 있다면, 그런 것이었으면 좋겠다.

많은 게 처음인 사람들을 살가워하고, 다정하게 부르는 자리였으면 좋겠다. 쓸모없는 질문을 해도 두 팔 벌려 환영해 주는 자리였으면 좋겠다. 살아가는 일이 힘들게 느껴지는 어떤 순간, 길을 잃은 어떤 순간에 문득 달려가 털썩 앉아 버릴 수 있는 그런 자리였으면 좋겠다. 꼭 예술이 아니더라도, 거대한 그 무엇이 아니더라도 척박한 길 위에 난 작은 사잇길들처럼 소소하고 짧아도 좋으니 그냥 그런 숨통 같은 자리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이 우리 삶에 좀 더 많았으면 좋겠다. 디아츠를 하며 매번 그런 생각을 한다. 나야말로 이 시간들을 통해 크게 위안받고 되살아나는 관객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살아오며 내가 무엇이었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살아가며 무엇이어야 하는지는 더더욱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하는 일이 늘 그렇듯 답이 없어도 나는 질문을 던질 것이고, 답이 없어 쓸모없는 질문들을 만들며 살 것이다. 그러기 위해 매번 처음인 일들을 벌일 것이고, 그러다 보면 점점 더 많은 사람들과 서로의 '처음'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에 탄생하는 쓸모없는 질문들에서 의외로 '우리가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찾을 수 있을 지도.



메조소프라노 성악가의 노래를 코앞에서 들어본 게 처음이야. 다시는 이런 일 없겠지.


지연이가 보낸 메시지에 뒤늦은 답을 해 본다.


오늘이라는 처음은 다시없겠지만, '새로운 오늘'의 처음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있을 거야.

그러니 우리 새로운 처음을 계속해서 만들고 만나자. 함께, 오래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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