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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Jun 17. 2021

처음 만난 그때처럼 물어봐 주시겠어요?

우토로 마을에 갔던 그날에 관한 짧은 기록



마음이 힘들고 어려울 때 가만히 떠올려 보는 풍경이 있다. 벌써 십 년도 더 된 이야기이다. 그때 나는 막 스물여섯이 된 참이었고, 스물다섯 한 해를 오롯이 바친 NGO를 나와 얼마간 방황하고 있었다. 공부를 중도에 그쳤으니 학교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아예 그만두고 다시 일자리를 알아보거나 해야 하는데 왜 그런지 무기력함에 빠져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새해는 벌써 두 번째 달을 맞았고 수중의 돈은 그만큼 더 줄어들었다. 가파르게 부풀어 오를 줄 아는 건 날짜와 나이뿐인가 봐요. 어디 머리라도 좀 식히러 다녀오고 싶은데 엄두도 안 나고, 저는 이렇게 앞으로 무엇을 하면 좋을지 모르는 스물여섯이 되어 버렸어요.  


친하게 지내던 선배와 오랜만에 술잔을 기울이던 저녁. 나는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우물거리며 말했다. 술이 들어가니 속에 쌓여 있던 말들이 조금씩 흘러나왔다. 가만히 듣고 있던 선배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래? 그럼, 어디 여행이라도 잠깐 다녀와.”

"...여행이요? 다녀오고 나면 돈이 아예 바닥날 텐데..."


정말 돈 때문이야? 아니, 그것도 그렇고요... 아직 혼자서는 한 번도 여행을 안 가 보기도 했고, 또 지금이 그럴 땐가 싶기도 하고요... 나는 왜 그런지 잘못을 저지른 학생처럼 선배의 눈을 피하며 대답했다.


"지금이 그럴 때가 아니면 언제가 그럴 땐데?"

"......"

"돈은, 어차피 어디에든 쓰게 돼 있어. 한 해 동안 열심히 일했으니 그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사실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정해 둔 곳이 있었다. 홀로 여행을 떠나게 되면 반드시 그곳에 가리라. 그런데 용기가 나지 않아 괜히 이런저런 못 갈 만한 이유를 붙여 미루고 있던 참이었다.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던 선배가 입을 열었다.


"가고 싶은 곳이 있을 텐데?"

"있죠."

"어딘데?"

"어디냐면요..."



 

우토로.

내가 그곳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신문, 주간지, 방송. 어디에서였을까. 우토로 마을을 돕기 위한 모금 운동 보도에서 보았을까. 어쩌면 더 오래전부터 그런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처음으로 재일교포 문제에 관심을 갖게 만든 다큐멘터리가 있었다. 중3, 시험이 끝나고 방학은 아직 오지 않은 그 헐렁한 시간에 우연히 본 다큐멘터리 <본명 선언>. 나는 그때서야 처음으로, 일본 땅에 남은 사람들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고, 한국과 일본 그리고 북한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해야 하는 많은 삶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너무도 당연하게 한국 사회에서, 본명으로, 한국 국적을 가진 채, 말하고 쓰고 배우고 익히며 살아가던 나에게는 매우 큰 충격이었고 하나의 사건이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대학에 들어와 자연스럽게 교육사회학을 전공으로 택하고, '경계와 사이'를 걷는 삶들에 대해 공부하게 된 것은.


경계와 사이를 걷는 사람들을 위해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다면- 아주 사소하고 작은 일이라도 좋으니 뭔가를 할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마도 거의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할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그 삶들을 위해 살고 싶다. 경계와 사이에서 비틀거리며 걷는 위태로운 순간들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싶다. 그러다 누군가 넘어질라치면 손을 잡고 서로 어깨를 건 채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뜻은 품었으나 대체 무엇을 어찌하면 좋을지 몰랐다. 그래서 학부 시절에는 무작정 야학 동아리를 찾아가 야학 교사로 활동했고, 졸업하고서는 대학원에 들어가 교육소외와 격차를 주제로 공부했다. 말하자면, 뭘 할지 몰라 우선 공부를 했던 것인데 그러다 보니 당연히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렇게 하는 게 맞나? 공부를 하는데 왜 현실과는 더 멀어지는 느낌이 들까? 결국 대학원에 들어간 지 일 년 만에 책으로만 보는 세상이 답답하다며 공부를 그만두고 NGO에 들어갔다. 첫사랑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마음을 다해 일했던 곳이다. 그곳에서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 삼촌들과, 다문화가정 언니들, 아이들을 만나 가슴 뛰는 순간을 보냈지만 결국엔 이면에 숨은 여러 고민과 문제들에 손을 들고 나와 버렸다. 하... 지금 대체 이게 뭐하는...? 어쩌자는...?


뭐 하나 제대로 해낸 게 없구나.

참 진득하지 못해.

시작만 있고 마무리가 없으니 대체 뭘 하겠다는 건지.




그래서, 교토로 향하는 비행기 속에서 나는 조금 울었던 것 같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는데 자꾸 어디론가 가고 있고, 도착한 그곳은 내가 가려던 곳이 아닌 것만 같고. 그러는 사이 아부지는 회사가 망해 일을 그만두셨다. 오빠는 다른 지역에 취직해 진작에 집을 떠났고, 부모님 역시 시골로 내려가셨다. 나는 그렇게 가족과 같이 살던 집에 혼자 남으면서 얼떨결에 독립했다. 당연히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내린 곳은 오사카였다. 오사카에서 하루를 머물고 교토로 넘어갈 심산이었는데, 마침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나들이 나온 가족 단위 사람들로 무척 붐볐다. 때 지난 허기를 주먹밥 하나로 달래며 우두커니 공원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했다.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속사정은 어떨지 몰라도 일단 즐거워 보였다.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면 나도 비슷한 풍경 속에 머무를 수 있을까. 아니면 나도 유학을 떠날까. 함께 공부를 시작한 친구들은 저마다의 꿈을 찾아 이국땅으로 떠나거나 취업을 해 사회초년생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마치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이룰 수 있는 양 나는 이 꿈 저 꿈 사이를 헤집다가 꿈에서 깨듯 벌떡 일어났다. 교토로 가자.


교토를 가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왕 떠났으니 최소 4일은 머물러야지 싶어 비행기 표를 그렇게 끊었는데 막상 떠나오니 할 게 없었다. 관광에는 애초부터 큰 관심이 없었고, 스마트폰이 있던 때도 아니어서 정말 아무렇게나 교토를 쏘다녔다. 계획이라고는 단 하나. 우토로 마을에 가자는 것. 그러면서도 정말 갈 수 있을까, 가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다.


우토로 마을은 일본이 교토 우지시에 군 비행장을 건설할 목적으로 강제로 조선인들을 징용했다가 패망 후 이들을 방치하면서 오도 가도 못한 채 일본 땅에 남게 된, 조선인 강제 징용의 역사가 아프게 새겨진 곳이다. 생활환경이 아주 열악하여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곳을, 우토로 마을 사람들은 하나하나 일구고 공들여 삶의 터전으로 바꾸었다. 한국에 알려진 것은 2004년 즈음. 우토로 마을 주민들의 강제 퇴거 소식이 들려오면서부터이다. 토지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던 닛산 자동차가 이를 다른 곳에 팔아넘기면서 졸지에 불법 체류자 취급을 받게 된 우토로 사람들. 결국 오랜 시간에 걸쳐 재판이 이어졌고, 강제 퇴거의 고비는 넘겼으나 그 후로도 마을의 존속 여부는 늘 위태로웠다.


나는 왜 우토로에 가고 싶었을까.

모르겠다. 아무런 도움도, 힘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가까이 가고 싶었고, 보고 싶었다. 잠시 머물다 떠날 사람이지만 한 번쯤은 이 마음을 꼭 전하고 싶었다. 한국에도, 또 다른 여러 곳에도 우토로 마을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러니까, 혼자가 아니라는 그런 아주 오래되고 낡은, 그러나 여전히 빛을 발하는 어떤 말들을 전하고 싶었다.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만일 가능하다면.




그런 고민들 끝에 결국 길을 나선 것은 2월 11일 수요일. 여행 일정의 막바지였다. 묻고 물어 간신히 찾아간 우토로 마을.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멀리 익숙한 한글이 보였다. 울컥 차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너무나 조용해서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인근의 <이세다 역> 부근 골목들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에 조금 놀란 채로 조심조심 마을로 들어섰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어두운 하늘이 깊숙이 내려앉은 오후였다. 역시 평일 오후라 아무도 없는 걸까. 누군가를 만나도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모르겠으니, 차라리 다행인 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조심스레 사진만 몇 장 남기고 돌아서려던 참이었다.      

마을로 들어서자 보이던 글귀 '우토로에 사랑을'

나는 그래도 아쉬움이 들어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한 집에 들렀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그곳이 한 집의 마당인 줄도 모르고 공터인가 싶어 어쩌다가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었다. 그 마당 한가운데서 할머님을 만났다.


"누구 기다리세요?"   


아마도 이런 뜻이었을 일본어. 나는 아주 서툰 일본어로 더듬거리며 한국에서 왔다고 했다. 그 순간이었을까. 할머님의 입에서 탄성일지 탄식일지 모르는 우리말 '세상에!'가 튀어나왔다. 여기가 어디라고, 세상에 거기서 여기를! 할머님은 다듬던 파를 놓으시고 내 손목을 붙들고 집으로 들어가셨다. 어어어 하면서 순식간에 끌리듯 따라 들어간 나는 그날 그렇게 운명처럼 김군자 할머님을 만나 뵈었다.  


할머님을 꼭 닮은 정갈하고 따뜻한 집. 잔뜩 흐린 수요일 오후 네 시. 난로 위에는 양철 주전자가 끓고 있었고, TV에서는 일본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다. 할머님은 커다란 사발에 커피를 한가득 타 오셨다. 맥주도 꺼내 오셨다. 만난 지 겨우 십 분밖에 안 되는 나를 위해 무엇이 더 없나 냉장고를 자꾸만 여닫으셨다. 그래, 여기를 왜 왔다고? 그냥 오고 싶었어요, 할머니. 그래, 어디서 왔다고? 저는 서울에서 왔어요. 세상에. 여기가 어디라고. 그래, 잘 왔다. 할머님의 고향 이야기를 듣고, 가족들 사진을 보았다. 장성한 다음 세대들은 가정을 꾸리고 일을 찾아 우토로를 떠났지만, 할머님을 비롯한 여러 1세대 어르신들께서는 여전히 이곳을 지키고 계시다고 했다. 그 말씀을 들으니 눈물이 났다. 그렇게 나이를 넘어, 세월을 넘어, 살아온 터전을 넘어 해가 이울도록 할머님과 나는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며 울다가 웃다가 했다.   

이웃집 할머님께서 품에 던져주셨던 인절미

마침 그날은 오사카의 츠루하시 시장에서 이동식 장터가 오는 날이라 했다. 여섯 시쯤이었을까. 별안간 바깥에서 신나는 음악 소리 같은 게 들리더니 할머님께서 트럭이 도착했다며 같이 나가 보자고 하셨다. 큰 트럭에 식품부터 잡화까지 다양한 물건을 싣고 도착한 이동 장터.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던 마을이 순식간에 사람들로 가득 찼다. 오오- 하며 놀라고 있는데 나를 처음 본 어떤 할머님 한 분께서 '대체 누구인가?' 물으셨다. 김군자 할머님께서 한국에서 온 학생이라 하니 아니! 거기에서 여기가 어디라고! 연락도 없이! 아무도 없으면 어쩔 뻔했느냐며 잔소리처럼 걱정하셨다. 나는 찔끔하여 고개를 수그리고 그만 풀이 죽었는데, 한참을 그러시던 할머님께서 별안간 트럭에 실려 있던 인절미 떡 한 팩을 집으시더니 휙- 하고 내게 던지셨다. 얼떨결에 받아 들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데, 할머님께서는 '다음부터는 꼭 연락을 하라!' 역정처럼 한 말씀을 남기시고서는 휙 돌아서 가 버리셨다. 고맙습니다!! 그 말씀을 뒤늦게야 소리치듯 전했는데 아무래도 제대로 전하지 못한 것 같다.


마음이 정말 이상했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마음. 할머님 댁으로 다시 돌아와 책상 위에 떡을 놓고 사진을 찍었다. 마음이 얼마나 일렁였던지 사진조차 잔뜩 흔들리게 나왔다. 조심스레 떡을 하나 집었다. 세상에 다시없을 맛이었다.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오사카에서 온, 교토에서 먹은, 한국식 인절미. 분단 이전부터 이어져 왔을 온전한 땅덩어리, '조선'의 맛.


그렇게 해가 완전히 기울고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두워질수록 마음이 조급해졌던 것이 사실이다. 돌아갈 길이 걱정되어 자꾸만 시계를 흘깃대는 나를 보며 할머님께서는 '유쿠리, 유쿠리네'라는 말씀을 반복하셨다. 그것이 '천천히'라는 뜻이라는 걸 어디선가 들어 알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도 좋을 저녁이다. 천천히. 천천히 하자. 무엇이든. 저녁으로 맥주에 할머님께서 내어 주신 족발까지 배부르게 먹고는 아쉽게 일어났다.


"할머니 또 올게요."

"그래."

"진짜로 또 올 거예요."

"그래. 애인이랑 와라."

"네, 애인이랑 올게요."


나는 애인이랑 오라는 말씀에 진짜 손녀라도 된 듯 키득거리며 집을 나섰다. 밖에는 언제부터인지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카사 있어? 네, 숙소에 우산 있어요. 카사 있어요. 할머님께서 마을 어귀까지 따라 나오셨다. 괜히 폐를 끼치는 것 같아 뛰듯이 걸었다. 옷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때였다. 할머니가 던지신 말씀이 아직도 뇌리에, 머리에, 가슴에 남아 잊히지가 않는다.


앞을 보고 가라.

앞을 보고 가라.


어느 순간, 앞만 보고 내달리듯 걷던 거리

자꾸만 뒤를 돌아보던 나는 그 말씀에 어느 순간, 앞만을 본 채 내달리듯 우토로를 빠져나왔다. 그 골목길이 어제의 풍경처럼 생생히 떠오른다. 밤이라서 그런지 내 마음이 그래서 그런지 사진이 퍽 흔들렸다. 다시 교토 중심가의 숙소로 돌아오던 그 밤, 어쩌면 나는 빗물인 척 슬쩍 눈물을 훔쳤는지도 모르겠다. 천천히, 앞을 보고 가라는 할머님의 말씀이 마치 내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방향을 일러주는 듯하여 내내 마음이 일렁였다. 그래, 앞을 보고 가자. 천천히. 천천히 앞을 보고 가는 거다. 그래도 전혀 문제가 없다. 괜찮다. 지금까지의 나도, 앞으로의 나도.





처음으로 홀로 떠났던 교토로의 여행은 그렇게 끝났다.

죽는 날까지 우토로에 계시겠다던 할머님께 나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었다. 꼭 다시 찾아오겠다는 약속.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한국으로 오자마자 할머님과 함께 찍은 사진과 편지를 우토로로 보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당장 우토로에 다시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쉽지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우토로를 찾아간 것이 2014년. 5년이나 흐른 후였고, 그곳에서 만난 분들께 김군자 할머님의 안부를 물었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워낙 고령이시라 오래 기다리시기가 어려우실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은 했었다. 그래도 나는 아직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시간이 남았다고 여겼다. 늘 하는 실수를 다시 한번 반복하며 그만 시간을 믿어버린 것이다. 멍청하게도.


할머님.

저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어요.

어느 날 갑자기 소식도 없이 나타나 반나절도 채 머물지 못하고 떠난 사람을 어찌 다 기억하실까마는,

저는 할머님께서 제게 베풀어 주신 깊은 후의로 그 후로도 오랫동안 살아가고 있어요.

마음이 너무 슬프거나 괴로운 날에는

천천히, 앞을 보고 가면 된다고 하신 그 말씀에 의지해 이렇게 살아남았답니다.

앞으로도 그럴게요. 그 말씀에 의지해 그 힘으로 살아갈게요.


나중에 만나 뵙게 되면 커다란 사발에 맥심 커피를 한가득 타고, 족발 한 접시와 시원한 맥주를 꼭 대접해 드리고 싶어요. 조선의 맛 인절미도 빼놓을 수 없지요. 언제나처럼 소식은 미리 못 드리고 불현듯 찾아갈 텐데 괜찮으실까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누구 기다리세요?"라고 물어봐 주시면 "한국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할 거예요. 그러면 기억의 먼 저편에 잠겨 있던 저와의 짧지만 즐거웠던 추억을 꺼내 주시겠어요? 이번 약속은 꼭 지킬게요. 할머님, 정말 감사했습니다.


지금 계신 그곳이 한없이 평화롭고 따뜻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며, 내일도 나는 천천히 앞을 보며 가겠다. 그렇게 끝 날까지 걷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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