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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Jun 02. 2021

오빠네 가족이 돌아왔다

조카 린이를 위한 짧은 기록



엊그제 오빠네 가족이 돌아왔다. 미국으로 떠난 지 2년 만의 일이다.


애당초 회사 일 때문에 간 것이고, 2년이라는 기약이 있긴 했지만 가족을 멀리 보내는 일이 처음이었던 우리는 영원히 못 볼 것처럼 부둥켜안고 눈물 콧물을 흘렸다. (지금 생각해 보니 좀 부끄럽...) 어른들이 우니 율이도 울었다. 돌이 채 안 되었던, 율이 동생 린이는 괜한 짜증을 부렸다. 짜아식-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거기 아주 먼 곳이란 말이야. 비행기 타고 멀리멀리 가야 해. 린아, 아가야. 너는 거기에 가서 걷겠구나, 뛰겠구나, 첫 돌도 맞고 두 돌도 맞겠구나. 린이는 이러한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쪽쪽이를 빨다가 잠들었다. 율이는 떠나기 전부터 칠백 밤만 자고 오면 된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그날은 조용했다. 괜히 내 손을 잡고 공항 여기저기를 누비다가 슬며시 손을 놓고 그런다. 고모, 미국 오세요. 그래, 율이 보러 꼭 갈게. 약속. 그래, 약속. 율이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이런 건 누가 가르쳐 주는 걸까? 약속을 할 때는 서로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마주 거는 거야, 하고. 우리는 새끼손가락을 마주 걸고 힘차게 흔들다가 도장도 찍었다. 시간이 되어 아이를 안고 짐을 잔뜩 부린 오빠네 부부의 뒷모습이 멀리 사라지자 나는 얼마간 더 눈물을 훔쳤다. 엄니, 저 나이가 들었나 봐요. 너는 원래 울보였어. 어릴 때부터. 아, 그랬나요. 우리는 서로 금시초문인 양 남은 눈물을 찍어냈다. 아부지까지 세 식구는 그날 공연히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에 다 같이 시골로 내려갔었다.  


그리고 율이와의 약속은 당연히 지키지 못했다. 지킬 수가 없었다. 코로나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말 그대로 복병이었으니. 초기만 해도 이렇게 오래, 심각하게 번질 줄 모르고 우리는 다 같이 미국 구경을 가 보자는, 일말의 희미한 기대 같은 것을 품고 지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오래지 않아 사라졌다. 아부지와 엄니는 일생 처음으로 구입한 미국행 티켓을 취소하셨고, 나 역시 큰 맘먹고 받은 ESTA 비자를 조용히 묻어 두었다. 비자 승인이 떨어진 직후부터 이곳저곳에서 코로나 집단 발병이 있었다. 음, 그래. 가지 말자. 갈 수가 없겠다. 또 기회가 있겠지.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마침내 율이네는 돌아왔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시기이니만큼 무사히 지내다 온 것만으로도 기쁘고 감사했다.


그런데 율이네가 왔다는 소식에 반가운 것도 잠시, 이틀이 다 되어가도록 도통 연락이 없었다. 전화로라도 한 번쯤 얼굴을 비추어 줄 법도 한데? 물론, 가 있는 동안에도 종종 영상 통화도 하고, 메시지도 주고받았지만 왠지 같은 시차 안에서 같은 낮밤의 풍경을 보고 싶어 기다렸다. 알고 보니 시차 적응 대실패로 온 식구가 낮에는 내내 자고 새벽에 간신히 일어나 밥을 먹는 중이란다. 게다가 아직 자가 격리 기간도 남아 있다. 당장 보고픈 마음이 들어도 좀 참는 수밖에. 이제나저제나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아직 율이네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 있었던 재미난 에피소드를 하나 적어 본다. 린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있었던 일이다.   



사건의 시작은 이랬다.


어느 날 조카 율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알뜰 바자회 같은 것을 여는데 원아들이 주축이 되어 물건 가격표를 만들고 한 구역씩 맡아서 판매도 한다고 했다. 월요일부터 벌써 여러 차례 목청껏 연습을 하고 학부모들에게 독려도 한 모양이다. 모월 모일에 시간 되시면 꼭 참여해 아이들이 담당한 물건들도 살펴 주시고 격려도 해 주세요 하고. 각 집에서 쓸 만한 물건들을 모아 주시면 바자회에 큰 도움이 되겠다고도 덧붙였을 것이다.


그래서 오빠와 새언니는 고심 끝에 율이 동생, 린이의 새 분유를 하나 내놓았다. 책은 왠지 많이 나올 것 같고, 옷을 보니 마땅치 않고, 장난감도 그렇고... 그러다가 지난달 태어난 린이 몫으로 사놓은 분유 세트가 생각났다고. 백일까지 먹는 건데 4통을 세트로 사서 어차피 남을 것 같으니 이걸로 하자! 누군가의 맘에 들어 가져 가면 좋고, 그렇지 않더라도 일정한 과정을 거쳐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해진다고 했다. 나도 처음에는 엥? 왜 분유를 내놓았지? 했는데 나중에 듣고는 오 괜찮구만 했던 것.


'아기다리고기다리던' 바자회 날이 되어 '장난감 가게'를 맡은 율이는 새벽같이 길을 나서고, 새언니는 린이를 돌보느라, 오빠는 바자회 시간에 회의가 잡혀 못 가게 되었다. 아이고 어쩌나. 나도 마침 시골집에서 김장을 돕느라 아무도 못 가게 생겼는데 정말 다행히 율이 외할아버지께서 시간을 내 참석해 주시기로 하셨다. 한창 김장을 하고 있는데 오빠로부터 뿅뿅- 율이의 바자회 사진이 날아왔다. 회의 때문에 못 간다더니 어떻게 시간을 내어 갔나 보다. 율이의 목에는 떡하니 '장난감 가게 담당 누구'라고 쓰인 이름표가 걸려 있다. 귀엽고 사랑스럽다. 요 귀여운 녀석이 손님들에게 설명도 제법 야무지게 잘해 준비해 놓은 팔찌와 만화경을 다 팔았다고. 엄니, 아부지랑 셋이서 하하호호 웃으며 사진을 보다가 오빠는 뭘 샀냐고 하니 율이가 파는 팔찌랑 만화경을 하나씩 샀단다. 장인어른께서도 율이를 안고 사진을 찍으시고 아이들이 펼쳐 놓은 바자회장을 휘휘 둘러보시며 몇 가지 물건들을 구매하시는 것으로 훈훈하게 마무리.


...된 줄 알았는데! 글쎄, 장인어른께서 바자회에서 사 오신 물건들 중에 '분유 한 통'이 있었다.


스윽 슥 아이들 사이를 다니며 여기저기 구경하시던 장인어른의 눈에 문득 들어온 분유! 아이구 여기 아기 분유가 다 있네?? 오호 마침 백일까지 먹는 거라니 정말 잘 됐구만!! 바자회라 그런가 가격도 천 원밖에 안 하고 세상에, 어느 집인지 우리 막둥이 또래 아기가 있었나 보네.


그렇게 장인어른은 막내 손주를 위해 소중히 분유 한 통을 품에 안고 딸네 집에 가져다 놓으시고. 그 사실을 몰랐던 언니는 자신들이 보낸 분유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 것을 보곤 깜짝 놀랐다고. 게다가 오빠는 장인어른께서 품에 안고 오신 분유를 보며 설마 저게 그 분유일까 싶어 장인어른께 그 안에 든 게 무엇인지 진지하게 여쭈었다고 한다. 콩이나 팥 뭐 그런 특산품이 든 줄 알고. 사위의 질문에 장인어른께서도 응??? 하셨을 것 같다. 아니, 분유통에 든 게 분유지 자네는 뭐 그런 당연한 질문을...?


아무튼 이렇게 해서 다시 린이가 먹게 된 린이의 분유는 오늘도 얌전히 식탁 한편에 놓여 있다고. 아무래도 세상 모든 만물 사이에는 '인연'이란 게 깊고도 깊이 존재하는가 보다. 린이와 분유 사이에는 어떤 인연이 존재했던 것일까. 할아버지의 손주 사랑이 하마터면 툭 끊어질 뻔했던 둘 사이(아기와 분유라는 어마어마한 깊이)의 인연을 다시 이은 것일까.


율아, 린아. 분유도 먹고, 사랑도 먹고 쑥쑥 건강하게 크자.



그랬던 린이는 이제 밥도 잘 먹고, 뜀박질도 잘하는 귀여운 꼬마 아가씨가 되었다. 린이는 그곳이 어딘 줄도 모르고 미국에서 첫 돌을 맞았고, 두 돌을 지나 쑥 커서 돌아왔다. 영상 통화를 하다가, 그럼 린이는 이곳이 어디인 줄 아느냐고 물었더니 아무래도 잘 모르겠는지 묵묵부답이다. 옆에서 율이가 '한국'이라고 속삭이자 조그마한 목소리로 '한국이에요' 했다. 그래, 한국이야 여기는. 린이가 내 말을 아는지 모르는지 네모난 화면 속에서 배시시 웃었다. 저 웃음을 오래오래 지켜주고 싶다. 아이들이 다 자랄 때까지는, 나도 좀 더 단단한 울타리가 되어 주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며 여름의 첫날을 맞는다.


율이와 린이를 만나려면, 여름이 조금 더 짙어져야겠다.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계절이 이토록 푸른 것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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