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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May 24. 2021

그 사람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소림사 그 친구에 관한 짧은 기록



이태준의 단편 <달밤>에는 바보 같고 어수룩한 주인공 '황수건'이 등장한다. 지식인이자 관찰자인 '나'의 눈에 황수건은 어쩐지 애틋하고 안타깝게 느껴지는 인물이다. 첫 만남부터가 그랬다. 신문 배달을 올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슥 들어온 수건은 신문은 안 내놓고 대뜸 초면에 하기 힘든 말들만 주워섬긴다. 아 왜 하필이면 이런 촌 구석탱이로 이사를 왔는지 어쩌구 저쩌구. '나'는 기가 막히지만 일단 그의 말에 장단을 맞춰 주며 동네에 몇 없는, 아니 거의 없는 그의 친구가 된다.


얼마 전 <달밤>을 다시 읽었다.

<달밤>은 말하자면, 황수건이라는 자의 실패기이다. 일생의 꿈이 신문 원배달인데, 원배달은커녕 보조 배달 자리에서도 가차 없이 쫓겨난다. 이 사실을 안 '나'가 안타까운 마음에 대 준 자금으로 참외 장사를 시작하지만 그것도 얼마 못 가 말아먹는다. 그래도 은혜는 갚고 싶어 어느 날 밤 불쑥 '나' 앞에 나타나 큼지막한 포도 다섯 송이를 내놓는데 그건 포도밭에서 훔친 것이었다. 황수건은 뒤따라 온 포도밭 주인에게 끌려나가다 '나'가 내어 준 포도값 덕분에 간신히 풀려난다. 그사이 동네에는 황수건의 아내가 도망갔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다. '나'는 수건의 안부를 궁금해하던 어느 청명한 달밤 아래에서 서툴게 일본 가요를 부르며 걸어가는 수건을 본다.


그 후 황수건은 어떻게 살았을까.


책을 덮고 가만히 창 밖을 내다보고 있노라니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1990년대 초반, 어릴 적 살던 동네에는 <소림사>라는 중국집이 있었다. 이름은 그럴듯했지만 오래되어 낡고, 노포 가운데 그런 곳이 이따금 있듯 위생관념도 아주 철저하지는 못해 식탁이나 그릇에 조금씩 여운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엄니는 그런 <소림사>보다 <영빈관>을 더 선호하셨다. <영빈관>은 좀 더 먼 곳에 있어 배달을 시키면 한참 만에야 왔고, 양도 가격에 비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아 깨끗한 곳이었다. 반면, <소림사>는 양 하나는 끝내주게 많아 요즘으로 치면 가성비가 훌륭한 곳이었다. 아부지는 <소림사>를 더 좋아하셨는데, 그래서 합의를 본 것이 가서 먹을 때는 <영빈관>, 시켜 먹을 때는 <소림사>였다. 오빠는 <영빈관>, 나는 <소림사>파였다.


소림사라니! 이름부터가 마음에 쏙 들었다. 정말 끝내준다. 주문을 할 때 아부지가 '거기 소림사죠?'하는 것도 왠지 멋있었고,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네, 소림삽니다'하는 대답도 무진장 특별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은근히 <영빈관>보다 <소림사>가 더 잘 되기를 바랐지만, 어쩐지 기억에는 <영빈관>이 날로 번창했던 풍경밖에는 남은 것이 없다.


사실 아부지와 내가 <소림사>를 더 특별히 여겼던 데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소림사>에는 당시 '사춘기'라는 드라마로 인기 가도를 달리던 탤런트 정준을 닮은 열대여섯 살 된 배달 오빠가 한 명 있었다. 어쩌면 스무 살이 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때는 무척 어려 보이고 또 어느 때는 엄청 커 보여 나이를 종잡을 수 없었던 그 오빠에게는 특별한 면모가 있었다. 정확히 어땠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너무 어렸었고, 그 오빠만 나타나면 어쩐지 겁이 나 아부지 등 뒤로 숨거나 손을 꼭 붙들고 내뺄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왜 그리 무섬증을 느꼈을까 생각해 보니 대화가 잘 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하면 어, 그래 하거나 응 정도는 나와야 내 다음 할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거나 하는데, 인사를 하면 그저 헤헤헷 하거나 히히히히 하거나 아니면 얼굴을 불쑥 디밀거나 해서 나를 놀래켰던 기억이 난다. 동네에서는 마음 아프게도 '바보'라 불리는 것 같았다. 동네 어린애들도 가끔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럴 때면 난처하게 웃으며 그냥 못 들은 척했다.


그 오빠와 울 아부지가 친구였기 때문이다.



아부지는, 솔직히 말하자면 사회생활에 능한 분은 아니셨다. 엄니 말씀에 따르면 능하기는커녕 아주 부족한 편이라고. 그래서 혼자 하는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인데 인생이 뜻한 대로만은 풀리지 않아 작은 회사들을 전전하며 내적으로 아주 고생하셨다고 한다. 자식들이 대체로 그렇듯 나는 그런 깊은 속내까지는 모르고 자랐다. 부모가 어떤 사람들인지를 깨닫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자식들이 자라야 하기 때문이다. 이만큼 살아온 시점에서야 겨우 돌아보니, 아부지는 땅과 자연, 동식물과 함께 할 때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사람이었다. 말주변이 좀 부족하시기도 했지만, 우선 사람들 사이에서 북적이며 사는 일을 힘들어하셨다. 씨를 뿌리면 자라는 식물들과 자신을 돌보면 충성을 맹세하며 따르는 강아지, 고양이, 오리 사이에서나 아부지의 서툰 말들은 빛을 발했다. 그래서 아부지의 친구들은 주로 말 없는 동식물이나, 사회에서 말이 안 통한다며 소외되어 버린 소수의 사람들인 경우가 많았다.


배달 오빠와 아부지가 마주 서 있는 풍경을 처음 발견한 것은 어느 일요일 오후였다.

짜장면을 시켜 먹기로 했는데 <소림사>에서 전화를 안 받는다며 문 열었나 가 본다고 나가신 아부지. 한참이 지나도 안 오셔서 이번에는 오빠와 내가 찾으러 나섰는데, 저 멀리 동네 입구에서 두런두런 대화를 하며 웃고 있는 아부지를 발견한 것이었다. 맞은편에는 어쩐 일인지 <소림사>의 배달 오빠가 서 있었다. 아빠, 라고 부를 엄두도 못 내고 주춤이고 있는데 오빠가 먼저 아빠를 불렀고, 돌아보신 아부지는 손짓을 하며 곧 간다는 표시를 하셨다. 아빠, 소림사는 문 안 연대요? 아빠, 저 오빠랑 뭐 하셨어요? 짜장면 배달이 안 되면 <영빈관>에 가야 하나 싶은 오빠도 마음이 급하고, 저 배달 오빠와 아빠가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한 나도 마음이 급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아부지의 대답은 세상 심플했다.


오이 사 오는 길이라 하더라.


그러고 보니 배달 오빠 손에 검은 봉지가 들려 있던 것 같기도 하다. 오이를 사 온다면 재료가 떨어졌다는 소린가. 그래서 문은? 연다는 소린가, 안 연다는 소린가. 안 연다면 지금 당장은 안 연다는 소린가 오늘 하루를 안 연다는 소린가. 궁금해하는데 아부지가 '짜장면은 곧 갖다 주신대'라고 하셨다. <영빈관>을 좋아했던 오빠는 어땠을지 몰라도 나는 <소림사> 짜장면을 먹을 수 있어 좋았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딩동 딩동 초인종을 누른 배달 오빠는 짜장면을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고 군만두를 내밀며 히히힛 웃었다. 말은 잘 안 통했지만 배달도 잘 다니고 거스름돈도 꼬박꼬박 잘 챙겨가는 것을 보면 일을 곧잘 하는 편이었던 것 같다. 배달 오빠가 어떻게 <소림사>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소림사> 주인장 내외의 아들이었을까. 얼굴이 닮았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소림사> 홀에 가서 먹은 기억이 많이 없기 때문이다.


한 번인가 아부지와 둘이 점심을 먹게 된 어느 주말 오후에 <소림사>에 직접 가서 먹은 적이 있다. 그때 배달 오빠가 무척 반가워하며 우리 부녀를 살뜰히 챙겨주었던 기억이 난다. 단무지도 막 더 가져다주고, 멀찍이서 이쪽을 바라보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히히힛 하고 웃었다. 그 이후에도 몇 번인가 길에서 배달 오빠와 마주친 아부지가 나란히 서서 무슨 이야기인가를 주고받으며 하하하 웃으시던 장면이 머릿속에 남아 있다. 무슨 얘기 하셨어요? 라고 물으면 아부지는 '얘기는 무슨 얘기 그냥 인사하는 거지'라고만 하셨다. 아부지는 멀리 배달 오빠가 철가방을 들고 지나가면 '어디 가아?'하고 꼭 물어보셨다. 그럼 배달 오빠는 저쪽을 가리키며 철가방을 툭툭 쳤다. 그게 서로의 인사였을까. 그러고 보면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에 언어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 오히려 언어가 만드는 불필요한 오해가 서로에 대한 이해를 더욱 어렵게  하는 일도 많듯이.



언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배달 오빠를 '바보'라고 부르는 말을 듣고 나도 더럭 겁이 나 좀 더 다가가지 못했던 것이 내내 아쉽다. 꾀부릴 줄 모르고 잘 웃고 한결같이 성실했던 소림사의 그 오빠는 지금쯤 어디에서 무얼하고 있을까. 우리가 살던 동네에 더 근사하고 멋진 음식점들이 많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어느 날인가 결국 <소림사>도 문을 닫았다. 나는 정말로 한 세계가 닫혀 버린 것처럼 속상해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영빈관>이나 시내의 <북경장> 같은 근사한 선택지들이 남아 있었지만 그곳에서는 <소림사>가 주는 특별함을 찾을 수 없었다.


<소림사> 가족들은 그 후로 어디로 갔을까. 이따금 배달 오빠의 안부가 궁금한 순간이 있었다. 젊었던 40대의 아부지는 어느덧 70세 할아버지가 되어 땅을 파고 씨를 뿌리며 살고 계신데, 배달 오빠도 중년의 아저씨가 되었겠다. 그가 어디에서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고 있기를 바란다. 나는 살면서 그렇게 맑은 사람을 몇 보지 못했다. 아부지도 언젠가 그런 말씀을 하셨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생명들이라서 좋아. 배달 오빠만을 지칭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랑 살고 있는 진돗개 엄지, 함께 살았던 강아지들 장군이, 마루, 볼피에다가 오리인 쭈쭈들까지 모두를 포함한 말씀이셨다. 거짓을 잘 말할 줄 몰라서 입이 무거운 아부지는 그래서 말씀이 유려하지 못하시다. 내가 운전할 때 '어어, 위험해!'가 '어어, 죽어!'로 나오는 것도 그래서일 테지. 살아가자면 으레 거짓말도 좀 하고, 윤택하게 어떤 순간들을 넘을 수 있어야 하지만 그게 잘 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 사람들이 살아가자니 이 세상에서는 필연적으로 어딘가 조금씩 부서지고 마모되는 것일 테다. 그래도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이 상처 받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부서지고 희미해지더라도 끝내 맑은 품성을 지켜 내 '끝까지 내 자신으로 살았다'라고 크게 외쳐 주었으면 좋겠다. 그런 맑은 생명들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나 같은 사람이 분명히 또 있을 것이라고, 아주 많을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아부지는 잠시 곁에 머물다 떠난 '소림사 그 친구'를 기억하고 계실까. 시골에 내려가면 여쭈어 보아야겠다. 분명히 기억하실 게다. 나처럼 그의 안부를 궁금해하시겠지.


지금쯤 그 친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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