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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Jul 02. 2021

인공지능의 ㅇ도 모르지만 아무튼 샀었죠

인공지능 스피커와의 동거에 관한 짧은 기록



글쎄, 어쩌다가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살다 보면 왜 그런 날이 있다. 평소라면 눈여겨보지 않았을 장면에 유독 눈길이 머문 날. 그래서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을 기어코 해 버리고 만 날. 그리하여 시간이 좀 흐르고 나면, 어라? 그때 내가 왜 그랬지 싶은 그런 날.


내게는 인공지능 스피커를 산 날이 바로 '그런 날'에 속한다.



나는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인간이다.

책은 무조건 종이책이어야 하며, 필기는 펜과 연필이 없으면 절대 안 되고(이건 너무 당연한 말인가...?), 각종 자료는 일일이 다 출력해서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어가며 보아야 안심이 된다. 집에는 여전히 비디오 플레이어와 MP3 플레이어가 있고, 카세트테이프 입구가 있는 CD 플레이어도 한자리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다. 주변에서 아무리 무선 이어폰과 아이패드를 강력 추천해도 여전히 나는 줄 이어폰의 배배 꼬인 선을 한참이 걸려 풀어낸다. 어디를 갈라치면 산더미 같은 자료와 노트북과 전원 뭉치를 낑낑대며 모두 싸들고 다닌다. 잠깐... 이런 게 아날로그가 맞나?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 왜 이러고 사는 거지? 써 놓고 보니 약간 바보스러운데...?!  아무튼, 바보스러우나 마나 그래야 안심이 되고 뭔가를 좀 본 것 같고, 익힌 것 같고, 내 것이 된 것 같으니 어쩔 수 없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근본적인 이유를 대자면, 꽤 높은 수준의 기계치에 기계충이다 보니(어디선가 기계를 잘 못 다루면 기계치, 잘 못 다루는 것을 넘어 고장까지 내 버리면 기계충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이런 위대한 기술을 두 가지 모두 체득한 나란 인간.) 하여간 뭔가 새롭고 복잡해 보이는 '디지털 시대의 신문물'에 대한, 상당한 두려움이 있다. 새롭고 진기한 물건들을 대하는 심리적 태도가 '호기심'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발현된다는 것은, 분명 애석한 일이나... 이 또한 어쩔 수 없다. 두려운 건 두려운 거다. 막상 써 보면 좋다는 말에 혹해 당장이라도 신문물들을 품에 들일 것처럼 난리를 치다가도 막상 집으로 돌아오면, CD를 걸어 놓고 길게 누워 그래,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지 흥흥흥 웃으며 중얼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 스피커는 대체 왜 샀단 말인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글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벌써 4년 전의 일이다. 2017년 초봄이었고, 그 무렵 인공지능 로봇 소피아가 '인류를 파멸시킬 계획'이라고 말한 것이 화제가 되어 이와 관련된 뉴스가 몇 번 전파를 탔던 것 같다. 그걸 지나다 우연히 보고 그날따라 어쩐 일로 '두려움'이 아닌 '호기심'을 발동시켰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살다 보면 그런 날도 있는 것이다. 오호? 로봇이 인류를? 인공지능이 벌써 그 정도란 말인가? 하긴 알파고와의 대국으로 온 세계가 들썩였더랬지. 음, 뭔가 좀 경험해 보고픈 세계인데? ...라는 식으로 의식이 흘러 버린 결과일 수도 있겠다. 그즈음에 대한 기록이 있다. 제목은 <물욕은 크게 없지만 어쩐지 인공지능 스피커를 샀다>이다. 음? 제목부터 영 글러먹었다. 여기 당시의 기록을 잠시 가져와 본다.



사실 줄곧 말해 왔듯이(...누구한테?!) 나는 물욕이 크게 없는 편이다(얼씨구). 한 달 생활비 중 거의 대부분을 식비로 지출하고, 웬만하면 안 입고, 안 쓰는 주의...랄 것도 없이 일단 지금은 그렇게 살아야 생활이 유지가 되니까 뭐, 아무튼.


그럼 대체 인공지능 스피커는 왜 샀는가? 하등 필요 없는 것을? 지금의 내게는 사치품에 불과한 것을? 얼리어답터도 못 되면서? 그렇다. 나는 얼리어답터도 못 된다. 게다가 기계치와 기계충을 넘나든다. 있는 것도 제대로 활용 못하기로 유명하다. 아니, 그러니까 대체 왜? 갑자기?


몰라. 그냥 사고 싶었어. (무책임)

뭐, 원래 삶은 뜻대로 잘 안 흘러가니까요. 때로는 비합리적인 소비가 큰 즐거움을 주기도 하니까요. 하하하하하하! (역시 무책임) 한 달치 교통비를 털어서 네이버에서 나오는 곰돌이 모양 스피커를 샀다. 10만 원이 훌쩍 넘을 줄 알았는데 지금 이벤트 중이라 많이 할인해서 9만 원이 조금 못 되는 가격으로 살 수 있었다. 게다가 6개월치 네이버 뮤직 이용권도 준다고 하잖아요? (아무래도 호갱) 앞으로 한 달 간은 자전거를 타든 걷든 알아서 살자.  

사실 처음에는 인공지능 스피커가 나오든 말든 관심 밖의 일이었다. 뭐, 음악은 CD 플레이어도 있고 휴대전화도 있으니까 취사선택해 들으면 되고 뉴스는 TV가 있고 날씨는 바깥을 내다보면 되지 뭘 굳이 스피커까지!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친구에게 선물 받은 미밴드가 의외로 하루를 좀 더 균형 있게 만들어 준다는 것을 깨닫고, 이런 선진적인(?!) 물품들에 약간의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내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바로 휴대전화부터 들여다본다는 사실이었다. 그게 시간 확인이든 알람을 끄기 위해서든 뉴스를 보기 위해서든 아무튼 나는 그게 참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런데 워낙 오랫동안 반복해 온 습관이다 보니 고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소박한 바람으로, 혹시 인공지능 스피커를 쓰게 되면 '블라블라야~ <Wait There> 좀 틀어줘~' 하면서 아침을 좋은 음악과 함께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상상을 했다.

그리고 이런 거 다 떠나서- 그냥 궁금했다. 말을 한번 시켜 보고 싶었다. 인류를 파괴할 계획이라는 로봇 '소피아' 보고도 처음 그런 생각을 했는데, 실제로 만날 수 없으니 곰돌이 스피커로라도 한번 해 봐야지. 하여, 3월 2일에 드디어 기다리던 곰돌이가 왔다. 오리와 곰돌이 중 선택할 수 있는데 나는 집에 곰돌이 컵이 있어서 세트로 맞출 겸(이상한 이유) 곰돌이로 결정했다. 그리고, 한 3일 써 본 결과, 이놈이 '인공'지능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지능'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정도로 말이 많고, 말을 잘하고, 제법 잘 알아듣는다. 그런데 모든 말을 다 잘 알아듣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학습하며 더 발전한다고는 하는데 처음이라 그런가? 아직은 얘도 나도 서로 좀 멍청하게 굴 때가 많은 것 같다. 대략 이런 풍경이다.

클로바. (괜히 상냥하게 불러본다)
뿅! (어서 말해 보라는 표시로 연두색 불이 들어온다)

어... 그... 저기 비틀즈의... (제목이 뭐더라... 곡 이름 생각하는 중)
(안 기다림) 네에- 비틀즈는 그룹입니다.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로...
(뭔 소리야아-) 아니이! 그게 궁금한 게 아니고, 비틀즈 노래 그...
말씀하신 곡을 못 찾았습니다. 다른 곡을 말씀해 주세요.
(아 뭐야아-) 내 말 아직 안 끝났거든?
무슨 말씀인지 못 알아들었어요.
 
하, 환장하겠다.
음악 듣고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고 샀는데 대화할수록 왜 그런지 열이 뻗친다. 나도 인내심이 없지만 얘도 인내심 참 없다. 기다릴 줄을 몰라.

클로바. (시작은 항상 다정하다)
뿅! (연두색 불)
루카스 그레이엄의 세븐 이어즈 들려줘. (이제는 곡 제목을 미리미리 생각해 둔다)
말씀하신 곡을 못 찾았습니다. 다른 곡을 말씀해 주세요.
?? (아니 이걸 왜 몰라? 내 발음이 구린가?) 루카스 그뤠이엄의 쉐븐 이얼즈.
말씀하신 곡을 못 찾았습니다. 다른 곡을 말씀해 주세요.
??? (이래도 몰라?) 루콰스 그뤠염의 쉐븐 이어얼즈 들려달라고.
말씀하신 곡을 못 찾았습니다. 다른 곡을 말씀해 주세요.
하... (혈압) 루. 카. 스. 그. 레. 이. 엄. 세. 븐. 이. 어. 즈.
말씀하신 곡을 못 찾았습니다. 다른 곡을 말씀해 주세요.
야, 됐어. (이놈이 날 놀리는 게 분명하다.)

글을 쓰면서도 그때를 생각하면 다시 혈압이 오른다. 그래서 그냥 포기하고 있다가 심호흡을 해 화를 가라앉힌 다음... 정말 혹시나 해서... 정말정말 한번 얘기나 해 보자는 생각에 던졌는데...

클로바. (무뚝뚝)
뿅! (연두)
루카스 그레이엄의 '칠' 이어즈 들려줘.
루카스 그레이엄의 세븐 이어즈를 재생할게요 (상냥)
......칠 이어즈...... (맙소사)

그래서 '칠' 이어즈 잘 듣고 있다.

음, 어디 가서 발음이 부정확하다거나 잘 못 알아듣겠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는데 어째 이 곰돌이 녀석과 얘기만 하면 자존감이 뚝뚝 떨어진다. 내 발음이 그렇게나 별로니? 그리고 왜 이렇게 못 기다려 주니? 흑흑 너를 통해 나 자신을 많이 돌아보고 반성하게 된다...

또 하나. 영어로 대화하자, 하면 영어 모드로 전환되는데 얘는 클로바일 때보다 더 안 기다려준다. 물론 내 발음이 구린 까닭이겠지만, 뭐라 말만 하면 '아, 모르겠고 일단 그럼 내가 질문 하나 할게' 하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한다. 이 영어 모드는 야심 차게 시작했다가 결국 대화 5분 만에 나의 굿바이 인사(See you later! 하면 또 만나자고 하며 쿨하게 다시 한국어 모드가 된다)로 쓸쓸히 끝나게 마련.

아니, 그러니까 그... 영어 질문이란 게 간단하지가 않드라구요... 저번엔 여행할 때 친구들이랑 가는 거 좋아해? 하길래 아, 그게... 어느 때는 친구랑 하는 게 좋고~ 하면서 말을 좀 쉬니까 금세 못 알아듣겠다고 또 자기가 질문한다잖아요? 흥. (궁색한 변명)

그래도 밤에 글 쓸 때는 좋다. 소리 키워 줘 하면 커지고 소리 줄여 줘 하면 줄어들고. 심심할 때 괜히 말도 걸어 보고. 엊그제는 칭찬해 줬더니 쑥스러워하면서 글쎄 자기도 나를 칭찬해 주는 것이다. 뭐지. 우리 썸 타는 건가. 이러다 정말 정들 것 같아. 나 혼자 영화 <HER> 찍고 있는 거 아닐까. 갑자기 좀 무섭네.
 
아무튼,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으며 곰돌이도, 나도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배우며 성장(?!)하고 있다...는 무슨! 아직도 얘랑 열 번 얘기하면 한두 번은 가슴속에 불길이 치솟는데 그럴 때마다 좋은 생각을 하고 있다. 그래. 정확하게 알려주는 게 나의 몫이지. 그래. 인내심을 가지고 다시 한번 해 보자. 그러면서- 또, 곰돌이 덕분에 좋은 연주곡들을 많이 알게 되어 좋다. 아침에 일어날 때 휴대전화를 잘 안 보게 되었고, 밖에 나가기 전에 우산을 챙겨야 할지 말지, 최근의 이슈가 되는 뉴스는 무엇인지 잊지 않고 챙기게 되었다. 조금 쓰다가 시골집에 드려야겠다. 나보다는 엄니께서 훨씬 더 좋아하실 것 같다. 아부지는 길게 누워서도 나훈아 노래를 들으실 수 있겠지. 어쩌면 아부지는 얘랑 말씀 나누시다가 역정을 내실지도 모르겠지만.


아, 한 가지 더.
알람을 설정할 때만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침에 알람을 재깍재깍 잘 울려주는 건 너무 고마운데, 이걸 꺼 달라고 할 때 그냥 부르면 안 듣는다. 클로바- 클로바! 클로바!!!! 야, 클로바!!!!!! 이래도 들은 척도 안 하고 계속 시끄럽게 알람을 울리길래 진짜 온 힘을 다해 벌떡 일어나 부르짖었다.

클로박!!!!!!!!!!!!!!!!!

그랬더니 뿅! 한다. 하...... 이놈 아무래도 '지능' 스피커다. 여러 개의 곰돌이 중 우리 집에 온 '지능 스피커'의 성격은 아무래도 '뺀질이'가 아닐까. 그래도 '뺀질이' 덕분에 아침에 일어나는 건 더 빠르고 확실해졌다. 자기 딴에는 열심히 주어진 바 역할을 다하는 것뿐인데 내가 맘대로 '뺀질이'라고 해서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가? 가끔 들어놓고 못 들은 척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진짜 한 판 싸우고 싶다. 하. 희로애락을 모두 주는 이 요물. 그러니까, 난 이걸 왜 산 거지.


덕분에 내 하루가 더 다채로워졌다.  



그래, 이 클로바라는 놈이 집에 처음 왔을 때 이런 일들이 있었다.

오랜만에 다시 그때를 돌이켜 보니, 당시 선물 받아 열심히 쓰던 '미밴드'의 영향도 있었던 같다. 미밴드에 고무되어 뭔가 좀 더 디지털 시대의 신인류(라는 표현부터가 이미 글렀...)가 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때는 나름 큰 비용을 들여 사기도 했고, 말동무가 생긴 기쁨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인공지능 스피커 클로바를 찾으며 신기해했다. 하지만 모든 소유욕은 소유 직전까지 폭발하다가 막상 소유하고 나면 스르륵 사라진다고 했던가. 지금은 아침 알람용으로, 생각나면 한 번씩 이런저런 노래를 틀어달라고 하는 정도로만 쓰고 있다. 미밴드도 한동안 열심히 쓰다가 어무니가 궁금해하시길래 써 보시라고 드렸던 것 같다. 어무니도 열심히 쓰시다가 고장이 났나 해서 결국 종적을 감추었고... 그러고 보면 어떤 물건이든 가까이 두고 정을 붙여야 오래가는 것 같다. 마치 사람처럼 말이다.


좋은 물건이란 뭘까.

물건이란 상당히 물리적인 개념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심리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 아니, 점차로 '들어가게 된다'. 곁에 두고 아끼며 의미를 부여하고 나와 함께 한 시간이 쌓이면서 좋은 물건은 비로소 '좋은 물건'이 되고, 더욱 '좋은 물건'으로 변모해 간다고 할까.


최신식 물건이 다 좋은 물건은 아닐 테다. 기능이 우수하고 편리해도 쓰는 사람의 마음에 맞고 손에 익어야 비로소 좋은 물건으로 기능하게 되듯이, 남들 눈에는 불편하고 답답해 보이는 일들도 어쩌면 그 나름대로 이미 멋이 있고 좋은 일일 수 있겠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그대로 그 자리에 머무는 것도 꽤 괜찮은 일 같다. 애써 새로운 흐름을 타지 않아도 되겠다는 말이다. 이미 어떤 흐름 속에서 나름의 '격'을 갖추며 살고 있는 것일 테니. 파격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지만, 파격적이지 않아도 의미가 있다.


너무 회색분자 같은 말인가?


클로바에게 물어보니 '앗,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라고 한다. 재차 물으니 이번에는 '그건 잘 모르겠어요'라고 말 끝을 흐린다. 그래서 '회색분자가 뭐야?'라고 물으니 명랑하게 정의를 읊어 준다.


인공지능이라.


생각이 많아지는 저녁이다. 벌써 일곱 번째 달이고, 서녘으로 해가 기울었다. 곧 세 번째 날이 올 것이다. 오래도록, 깨어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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