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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Jul 24. 2021

카레가 먹고 싶다고 괜히 그랬다

엄니와 생일 선물에 관한 짧은 기록



이제는 여름인가 싶은 봄의 끝자락에 생일이 있다. 원래는 한창 소나기가 내리고 장마 전선이 전국을 덮을 때가 생일이어야 하지만, 두 달 가까이 일찍 튀어나오는 바람에 계절도 바꾸어 버렸다. 그러고 보면 니가 날짜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골랐어. 어느 날 엄니가 그러셨다. 왜요? 애들이 마악 시험을 끝내고 마음이 얼마나 한가로울 때니. 그렇죠. 방학도 아니고. 그렇죠. 새 학기 지나고 서로 어느 정도 친해졌을 때잖아. 그렇죠... 참 좋은 때야. 그렇...죠?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좋은 계절이라는 생각은 한다. 청명하고 고요한 한낮, 꽃 향내가 섞여 더욱 그윽해져 가는 밤. 돌잔치 날, 한창 흐드러지게 핀 아카시아꽃을 한 다발 마련해 오신 큰아버지의 로맨틱한 선물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이거... 꽃... 거, 나중에 보면은, 아주... 저기 뭐시여... 아주 기억에 남을 겁니다, 예에..."


아부지와 나이 차만 많이 나셨지 말주변도, 성격도 아부지랑 꼭 같은 큰아버지는 이제 멀리 계신다. 흐드러지게 핀 아카시아꽃만 사진 속에 남겨 두시고서. 돌잔치 날 니가 내내 우는 바람에 아주 정신을 쏙 뺐어. 전 왜 그랬을까요. 큰 맘먹고 사진 찍는 사람까지 불렀는데. 아, 진짜요... 처음 보는 사람이라 낯설어서 그랬겠지. 아무리 그래도 한 번쯤은 웃지 않았나요. 내내 울어서 그냥 우는 걸 찍었어. 사진 보면 너 울고 있잖니. 정말 민폐였네요. 아기가 뭘 아니. 그래도 좀... 처음 조바위를 씌웠더니 그게 좋아서 그때는 잠깐 가만히 있더라. 아, 그럼 그때 사진을 딱!! 그건 돌 전날이었어. 하긴 지나도 너무 지난 이야기이다. 돌잔치라니. 몇 해 전인지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그런데도 엄니는 해마다 내 생일이 되면 바로 어제 일처럼 다시 또 즐겁게 말씀하신다. 글쎄, 조바위를 씌워 놓으니 아주 귀엽더라고. ...ㄴㅖ??


아무리 봐도 그건 아니다. 귀엽지 않다. 힘껏 우느라 그나마 간신히 쓰고 있던 조바위도 비뚤어졌다. 음, 귀엽지 않습니다. 아무리 봐도.



아무튼 올해도 그런 계절이 왔고, 엄니는 이틀 전부터 전화를 해 뭐가 먹고 싶은지, 뭐가 필요한지를 집요하게(?) 물어보셨다. 우리 집은 '생일 케이크'와 '미역국'에 매우 진심인 편이라 최대한 같이 모여 미역국을 먹고, 생일 케이크에 촛불도 꼭 켜야 한다. 얼결에 모이기는 했지만 막상 축하 노래를 하려니 쑥스러워서 시작할 때는 서로 눈치도 좀 보며 엉성하게 시작한다. 그래도 곧 목청을 높여 끝까지 다 부르고야 만다. '사랑하~는' 할 때 목소리가 작아지며 조금씩 떨리는 건 아무래도 소심하고 내성적인 집안 내력이다. 물론 박수도 쳐야 한다. 사춘기 때나, 스무 살 때나, 서른 때나 그 너머나 언제나 그래 왔다. 만약 멀리 있어 모이는 것이 어렵다면 이원, 삼원 중계를 해서라도 영상 속에서 노래를 하고 박수를 친다. 다른 날은 몰라도 이제 내 생일에는 정말... 정말 안 해도 되는데... 오빠네가 미국으로 가기 전까지 엄니에 오빠네 가족까지 몰려와 작은 집을 꽉 채우고 옹기종기 모여 노래를 불렀다. 여름에 있는 언니 생일에, 겨울에 있는 오빠 생일에 내가 달려갔음은 물론이다. 올해는 코로나로 상황이 여의치 않은 데다 오빠네 가족이 귀국행 비행기에 오르는 날과 겹쳐 엄니만 올라오셨다. 미역부터 소고기, 카레에 각종 채소와 김치까지. 가뜩이나 작고 아담한 엄니의 키가 더 줄어드는 것은 아무래도 나 때문인 것 같다. 내 생일 때문인 것 같다. 카레가 먹고 싶다고 괜히 그랬다. 생각나는 게 없어 그냥 던진 말인데. 당근에 양파, 애호박까지 들고 오실 줄은 몰랐다. 엄니, 저희 집 앞 마트에도 이거 다 파는데용. 엄니는 들으려는 노력도 크게 아니하시고 분주하시다. 미역을 불리고 밥을 새로 짓고 소고기 핏물을 빼고.


얘, 케이크 사야지!

억, 진짜 안 사도 되는데...

얘는! 생일엔 케이크가 있어야지.  


지갑을 들고 벌써 문밖으로 나가신다. '아, 정말 괜찮은데'를 연발하며 쭈뼛쭈뼛 따라나섰다. 나이는 다 어디로 먹은 걸까. 이 좋은 봄날, 평일 한낮에 반백수가 되어 아무 '일' 없이 살고 있는 딸, 이라는 게 마음이 여간 무거운 게 아니다. 그나마 드문드문 들어오던 일도 코로나로 죄 끊기고 사라지고, 요새 남은 것은 한낮의 고요한 시간과 미친 듯이 천천히 흐르는 오후뿐인데 어쩌면 좋지. 에라, 모르겠다. 언제는 뭐 더 나았나. 어떻게든 되겠지. 뭐라도 하겠지. 그래, 뭐라도 하고 뭐라도 되겠지. 안 되면 그만이고. 중얼거리며 집 앞 가게에 도착했다. 가장 작은 생크림 케이크를 하나 골랐다. 이렇게 올해도 생일 케이크 촛불 켜기와 박수 및 노래 대잔치를 하는구나. 웬만해서는 시골에서 미동도 않으시는 아부지께서는 오늘도 영상 속에서 박수만 치실 예정이다. 그런데 맙소사! 초가 너무 많다. 세 개만 꽂기로 했다. 세 살의 곱절, 곱곱절은 곱해야겠지만. 초저녁이면 주무시는 아부지의 성화로 저녁 다섯 시에 초를 꽂고 노래를 불렀다. 오빠네는 비행기 탑승 사진을 찍어 보내왔다. 내년 생일에는 다 같이 모일 수 있겠구나. 엄니가 흐뭇하게 말씀하셨다. 녜?? 내년에도, 심지어 다 같이요??!



생각해 보면, 생일에 내가 축하받을 이유는 크게 없는 것 같다. 고생하신 것은 엄니, 아부지, 그리고 아직 어렸던 오빠. 세상에 태어난 지 18개월 만에 내가 나와서 어리광 한번 제대로 부려 보지도 못하고 영원히 '첫째'가 되어 버린 사람. 그런 생각을 하면 무척 미안한 마음이 든다. 우리 중 아무도 그런 것을 결정하지 않았지만 어쩌다가 우리는 이렇게 형제가 되고 부모-자식이 되고 가족이 되었을까. 자식의 생일이 뭐길래 엄니는 벌써 수십 해를 지치지도 않으시고 꼬박꼬박 달려와 곁에 머물러 주시는 걸까. '감사하다'라는 말로는 부족할 무언가 이상스런 마음이 든다.


생일 축하 다음 날 엄니가 시골에 다시 내려가시기 전 나들이를 가자고 하셨다. 어디를 갈까요. 3년쯤 전엔가는 둘이서 서대문 형무소역사관에 갔다. 영화를 보러 나간 참이었는데 하늘이 괜히 너무 푸르러서 슬퍼지고 만 까닭이었다. 엄니는 서대문 형무소역사관 기념숍에서 무궁화와 태극기 배지를 사 주셨다. 생일 선물이었다. 자주 들고 다니는 가방에 달아놓으니 볼 때마다 그날 오후가 생각난다. 내가 가자는 대로 가시고, 내가 하자는 대로 하시는 엄니. 그날이 특별한 날이어서 그랬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쉬이 접힐 마음이겠지. 이렇게 오래도록, 내가 난 후로 계속해서 피어오르고 여전히 뜨겁고 날마다 생생한 마음, 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솟아나는 걸까. 그런 마음은 어디에서 흘러와서 오래도록 머물고 있는 걸까. 나도 살아가며 평생에 한 번쯤은 가져 볼 수 있을까. 그런 마음 때문에 엄니가 힘드실까 봐 오래오래 눈치를 보는 중인데 엄니는 언제나처럼 화사하시고 명랑하시다. 아부지를 98% 닮고 엄니는 겨우 2% 정도만 닮은 것이 애석하다(짐작 가능하다시피 엄니 성향의 98%는 오빠에게 갔다. 이렇듯 유전자의 불균형한 배치 사태는 꽤 자주 목격된다). 나도 잘하면 캐럴라인 냅처럼 <명랑한 은둔자>가 혹은 '은둔한 명랑자'가 될 수 있었는데!!


얘, 이거 어떠니?


결국 발길이 닿은 곳은 집 근처 동네 서점. 꽤 큰 서점이다. 후룩후룩 책들을 넘겨 보고 있는데 멀리서 도도도도 달려오신 엄니가 뭔가를 내미신다. 억, 이게 뭔가요?? 얘, 귀엽지? 이거 텔레비전 앞에 늘어놓으면 아주 귀여워. 너도 하나 사. 이런 걸 뭐라고 하지. 인테리어용 강아지 인형? 강아지 모형? 나라면 관심이 전혀 없어 있는지조차 모르고 지나쳤을 코너에 엄니는 오랫동안 머무르신다. 얘, 난 강아지 살 건데 넌 이거 어떠니? 이번엔 고양이다. 만 원에 작은 고양이 인형이 한 열 마리는 족히 들어 있다. 아, 저는 괜찮은데요. 엄니만 사셔요. 아이 그래두 생일인데 고양이 별로면 다른 거 뭐 하나 골라 봐. 아니, 진짜 괜찮은데요. 아이, 그래도 생일이니까. 진짜 정말 괜찮아용. 왜, 고양이 안 예뻐? 아니, 안 이쁜 건 아닌데... 게임 끝. 엄니는 힙합 모자를 쓴 강아지 인형 세트와 고양이 인형 세트를 들고 계산대로 가셨다. 아기자기한 소품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딸을 뒤로하고 엄니는 집에 고양이 인형은 물론, 강아지 인형까지 가지런히 정리해 놓으시고는 시골로 내려가셨다.




이리하여 같이 사는 식구가 갑자기 늘었다. 강아지 세 마리, 고양이 아홉 마리. 게다가 이미 오래전 엄니께서 선물해 주시거나 가져다 놓으신 인형들까지 합하면 스무 마리는 족히 되는 것 같다. 거실을 오가며 문득문득 보게 된다. 엄니의 선물. 작은 인형들을 조심스레 하나하나 놓으시던 작은 손을 떠올린다. 얘, 이게 낫니 아니면 이게 낫니. 이렇게 보고 저렇게 봐도 잘 모르겠다 싶어 그냥 아아 이게 낫네요, 하니 그렇지? 하며 흡족하게 웃으신다. 괜히 한번 강아지를 툭, 고양이를 툭 건드려 본다.


삶이라는, 그리하여 '생일'이라는 가장 큰 선물을 주시고도 매해 뭔가를 주시고 다시 주시는 그 마음 앞에서 공연히 죄스러워지는 저녁. 가슴을 한껏 펴고 당당하게 열심히 살아야지. 오늘도 이렇게 시답잖은 다짐뿐이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살아야지, 열심히 계속해서. 잘 안 되어도, 잘 되어도 그저 그날 하루를 살아야지.


우리 엄니의 명랑하고 순한 마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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