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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May 11. 2021

그해 여름

2020년 5월


그 여름은 어쩐지 흐릿하고 희미했다.

 

그해에 나는 독립을 했고 가족들과 함께 살던 집에서 혼자 지내고 있었다. 집 근처에 닿던 지하철 5호선은 꽤나 깊어 지상으로 나오려면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했던 기억. 터벅터벅 한 계단씩 짚어 올라가노라면 왠지 이 계단이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밀려들곤 했다. 저 멀리 희미하게 흩뿌려지는 빛도, 결코 손에 닿지 않을 것만 같아서 백팩 어깨끈에 손을 말아 쥐고 한참 동안 계단을 올려다보기도 했던, 그 여름은 흐릿하고 희미했다.

 

그날도 계단 꼭대기에 간신히 올라 숨을 몰아쉬며 지상으로 나설 채비를 하는데, 지하철 출구에 바짝 다가선 단발머리 소녀 하나가 있었다. 품에는 하얀색 강아지를 소중히 안고, 그녀는 목을 길게 뺀 채 내가 막 지나온 지하철 입구 저 너머의 어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덩달아 내 뒤편의 어둠을 흘끗 바라보는데 소녀 품에 안겨 있던 하얀색 털 뭉치가 별안간 깡- 하고 짖었다.

 

- 엄마아-!!

 

소녀가 팔을 번쩍 들고 마구 흔들었다. 강아지가 재차 깡깡 짖었다. 어둠 속에서 천천히 빛으로 나아오는 중년의 여인. 엄마 왜 이렇게 늦었어. 깡깡- 앞차를 놓쳤지 뭐니. 헥헥- 아휴, 것도 모르고 걱정했네. 할짝할짝- 많이 기다렸니. 깡깡- 아빠가 치킨 시켰어. 얼른 가자.

 

소녀의 품에서 뛰어내린 강아지가 펄쩍펄쩍 뛰며 여인의 바지 끝자락에 매달렸고 여인이 강아지를 안아 올렸다. 소녀가 여인의 팔에 자기 팔을 끼워 넣었고, 나는 흘러내리는 백팩 끈을 끌어올리며 아주 천천히 그들의 대화를 스쳐 지나갔다.

 

그날 밤 나는 참으로도 느릿느릿 걸었다. 어찌나 느릿느릿 걸었는지 곧 강아지를 안은 모녀에게 추월당했는데, 소녀는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종알종알 떠드는 중이었다. 거리가 멀어지면서 먼저 소리가 흐릿해졌고 뒤이어 모습마저 사라졌다.

 

사라졌지만, 보지 않고도 그릴 수 있는 풍경이었다. 하얀 털이 달린 강아지를 안고, 목을 길게 뺀 채 지하철 아래를 내려다보며 엄마 얼굴이 언제나 나타날까 이제나 저제나 마음 졸이며 기다리던, 어떤 여름날의 저녁.

 

그러니까, 한때는 내게도 머물렀던 풍경.

 

아주 오랫동안, 어쩌면 영원히-

그래, 다시는 내게 머물지 않을 풍경이겠구나.

 

그날 나는 한때 내게 머물렀던 그러나 지금은 나를 떠나고 없는 어떤 시간들을 아주 오랜만에 만난 느낌이었다. 내게서 떠난 시간들이 죽지 않고 살아남아 오랫동안 이 세상 저 세상을 떠돌고 있으리라는 생각. 나를 통과한 시간이 나를 키우고 그냥 소멸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어느 곳에선가 또 다른 아이를 키우며 그대로 머물러 있으리라는, 그런 생각만으로도 폭우처럼 쏟아지던 외로움이 조금 잦아드는 기분이었다.

 

이편에서부터 저편 너머로 길-게 늘어선 가로수길을 지나 집으로 걸어가면서 지금처럼, 당시 우리들의 뒷모습을 보며 걸었을 어떤 사람들이 있었으리라. 그리고 어쩌면 그 사람들에게 머물렀던 시간이 내게로 왔고, 내게서 건너간 시간이 다시 소녀에게로 간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그러니까, 시간은 어쩌면 영원히 멈추어 있는 채로 이 세상 저 세상을 떠돌며 오랫동안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열 살의 시간은 언제나 열 살인 채로 나를 지나 또 다른 열 살에게로, 스무 살의 시간은 언제나 스무 살인 채로 나와 너를 지나 다시 누군가에게로 머물기 위해 떠나가는 것이 아닐까.

 

그해 여름은 거의 모든 것이 흐릿해져만 가는데 깡깡 짖던 하얀색 강아지와 모녀가 만나던 순간만큼은 성성히 살아서 아직도 내게 머물고 있으니, 아무래도 시간은 멈추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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